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이의 마음을 알고 싶었다. 아이다움이 부러웠다. 우리는 사회에서 규정한 것을 나라고 나도 모르게 규정당하고 살아간다. 엄마는 놀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이에게 친절한 엄마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것보다는 해야 하는 것과 해야만 하는 것에 더 마음이 닿았다. 그러면서도 늘 아이의 마음이 궁금했고, 공감을 해주고 싶었다. 아이가 반으로 잘라 준 옥수수를 다시 붙여 놓으라며 우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도 하고 다시 사주겠노라 해도 울고 불고 악을 쓰며 우는 아이를 싸늘한 표정으로 바라보곤 했다. 마음에 품은 분노를 표출하면 큰일이 날까 봐 두려워했다. 늘 공감이라는 키워드는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김미경 강사님의 책 소개 영상을 보았다. 한 구절을 소개해 주는데 내가 읽어야 할 책이라는 감이 왔다.
p. 28 공감하는 순간 치유는 시작된다.
아무런 판단 없이,
길고 긴 대화 없이,
누군가 내 몸과 마음을 이해해 준다는 것은
그 자체로 완전한 감동이다.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 부른다.
p.34 중요한 것은 내 몸이 지금 힘들다는 것에 공감하는 것이다. 그 순간 치유는 시작된다.
나는 공감받아본 경험이 없었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나 스스로 마저도 나를 느끼려 하지 않았으니 공감을 하고 싶다는 것은 사막에서 눈을 만나야 하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뜨거운 사막에서 눈이 내릴 수 있을까? 내가 공감하려면 내가 있는 장소를 옮겨야 한다. 내가 지금 있는 장소가 사막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눈을 보고 싶다면 겨울이 있는 곳으로 나를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사람도 자연이라는 작가의 해석을 보고 내가 잊고 있던 중요한 무엇을 찾은 것 같았다. 나도 자연이다. 내가 먹은 것이 내가 된다. 내가 느껴야만 공감할 수 있다. 내가 경험한 것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럼 사막에서 어떻게 겨울을 찾아간단 말인가? why를 기록해보자. 신기율 작가의 말처럼 나를 느껴야 한다.
p.204 이 시대는 힘든 일이 있거나 슬럼프에 빠지거나, 슬픔의 감정을 느낄 때 모두 ‘잊으라’고 말한다. 잠시 여행을 가든, 잠을 자든, 재미있는 영화를 보든 그냥 잊어버리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많은 정신적 스승들은 ‘찾으라’고 말한다. 나를 슬프게 하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나에게 이 고통이 왜 왔는지, 이 감정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찾으라고 한다.
내가 먼저 내 감정을 느끼고 찾아야 아이의 감정을 알아주고, 아이에게 불편한 감정을 내보여도 괜찮다고 말해 줄 수 있다. “울지 마!”, “왜 이렇게 짜증 부려?”, “또 짜증 내는 거야?”, “왜 이렇게 엄마를 힘들게 해?”, “엄마도 너 때문에 짜증 나잖아.”
내가 아이에게 뱉어낸 말들이다. 내가 많이 들어서 몸속에 각인된 말. 그대로 받아들이기 싫었던 말들, “나도 사랑받고 싶어.”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말. 이 말을 아이를 낳고서 정말 많이 들었다. “엄마 사랑해요. 태어나줘서 고마워요. 축복해요.”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유치원에서 써온 편지들 속에 메시지들이다. 나를 이렇게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주는 유일한 생명체였다. 엄마가 화를 내도 엄마가 가장 좋다는 두 딸, 나는 사랑받고 있다. 결국 내가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으려면 내 상처와 마주해야 한다. 작가의 말처럼, ‘찾아야 한다’
20150618 #165
왜 신기율 작가는 우울감을 스스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이라고 볼까?
왜 나는 신기율 작가의 관점에 격하게 공감할까?
왜 자연에서 난 먹거리가 주는 힘을 간과했을까?
왜 사람도 자연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을까?
왜 나는 공명이라는 단어를 그동안 놓치고 있었을까?
20160624 #170
왜 나는 아이와 노는 것이 어색할까?
왜 나는 아이와 노는 것이 재미가 없을까?
왜 나는 아동 자아가 작을까?
왜 나는 동심을 잃었을까?
왜 이해하는 것과 공감하는 것이 다르다고 생각될까?
왜 이해는 하지만 공감은 어려울까?
왜 <직관하면 보인다>라는 책에 끌리는가?
왜 직관하고 싶을까?
책을 읽고 내 마음을 마음 노트에 why로 남긴다. 때로는 마음에 들어온 why 하나를 꺼내어 생각해 본다. 나는 왜 공감하고 싶을까? 공감하고 싶다는 마음에는 공감받고 싶은 내 마음도 함께 있다. 작년 가을이 되어서야 비로소 공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몸이 아파 한의원에 갔는데, 한의사 선생님의 한 마디, “우울증이 있으신가 봐요. 근래 힘든 일 있으셨어요? 맥은 피아노 반주처럼 몸의 상태를 보여주거든요.” 눈물이 났다. 그냥 알아만 줬는데도, “힘드신가 봐요.”라는 말에 눈물이 흘러나온다. 바로 전 날, 신랑과 통화했다. “나도 엄마한테 소리 지르고 화난다고 말하고 싶어. 그런데 어떻게 나까지 그래? 아! 근데 예담이는 하는구나. 소리 지르고 화내고, 나한테 다 하네. 그래도 괜찮다는 것을 나한테 알려주는 거였구나!” 말을 끝내자마자 울음이 터져 나왔다. 말도 못 할 만큼 엉엉 울었다. 내가 내 마음을 알아주고, 내 마음을 그대로 마주하자 치유가 시작된 것이었다. 게다가 바로 다음 날 한의사 선생님이 내 몸과 마음을 알아주셨다. 만성피로 상태라고 침을 맞고 가라고 하신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아무도 몰라줄 때 한 사람이 알아봐 준 것의 놀라운 힘을 경험했다.
아이는 내가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고 난 뒤로 소위 엄마들이 말하는 지랄을 하지 않는다. 내가 아이의 마음을 알아주고 “그랬어?” 해 주니 소리 지르고 화내지 않고 자신의 상황을 말로 이야기해 준다. 내 마음을 찾으면 아이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데 38년이 걸렸다. why와 책 덕분이다. 공감, 나를 보는 것부터 시작이다. 잠깐 멈추고, 나에게 물어보자. 왜 힘들지? 왜 내 마음을 모르지? 왜 마음을 알고 싶지? 왜 마음을 찾아야 하지? 왜 마음을 바꾸라는 말을 쉽지만 마음을 바꾸는 건 어렵지? 내 마음은 어디 있는 거지? 마음을 찾으면 어제 보다는 조금 더 평온한 일상을 보낼 수 있다.
내가 사랑받고 싶구나! 하며 글을 쓴 날이다. 이모와 함께 외할머니네에서 1박을 하고 온 딸은 들어오자마자 내가 쓰던 노트에 '엄마 사랑해'라고 메시지를 적어놓았다.
아이는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사랑받고 싶어 한다는 것을? 때때로 아이와 내가 아주 깊이 연결된 존재라는 것을 느낀다. 나를 비춰주는 존재, 이대로도 충분히 사랑스럽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선물 같은 아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