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로사, 사랑을 향한 시 쓰기
* 2019년 시네마테크 시네필 전주 기획상영전 <시네 페미니즘 2탄 : 현대 여성 감독들의 이야기> 프로그램 북에 실은 글입니다.
<진저 앤 로사> : 어머니, 로사, 사랑을 향한 시 쓰기
글쓰기를 시작하는 소녀들에게 진언과도 같은 한 문장이 있었다. “아버지를 죽여라.” 모든 소녀들은 문학적 아버지를 살해해야만 그들 자신의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의 본질은 무엇보다도 어머니를 미워하지 않는 일이었다.
1.
진저는 1945년 히로시마 원폭과 함께 태어났다. 같은 해 같은 병실에서 태어난 로사와는 둘도 없는 단짝 친구이다. 둘은 인생의 거의 모든 순간을 함께해왔다. 그런데 어느 날 로사가 진저의 아버지 롤랜드와 사랑에 빠진다. 그것도 아주 무결한 사랑에.
롤랜드는 진보 지식인, 자유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이다. 그는 감옥에 갔고 책을 쓰고, 재즈를 사랑하며 가부장제의 속박을 거부한다. 헌신과 신뢰를 약속하는 가족이라는 전근대적 관계는 그러므로 피로하고, 부조리할 뿐이다. 아버지 대신 롤랜드라는 이름으로 호명될 것을 원하는 그는 위대한 사상가이다. 어떠한 제도나 관습도 그를 묶어둘 수 없다.
그렇다면 엄마는? 영화 속 진저의 성장통은 아버지를 극복하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소녀가 늘 앓고 있는 것은 엄마이다. 이 멋진 세계에서 홀로 그늘진 엄마가 진저는 너무나 치욕스럽고 불안하다. 위대함의 이면처럼 존재하는 엄마. 롤랜드가 아버지라는 호칭을 거부할 때마다 엄마는 울기 시작한다. ‘감정적’ 협박을 하는 것이다. 엄마는 ‘아무것도 믿지 않고’ ‘손을 놓고’ 있다. 이데올로기와 노동의 바깥에 있다. 엄마의 삶은 그 모든 공적이며 사변적이며 위대하고 숭고한 영역과 관련 없이 흘러간다.
진저는 그런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 위대함, 자유와 멀어진 엄마의 삶은 불행하다. 그런 엄마를 벗어나기 위해 진저는 롤랜드를 답습한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위대함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위대한 존재의 찬양에는 늘 평범함에 대한, 패배자에 대한 혐오가 배어있다. 누군가를 희생해서만 위대함은 성취된다. 그러므로 롤랜드 혹은 진저가 위대해지기 위해서는 존재론적으로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로 표상되는 모든 존재 -로사와 그 어머니까지도-를 희생해야 한다.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그렇게 하여 진저는 어렵사리 아버지의 세계로 들어간다.
진저가 아버지의 세계로 가기 위해 택한 것은 ‘시’와 ‘반전 운동’이다. 그녀는 시인이자 활동가가 되고 싶다. 벨라 아주머니 혹은 보부아르처럼 말이다. 영화는 진저의 시 쓰기를 따라간다. 진저의 시는 반전에 관한 강한 메시지 쓰기에서 시작한다. 그녀는 평화라는 위대함을 믿기에 거침없이 시를 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진저의 시위가 한결 거칠어지고, 실천적으로 되어갈수록 시는 자신 안으로 향한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싸우는 소리, 아버지와 로사가 섹스하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시를 쓴다. 그녀의 시는 이제 핵무기 없이도 무너지고 폐허가 되는 세계를 상상한다. 아버지가 그녀에게 수혈한 자유와 평화라는 이데올로기가 이제 더 이상 그녀의 삶을 구할 수 없는 것이다. 위대한 사상은 이제 그 누구의 삶도 구하지 못한다. 어머니, 로사와 진저, 심지어 롤랜드 자신마저도. 핵전쟁의 위협은 이제 사랑하는 로사를 잃는 것으로, 어머니의 자살로 진저의 삶 속에서 구체화된다. 그러므로 핵폭발 없이도 도처에는 상처와 부재만 가득하다.
진저는 그때야 자신의 시 쓰기가 기만적이었음, 시와 평화 시위가 결국 아무도 구하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자리에서 진저의 글쓰기와 믿음은 다시 태어난다.
2.
샐리 포터는 이처럼 믿음과 인간애가 결여된 허울뿐인 이데올로기와, 그로 인해 희생되어가는 관계에 주목한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예술 역시 비판의 대상이다. 이 말은 샐리 포터가 이데올로기와 예술의 허구성을 믿는 포스트 모더니스트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녀는 어쩌면 누구보다 예술과 희망을 믿는다. 다만, 늘 반성적으로 그 진정성- 그것이 진정 누구를 구원하는가 묻는다. 그녀가 태어난 20세기에는 위대함이 개인의 삶을 황폐화하고, 구원 없는 믿음이 폭력으로, 실재를 위협했던 것이다.
샐리 포터가 그동안 <더 파티> 등을 통해 보여줘 온 우아한 풍자는 영국을 이끌어간다는 진보 지식인들에 대한 조롱 말고도,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었다. 그녀에게 성찰은 진보 지식인이자 예술가인 자신의 영화와 예술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20세기 많은 사상가들은 예술에 관하여, 그것이 그저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유통할 뿐이라 비판했다. 삶 앞에 무력한 예술은 기만과 향락일 뿐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세기는 왔고 예술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계속될 것이다. 때문에 그녀의 성찰은 예술이 계속해 가능할 수 있고, 가능해지는 지점을 탐색하는 작업이다. 기만 혹은 향락이 아닌 예술의 자리를.
20세기에 태어나 21세기에 영화를 만들고 있는 그녀에게 그것은 진저의 글쓰기처럼, 위대함의 허영을 넘어서야만 한다. 말뿐이 아닌 사랑과 구원을 향해 쓰여야 한다. 만약 <진저와 로사>가 그 시대를 살아낸 모든 소녀들의 자전적 이야기라면, 이는 사실 한 소녀의 성장담인 동시에 예술에 대한 샐리 포터의 메타적 진술이다.
따라서 영화는 진저의 시가 자신에게로 그리고 그러한 굴절-내적 외적 폭발-을 거쳐 어머니와 로사에 대한 용서, 존재론적 화해로 나아가는 과정을 통해 진저가 진정한 인간애, 사랑을 성취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마지막 시퀀스, 진저는 롤랜드를 등진 채 처음으로 종말이 아닌 미래에 관해 쓰기 시작한다. 롤랜드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그의 사고와 언어는 위대함을 잃었다. 중반부, 슈베르트를 듣는 롤랜드의 오열이 하이라이트 되었던 장면과 비교하여 고뇌의 찬 롤랜드는 더 이상 장면의 중심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의 고뇌가 후경화되는 설계는 이 같은 분리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혹독한 밤이 끝나고 새벽이 밝아오는 시간, 그녀가 쓰는 것은 (시를 넘어선) 다만 한 편의 고백이다. 이제는 잃었지만 사랑했던 로사 그리고 죽음의 고비에 있는 엄마에게. 고백은 언제나 자신을 무방비하게 드러내는 일, 말없이 앓던 마음을 꺼내 보이는 일이다. “(…) 이제 우리에게 내일은 없을지도 몰라. 그런 공포에 떨면서도, 슬픔에 몸부림쳐도, 난 이 세상을 사랑해. 모두가 살았으면 좋겠어 (…) 진짜 중요한 건 말이지. 이렇게 사는 거야. 살아 있게 되면, 용서하지 못할 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