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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날 순 Sep 09. 2019

평범한 콩가루 집안(2)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는 분노.

 또다. 삼촌은 우리 엄마에게만 분노의 화살을 돌렸다. 삼촌에게 할머니 재산의 80%가 가고 나서도, 남은 20%를 독식하려고 하자 서둘러, 남은 20%의 재산을 할머니의 몫까지 포함하여 1/6으로 모두 균등하게 배분하기로 했다. 엄마가 할머니의 병간호를 책임지는 대신 할머니의 몫을 받기로 했다. 왜 더 많이 가져가느냐며 삼촌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엄마에게 퍼부었다. 이미 할머니 대부분의 재산을 독식하고도, 남은 재산을 할애해준다는데도 저런 식이 었다. 하루 인건비 계산이 어떻게 되는 거냐며 일일이 따져 물었다.


 이렇게 일이 되기 두 달 전부터, 할머니는 요양원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엄마는 할머니를 책임지는 대신  할머니의  80%의 재산을 가져간 삼촌에게 생활비를 30만 원씩이라고 달라고 했을 때, 삼촌은 거부했다. 줄 돈은 한 푼도 없다며 말이다. 그래서 결국 남은 재산을 빠르게 배분하는데 박차를 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놓고선 지금 와서는 남은 재산을 갖고 법적으로 하겠다며 삼촌은 큰 소리를 뻥뻥 쳤다. 하지만, 자신이 불리한 걸 알기에 바로 다음 날, 얼마 이상 금액을 맞춰주지 않으면 법적으로 하겠다고 말을 바꿨다. 법적 다툼이 피곤하기에 큰 이모 성격상 원하지 않을 것을 아는 삼촌의 계산된 행동이었다. 엄마 역시도 너무나 괘씸하지만, 변호사 선임비도 그렇고 애초에 삼촌과의 자본 싸움이 되지 않기에 어쩔 수 없이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할머니의 간호와 삼촌의 진흙탕 싸움으로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였다. 그렇게 삼촌에게 조금 더 재산이 할애됐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는 법적 효력이 있는 내용을 쓰게 되었는데, 삼촌은 이렇게 말했다.


장례식, 납골당 비용까지 다 막내딸이 부담한다는 내용 꼭 넣어!


 참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자신이 그전에 받은 빌라 한 채는, 돈 500만 원은, 아무것도 아니었나 보다. 애초에 할머니 재산도 따지고 보면, 모두 딸들의 용돈에서 비롯된 재산이었다. '평범한 콩가루 집안(1)'에도 나왔듯, 엄마의 돈으로 피아노 학원 조차 다니지 못하게 하고 모든 돈을 몰수해갔던 할머니 었다. 첫째 이모, 둘째 이모도 마찬가지 었다. 그 당시 둘째 이모는 일본에서도 돈을 붙였다. 심지어, 삼촌이 신용불량자가 되었을 때 도와준 사람들 모두 누나들이었다. 하지만 결국 돌이켜보면 엄마는 자신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던 것과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엄마는 악에 받쳐 '그렇게 하라 그래!, 내가 나중에 어떻게 할지 두고 보라 그래!' 라며 소리쳤다. 이 모든 정황을 듣고만 있어도 마음이 답답했다. 누구에게도 터놓지 못하는 '평범한 콩가루 집안 이야기.' 어디서 들어봤을 법한 막장 이야기가 결국 내 이야기가 되었다. 너무 화가 나 혼자 변호사 상담도 알아보고, 법률구조공단에 전화를 해 볼까 한참을 고민도 해봤다. 하지만, 나에겐 용기가 없었다. 이 판에 낄 수조차 없는 애송이인 나는, 엄마에게 아무런 힘이 되어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한심하고, 답답했다.


 법대는 못 가더라도 복수전공이라도 해볼걸, 하다못해 일반적인 법적인 상식이라도 알아놓고 있을 걸, 돈이라도 모아놔서 엄마한테 힘이 되어줄 걸.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지만, 결국 나는 한낱 취업준비생이었다. 용돈벌이로 내 몸 하나 챙기기 벅찬 나에게 변호사 상담이란 덜컥 겁부터 나는 이야기였다. 억울하고 답답하고 괘씸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엄마는 오죽할까 싶었다. 어떻게, 장례비용과 납골당을 엄마에게 부담하라고 적으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아직 돌아가시지 않은 할머니의 장례비용까지 생각하고 있는 걸까.


 '내가 꼭 성공해서 돈 많이 벌어다 줄테니까 걱정 마'라고 말하면서도, 근본적인 원인은 '삼촌에 대한 분노'이기에 큰 위로는 되지 못한다는 걸 안다. 삼촌의 태도가 너무 속보이고 괘씸할 터이니. 정말 너무 답답한 마음에 할 수 있는 건 고작, 익명의 힘을 빌려 글을 쓸 수밖에 없다는 것. 어떻게 보면 나에게 브런치란 '청원 게시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칠 수 있는 곳이다. 내 글의 대부분의 마무리는 '바라본다.'라는 서술어로 끝맺음을 맺는다. 씁쓸하다. 고난과 역경은 삶에서 계속될 것을 알기에 더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간절히 바랄 것이다. 아픔을 피할 수 없다면, 조금이라도 빨리 지나가기를. 한숨의 무게가 줄어들기를. 그리고 바라던 대로 되기를.


p.s 제가 제 이야기를 쓰게 된 계기는 정말 답답해서였습니다. 정말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저 사실대로 적는 것뿐이었습니다. 적으면 좀 해소될까 싶어 시작했고, 악에 받쳐 쓰다가도 글 한편을 다 쓸 때쯤은 조금 정리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 제 글을 읽으며 공감을 느끼는 분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 아파 이렇게 따로 사족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독자분들에게도 제 글이 '청원 게시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칠 수 있는 곳이기를 조심스레 바라봅니다. 댓글을 볼 때마다 이 분은 또 얼마나 힘드셨을까 감히 가늠이 되지 않아 답댓글 조차 쓰다 지우 다를 반복하고 끝내 못 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저, 독자님들의 아픈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길, 오늘 밤은 편히 주무실 수 있기를 묵묵히,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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