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글쓰기로 나를 표현하는 것이 어려울까?
20150212 why노트 44일 차 질문
2015년 2월 12일 44일 차 질문 노트에 있는 질문을 꺼내본다.
왜 과학을 배워야 할까?
왜 생명과학이 필요할까?
왜 나는 사람이 궁금할까?
왜 why를 하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될까?
왜 머리가 좋은 사람보다 노력하는 사람이 성공할 확률이 높을까?
왜 근래 why에 부정적 시선이 있을까?
왜 마음은 관점을 지배할까?
왜 메모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 잘 적지 않을까?
왜 나는 글쓰기로 나를 표현하는 게 어려울까?
왜 뇌를 알면 가능성이 보일까?
41일 차 질문에는 왜 작가들은 글을 쓰고 싶어 할까?라는 질문이 기록되어 있다.
2022년 8월 2일, 오래된 나만의 질문들을 꺼내서 지금을 기록해 보기로 했다.
과거에 기록해 둔 질문에서 나를 다시 만날 수 있다. 막연하게 '글쓰기는 어렵다', '나는 글쓰기를 못한다', '내 글은 초등학생 같다'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때는 4살, 7살 아이를 키우는 전업주부였다. 내 시선에 세상은 불안했고, 위험해 보였다. 무채색의 세상이었다.
전업주부로서의 삶이 고난이라고 여겨졌다. 왠지 모르게 공허했고, 우울했고, 내가 무가치하게 느껴졌다. 아이를 키우는 것이 전부인 삶을 사는 것이 편안하지 않았다. 내가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나는 왜 글쓰기에 대한 질문을 적었을까?
내 질문을 다시 읽어보고 밑줄을 긋기 전에는 알지 못했다.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다.
나는 시간이 소중했고, 소중한 시간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내 사랑이 온전히 아이에게 전달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나는 아이를 너무 사랑하는데, 내 표현은 내가 경험했던 표현에 그쳐버렸다. "안돼!"가 일상인 삶에서 아이는 내 사랑을 어떻게 기억할까 두려웠다. 내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아이는 어떻게 나를 기억할까? 눈물이 났다.
내 사랑을 언제고 꺼내 볼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글을 남겨야 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나는 내 사랑을 글로 표현하고 싶다는 것을 내가 적어둔 질문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부정적으로 적힌 질문들에는 내가 하고 싶은 소망이 있다. 다시 읽는 8년 전의 질문들은 지금의 나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마치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첫 5개의 질문이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사실이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마음을 되찾고 싶었다.
내 마음을 글로 표현하는 일이 어렵다고 생각했다.
내 마음대로 적으면 그뿐인데, 그때는 그랬다.
100명의 엄마가 있다면 100명의 사랑이 있다. 나는 담담히 내 나름의 사랑을 표현할 뿐이다.
아직도 글로 나를 표현한다는 것이 어렵다.
왜 나는 글쓰기로 나를 표현하는 것이 어려울까?라는 질문에는
나는 나를 표현하고 싶다.
나는 글쓰기를 하고 싶다.
나는 글쓰기를 잘하고 싶다.
나는 글쓰기가 쉬워졌으면 좋겠다.
내 마음이 담겨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아이들의 질문에 어떤 마음이 담겨있는지
부정적인 표현 뒤에는 어떤 긍정적인 마음이 담겨있는지
이제는 나만의 해답을 내어 본다.
모든 질문에는 마음이 담겨 있다.
내 마음을 보는 질문을 기록한다는 것은 기적이었다.
휘파람 부는 사람
-메리 올리버
이 우주에서 우리에겐 두 가지 선물이 주어진다.
사랑하는 능력과 질문하는 능력, 그 두 가지 선물은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는 불인 동시에
우리는 태우는 불이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은 아니지만 곧 우리는
새끼 양이고 나뭇잎이고 별이고
신비하게 반짝이는 연못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