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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날 순 Aug 20. 2019

가족이 남보다 못할 때

이런 게 가족이라면 없는 게 낫지.

남이면 안 보면 되고 남이라서 선이라도 긋는데,
가족은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온갖 악행을 다 저지르는 것 같아. 


 엄마는 형제자매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생각해보면, 우리 엄마는 항상 형제자매들에게 무시당해왔다. 삼촌을 제외한 막내였으며, 가장 가난해서 얕보였다. 마지막 남은 할머니 집이라도 지켜보겠다고 고군분투할 때, 다른 자매들은 삼촌과 부딪히기 싫다며 외면했다. 엄마를 제외한 자매들은 '안 받아도 그만' 이라며, 엄마를 헤아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더 괘씸했던 것은 그러면서도 은근히 엄마가 삼촌과 대응하여 이기기를, 그래서 각자에게 금전적인 혜택이 오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삼촌이 엄마를 '막내년'이라고 칭하며 욕할 때도 언니들은 아무런 힘이 되어주지 않았다. 외면했다. 위해준답시고 하는 진심 없는 위로들은 오히려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다. 엄마는 항상 외로운 싸움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문제가 일단락이 되었을까. 엄마에게 상황이 어떻게 돼가냐고 매일 전화하던 이모들은 연락을 끊었다. 속 보이는 행동에 엄마는 또다시 상처를 받고 말았다. 항상 이런 식이 었다. 형제자매들에게 이용만 당했다. 내가 6살 때쯤, 첫째 이모네는 우리 가족에게 뒤통수를 쳤었다. 우리는 하루 만에 무일푼으로 쫓겨났고, 연고도 없는 곳에서 급하게 정착 했다. 그 옛날, 아직도 이사 간 날이 생생히 기억난다. 너무나 조그마한 집, 그리고 아무 말도 없는 엄마와 아빠.


 아빠는 그 뒤로도 큰 이모의 이름만 거론돼도 싫어했고, 외할머니를 찾아봬야 할 때는 그들과 만나지 않게 동선을 짰었다. 우리 엄마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돈'얘기만 나와도 치를 떨었고, 첫째 이모네와는 연락을 끊었다. 내가 중학교 때쯤이었을까. 이모가 찾아와 사과를 했고, 엄마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받아줬다. (아빠는 끝내 용서하지 않았지만, 그걸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셋째 이모는 아빠의 무능함을 엄마 탓으로 돌리며 흉을 보고는 했다. 그러면서도 노골적으로 자신이 필요할 때만 연락했다. 삼촌은 할많하않이다(할 말은 많지만 하지는 않겠다.) 이미 매거진 첫 번째 글에서 그의 인성은 충분히 드러났을 것이라 믿는다. 셋째 이모와 삼촌은 외할머니의 피를 가장 많이 받았다는 엄마의 말로 설명을 끝내고 싶다. 그나마 엄마에게 힘이 되어주는 둘째 이모이지만 이미 이민까지 간 상태이며, 실질적인 도움은 어려운 상태이다.


 대부분의 식구는 엄마에게 푼돈을 쥐어주며, 엄마의 노고를 무시했다. 금전적으로 도움은 못 주더라도 그들의 경조사는 물론이고 위로가 필요한 날에는 항상 달려갔던 엄마였다. 그들이 먼저 잘못했어도, 집에서 쉬고 싶어도, 들어주고 싶지 않은 부탁이라도 엄마가 해줄 수 있는 한은 항상 도와줬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외면'이었다. 


 가족이 남보다 못할 때의 비극은 어마 무시하다. 이미 '가족'이라는 말이 무색해진 지 오래이지만, '가족'이라는 말에 얽매인 우리 엄마 같은 사람들은 더 큰 상처로 휘둘린다. 얼른 털어내고 안 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지만 씁쓸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남에게서 받은 상처로 모자라 가족들에게 더 큰 상처를 받은 사실이, 이를 이겨내기 위해 모든 몫을 또 홀로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 병들게 만든다.


 주변 친구들과 가끔 친척 얘기를 하다 보면, 친척과 사이가 안 좋은 경우를 많이 본다. 대부분의 원인은 '돈'. 돈 앞에서 이성을 잃은 사람들의 민낯은 추하기 짝이 없다. 인정사정없는 그들은 정말 인기 드라마 명대사처럼 '파국이다.'를 외치며 달려든다. 시커먼 속내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그들에게서는 악취가 풍긴다. 그리고 끝내 그 악취는 결국 본인을 집어삼킨다. 자기 악취에 면역이 생겨, 웬만한 썩은 내는 썩은 내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그들의 잘못이 그들에게 피눈물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 엄마가 조금 답답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지만, 결코 우리 엄마 삶의 태도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싶지 않다. 엄마가 잘못한 게 아니니까. 혹여 이런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들이라면 '왜 이렇게 나는 바보 같을까', '당하고만 살까' 자책하지 마시길. 그들은 언제가 혹독한 대가를 치를 것이며, 결코 당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므로. 다만, 언젠가 '가족'이라는 이름을 다시 들먹이며 찾아올 그들에게 문전박대할 수 있는 강단은 꼭 키우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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