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쓰레기가 아니라 다용도 인간이야
매일 아침 동일한 현존, 동일한 상처가 눈 앞에 있다. 야윈 얼굴, 구부정한 어깨, 근시의 눈, 민둥 머리. 정말 못생긴 모습. (중략)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철창 속에서 나를 보여주며 돌아다녀야 한다. 바로 그 창살을 통해 말하고, 바라보고, 남에게 보여져야 한다. 이 피부 아래 머물며 썩어가야 한다. 내 몸, 그것은 나에게 강요된, 어찌할 수 없는 장소이다. 나는 우리가 이 장소에 맞서고, 이 장소를 잊게 만들기 위해 그 모든 유토피아들을 탄생시켰다고 생각한다.
-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28p
1.
무인도에 조난당한 행크는 오랜 기다림 끝에 죽음을 결심한다. 그가 구슬픈 노래를 부르며 밧줄에 목을 맨 그 순간, 해안으로 사람의 실루엣이 떠오른다. 행크는 한 줌 희망에 달려가 그를 끌어올리지만, 그는 이미 창백하게 식어있다. 좌절한 행크가 돌아서려는 때, 갑자기 시체에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 엄청난 양의 방귀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야기는 그 어마어마한 방귀를 동력 삼아, 행크가 시체를 타고 무인도를 탈출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이제 시체는 보트가 되고, 나침판, 무기, 급수대, 그리고 하나뿐인 친구가 되어 행크의 구조를 돕는다. 아무 데서나 방귀를 뀌고 발기하는 시체는 조난의 순간에서 “다용도 인간”으로 분화한다. “다용도 인간”의 이름은 매니. 매니는 “쓰레기”가 아니다.
쓰레기와 쓰레기가 아닌 것. 정상적이고 쓸모 있는 것과 버려진 물건- 똥- 시체. 전자의 세계가 흠결 없는 아이가 자라는 행복과 이상, 정상성, 건강하고 아름다운 육체의 공간이라면, 후자의 세계는 그곳으로 편입되지 못하는 여남은 것들이 모두 유기된 바깥이다. 그것들은 산 밑으로 데굴데굴 굴러 떨어지거나 해안으로 떠밀려 와 “쓰레기”의 군을 이룬다. 행크와 매니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유기되었다. 혹은 스스로를 유기했다. 그들은 그 누구의 걱정이나 사랑도 받을 수 없는 쓰레기이니까. 아버지조차 그 실종을 모르는 행크나, 신원불명의 시체일 뿐인 매니는 아름다운 세계에서 부딪힐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우리에게 가해진 실존의 시련에 대해 그것이 자유로운 존재를 압박하는 세계 따위가 아닌, 우리 존재 자체라고 말했다. 즉, 세계의 불의나 전쟁보다 한국인- 여성- 159cm- 발등의 티눈- 등 사랑하거나 사랑할 수 없는 이 모든 “나” 자신, 이 슬픈 불가역의 부피와 위상이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발견한 가장 큰 혐오이다. 돈이 없어도 배는 고프고, 똥을 싸고, 욕정 하는 추잡하고 역겨운 유기체. 그것이 바로 나이다. 나는 그런 나를 끊임없이 부정할 수밖에 없다.
행크 역시 단 한 번도 스스로의 삶을 사랑하거나 용서한 적 없었다. 발기하고 방귀를 뀌는 육체는 역겹고 수치스러웠다. 사랑받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불쑥 찾아온 죽음의 위기에서 “언젠가는 내가 스스로 했을 일이니까 괜찮아”라고 이야기한다. 아마 그는 언젠가 스스로를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행크가 쓰레기의 세계에서 모사하는 삶의 풍경들- 버스 창 밖에서 보이는 도시, 좋아하는 여자의 옆모습, 그녀 무릎 위 책, 사랑하는 사람과 할 수 있는 수많은 평범한 것들-은 너무나 아름답고 그리워서 죽었던 매니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할 정도이다. 그러니까, 그가 영화 내내 보여주는 삶에의 분투는 사실 “언젠가는 스스로를 죽였을” 그 자신과의 대립이었다. 행크는 살고 싶다. 살아서, 사랑을 하고 싶다.
2.
그러나 현실의 세계는 가혹해서 들어서는 순간부터 주눅이 들어 버린다. 그곳은 못하는 게 없는 매니를 다시 평범한 시체로 만들어 버리는 엄청난 중력의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함부로 방귀를 뀌면 안 되고, 바보 같은 말을 하면 안 되고, 발기하면 안 된다. 행크와 매니 같은 괴짜는 허락되지 않는다. 이제 매니는 아무도 추모해주지 않는 이름 없는 무덤으로 가야 하는 처지 곤란의 시체이고, 행크는 쇼크로 정신이 이상해진 가여운 남자이다.
이처럼 돌아온 세계는 여전히 불친절하고, 행크에게 존재라는 비극과 화해하는 것은 끝내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가 남기는 것은 단연 그러한 불행함만은 아니다. 내내 유쾌한 이 영화는 그 마지막까지 방귀와 함께 대양을 날아가는 매니의 모습으로 끝이 난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매니는 이제 더 이상 처지 곤란의 시체 따위가 아니다.
앞서 인용한 푸코에서 시체는 인간이 자신의 몸, 육체라는 반유토피아적 장소를 인지하게 해주는 매개이다. 시체는 썩어 문드러지는 유기체로서 스스로를 마주하게 한다. 이때 아우라는 사라지고, ‘몸’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유한성의 장소- 죽음과 고통을 수반하는 장소로 다가온다. 그러나 영화는 그 지긋지긋하고 추잡한 덩어리, 시체를 “다용도 인간”으로 격상시킴으로써 우리의 몸- 존재 또한 아주 조금은 희망적인 것으로 만들어 준다.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를 그토록 미워하지 않아도 괜찮다. 우리는 모두 방귀를 뀌고 똥을 싸며, 조금씩 외롭고, 저질 쓰레기 인간이니까. 어쩔 수 없이 그런 존재니까.
멀어져 가는 매니를 바라보며 웃음 짓는 행크는 이제 그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을까.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조금이나마 스스로를 관용할 수만 있다면, 그는 “쓰레기”가 아니다.
이 동화는 결코 행복한 미래를 약속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달콤하고 눈물겹다. 혹시 모르는 일이다. 행크는 구조되었고, 운이 좋다면 사랑받고 사랑하며 늙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 행크는 살았고, 살았으므로 사랑할 수 있다. 가장 아름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