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why를 지속하려고 노력할까?
20150302 #62
나는 나에 대해 궁금했을까?
나는 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어 했을까?
행복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에 두고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를 아주 오래도록 찾아 헤맸다.
나만의 행복에 대한 정의는 발견하지 못한 채 막연히 행복이란 걱정이 없고,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상태라고 생각했다.
Happiness is the way.
웨인 다이어 작가님의 <인생의 태도>의 원제를 보면서 행복이란 '길', 그 자체임을 깨달음.
나는 스스로 노력을 하면서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한 모든 일들은 '하찮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록한 why들을 다시 읽으면서 내가 표현한 단어들을 보면서 나를 발견하기 시작하면서 나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나는 나를 하찮게 여겼구나!
그런데 정말 나는 하찮은 존재인가?
만약 하찮은 나에게서 태어난 사랑스러운 아이들은 존귀한 존재가 되는 것인가?
왜 나는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는 걸까?
왜 나는 why를 지속하려고 노력했을까?
나는 내가 모르는 나를 알고 싶었나 보다. 사랑하며 살고 싶었나 보다.
<파친코 2>에서 선자와 노아의 대화
"전 이 더러운 업계에서 일하는 조선인이에요. 제 피 속에 흐르는 야쿠자 기질이 절 지배하는 것 같아요. 전 결코 깨끗해질 수 없어요." 노아가 소리 내어 웃었다. "저주받은 피죠." p.229
소설에서 노아는 엄마가 찾아오고 난 다음에 권총으로 자살을 했다.
대체 왜 자살을 한 걸까?
<내 마음을 만지다>의 한 구절이 그 해답일 수도 있겠다.
"우리 안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적인 믿음을 심어주는 목소리는 반드시 멀리해야 합니다. 스스로를 나쁜 사람이고 부끄러우며, 가치 없고 무능력하며, 못생기고, 사랑스럽지 못한다고 말하는 내면의 목소리가 있다면, 그것은 모두 비판자 부모가 폭력적으로 심어준 잘못된 자화상입니다. 이 자화상은 학습된 것이지 진정한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거짓 자화상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어야 합니다."p.29
부모 자신이 스스로를 하찮게 여긴다면 아이 역시도 그리 믿어버릴 수밖에 없다. '여자의 인생은 고생길'이라는 마음으로 아이를 위해 희생하며 살았기에 아이는 온전히 자유롭게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다. 물론 시대적 상황이라는 것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역사 안에 가지고 있는 무의식은 '왜'를 통해 의식으로 떠올리기 전에는 추동될 뿐이다.
우리 아이가 있는 그대로 사랑받는 존재라면,
엄마인 나도 있는 그대로 사랑받는 존재여야 한다.
내가 있는 그대로 사랑받는 존재라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 사랑받는 존재인 것이다.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연습을 하러 이 지구에 왔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나는 why를 지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