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에게서 사랑을 배우다
내가 읽지 않는 종류의 책이 있다. 소위 고전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아이를 키우면서 손에 들지 않았다. 오로지 육아서와 아이와 관련된 뇌와 심리에 관한 책을 일게 되었다. 왠지 고전이라고 불리는 책은 재미없을 것 같은 마음도 들었다. 게다가 <어린 왕자>라니....... 독서모임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지정도서로 <어린 왕자>를 읽게 되었다. 독서모임으로 생긴 작은 변화는 읽지 않을 책을 읽게 된다는 것이다. 중고서점에 들러 영어와 번역이 함께 있는 것으로 골랐다. 아이들이 자는 새벽 시간에 일어나 <어린 왕자>를 읽기 시작했다. 고요한 시간, <어린 왕자>는 새롭게 다가왔다.
눈길을 끌었던 첫 구절은 ‘어른들은 가장 중요한 일은 묻지도 않는다. “목소리가 어떤 친구냐? 그 친구는 어떤 놀이를 가장 좋아하지? 나비 채집을 하느냐?”’였다. 세상에나! 아이들의 마음을 몰라서 답답했던 내게 책은 대답해 주었다. 아이에게 중요한 질문을 하라는 것이다. 내 관점에서만 아이를 보려 하니 당연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 뿐이었다. 또 하나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와 대화를 하려면 상대인 아이의 눈높이에서 물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육아서보다 더 육아서 같은 내용에 계속 밑줄을 긋고 있었다. 긋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마음을 흔들어 놓은 두 번째 구절은 ‘내 별에는 딴 곳에서는 절대로 자라지 않는 이 세상에서 오직 유일한 꽃이 하나 있는데, 어느 날 아침 꼬마 양이 모르고 그만 똑 따먹어 버릴 수도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어.’ 다. 그렇다. 이 우주, 지구 어디에도 없는 소중한 존재는 내 아가들이다. 소중한 아이들이라는 것을 화에 휩싸이면 잊곤 했다. 어린 왕자와 장미꽃의 관계가 나와 아이와의 관계 같았다. 어린 왕자가 장미를 키우면서 사랑을 배울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한 별 위에, 혹성 위에, 아니 내 별, 이 지구 위에 내가 달래야 할 한 어린 왕자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린 왕자를 껴안고 달래며 말했다.’ 이거구나! 지금 이 지구에서 내가 할 일이었다. ‘아이를 기르는 일’이다. 내가 원한 일이었다.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는 일이었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엄마로서의 역할이다. 적어도 아이가 열 살이 될 때까지! 나만의 기준이다. 아이가 10살이 되면 그때는 나로 살아갈 것이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런데 두려웠다. 10살이 된 그 시점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누가 나를 써줄까? 아이만 키운 무경력 아줌마는 어떤 일을 해야 할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자격증 과정을 찾아서 온라인으로 수강하고, 책을 읽고, 정리하고, 시험을 준비했다. 그 당시에는 불안에서 온다는 것도 몰랐다. 아이만 키우면서 도태되고 있다는 느낌이 가득했다. 그때 내 마음을 다잡아 준 문장이었다.
이 지구에서 내가 달래야 할 두 아이가 있었다. 나는 두 아이를 껴안고 달래야 했다. 아이의 마음을 모른 척하지 않고 아이의 두 눈을 보고, ‘사랑해!’라고 얘기해 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육아서는 나를 다그치고, 잘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육아서를 읽으면 마음이 아프고, 속상했다. 모성애가 넘치는 작가들이 ‘사랑으로 키워라.’라고 이야기하면 화가 났다. 온전한 사랑을 느끼며 성장하기엔 우리 엄마는 너무 바빴고, 애처로웠다. 엄마 대신 엄마 역할하면서 감정을 차단한 채로 스스로 ‘아무렇지 않아. 원래 그런 거야!’하면서 살아온 시간들이었다. <어린 왕자>는 엄마인 ‘나 때문’이라고 비난하지 않았다. 그냥 어린 왕자와 장미, 나(작가)와 어린 왕자의 관점에서 조용히 속삭여 주었다.
‘마음으로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당신이 당신의 장미꽃을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당신이 그 꽃에 바친 시간 때문이에요.’
‘당신은 당신이 길들인 것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거예요.’
<어린 왕자>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방법과 소중한 것에 들인 시간과 정성, 길들인 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내 아이가 정말 소중한 이유는 정성을 다해 내 모든 시간을 바쳐 노심초사 길렀기 때문이었다. 낳지 않은 자식을 마음으로 낳은 자식이라고 하는 말도 이해하게 되었다. 마음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행동으로 보아야 한다는 작가의 글귀가 뇌리를 스친다. 아이의 따뜻한 마음을 때때로 느낀다. 거친 행동과 표현을 하지만, 그 안에 따스한 마음이 있다. “예은아~엄마 물 한 잔만!” 하고 책을 읽는다. 정수만 나오는 정수기라서 정수기 물을 한 잔 받더니 전자레인지를 돌린다. 딱 적당하게 미지근한 물이었다. 엄마가 마시는 미지근한 물을 알고 있는 딸.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들인 정성과 사랑이 아이와 내 안에 배어 따뜻한 행동으로 불쑥불쑥 감동을 안겨준다. 이 책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쩔 뻔...
<어린 왕자>는 육아서 보다 더 의미 있고, 잔잔한 감동과 깨달음을 주는 책이었다. 이때부터 육아서는 가끔씩 필요할 때에만 찾아 읽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마음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사람의 마음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변해가는 것일까? 질문들을 why노트에 적었다.
2015년 4월 11일 101일 차
왜 이 나이가 돼서 읽은 <어린 왕자>는 진한 감동이 있을까?
2015년 4월 12일 102일 차
왜 책 속의 한 줄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까?
왜 매우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을까?
왜 길들인 것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할까?
나는 왜 어린 왕자를 엄마의 눈으로 해석했을까?
나는 모성애가 다른 엄마들보다 뛰어나지 않을까?
그런데 왜 나는 아이들에게 나쁜 것은 하지 않게 될까?
책을 읽고, 책에 관한 why를 던지고 나름의 답을 생각해 본다. 4년 전의 why에 지금은 새로운 답을 할 수 있는 내가 되어간다. 책 속 한 줄이 위로를 해줬다는 것을 안다. 책을 읽고, why를 쓰고,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것들을 실천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이와 눈 맞추기! 오늘도 사랑한다고 말해줘야겠다. 그럼 된 거다. 내가 사랑해야 할 어린 왕자, 어린 공주들에게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