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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연 Jan 08. 2021

사람은 서로 변수이다.

그건 네 생각, 이건 내 생각.

내면의 자유도 없으면서 정작 타인의 마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한다.


인간은 참 불쌍하다고 자주 생각한다.


가엾다는 말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말할 수 있는 동물이라는 이유로 말할 수 없는 동물을 잔인하게 죽이고, 자연을 경시하며 인간 외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나는 인간이 잔인한 동물이라는 것에 동의하지만, 그 포악한 모습은 오히려 불쌍함을 부각한다.


인간은 스스로를 어리석은 존재로 만들기 때문에 불쌍하다. 사회를 떠들썩하게 하는 뉴스가 아니더라도, 사람의 마음은 늘 어지럽다. 오히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분란과 혼란이 더 시끄러운 것 같다. 그런데 내면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인간이 타인의 마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 이것보다 웃긴 일이 있을까.

    

내가 진실성을 입증할 수도, 주장할 수도 없다.


A thing is not necessarily true because a man dies for it.
당신이 무언가를 위해 죽는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진실해지는 것은 아니다.

-Oscar wild-     

 

내 마음과 별개로 그것에 대한 타인과 사회의 관점은 다를 수 있다. 내가 원하고 예상하는 만큼의 진실성을 입증하지 못한 채 오히려 왜곡되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전락될 수도 있다. ‘내가 원한대로 돌아가지 않아. 세상사 그렇지 뭐.’라며 회의주의에 빠지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나의 관점을 근거로 내세워 어떤 종류의 가치를 입증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건 나에게만 입증된 가치이다.      



사람은 서로에 대해 변수이다.


사람은 서로에 대해 변수이다. 내가 어떤 값을 입력했을 때, 내가 예상하는 반응이 꼭 출력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은 타인으로 인해 자주 실망하고, 가끔 괴로워하다 슬픔에 잠긴다. 타인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은 채 자신의 소견과 관점으로 출력 값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누구도 타인의 감정이나 생각에 대해 권한을 주장할 수 없다. 인간은 모두 개별화된 존재이고, 그만큼 개별화된 자유가 존재한다. 내가 아닌 그 사람을 위한 행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에 상응하는 적어도 준하는 최소한의 반응을 얻고 싶다. 이건 정당한 생각이라고 믿는다. 나를 위한 게 아니라, 순수하게 그 사람만을 보살폈을 뿐이다. 그 사람의 이득이나 기쁨만을 고려했다. 그것 외 다른 해석은 있을 수 없다.


해준다,라고 생각한다.


‘해준다’는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해준다’ 그 자체에서 그리고 과정 속에서 이미 나는 기쁨을 보았다. 표면적으로 상대를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면을 들여다볼 때 결국 나는 내가 행복해지기 위한 행동을 했을 뿐이다. 순선하지도 않고, 이타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나는 어떤 반응을 기대한다.


부질없다며 허무주의와 회의주의에 빠진다.


 진실한 마음으로 노력한 것을 알아주지 않은 채 외면하는  그 사람에게 서운한 마음이 든다. 약간 미워하는 마음이 도는 것 같다. 나는 상처를 받은 피해자이고, 저 사람은 갑질로  상처를 준 이기적인 존재이다. 저 사람은 나의 가치를 모르는 바보이다. 원래 저렇게 태어난 사람같다. 원색적인 비난을 멈출 수 없다.


그러다 어느 순간 탁, 깨달음이 찾아온다. 역시 사람한테 잘해주는 건 무의미하다며, 나를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사실 거래를 하고 있었다.


마음을 내어주었다고 생각했지만, 거래를 하고 있었다. 적어도, 최소한이라는 한정 부사를 내세우며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거래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것도 불공정 거래이다. 상대방의 동의 없이 일방적인 나의 입력값으로 상대방의 출력 값을 미리 산정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상과 다른 결괏값을 부당하다고 느끼며 혼자 실망하고 혼자 좌절한다.


개별성을 인정해야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개별화된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 이로 인해 나의 자유와 너의 자유를 존중할 때 공존하는 삶을 도모할 수 있다. 자유에 대한 이해가 전제될 때 타인의 자유를 존중할 수 있다.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한 자기 결정권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자유이다. 즉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유는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만 한다.


나는 나에 대한 자유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자유 결정권에 대한 착각은 때때로 오해와 갈등을 유발한다. 사람은 신체와 생각에 대해 스스로 자유 결정권을 지니고 있다. 달리 말해, 나는 타인의 생각이나 감정에 대해 심판할 수 없다. 그건 그 사람의 자유이다. 가는 만큼 오는 게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비난하는 건 사실 거래를 하려던 이기심에 기인한다.


 내가 생각한 만큼 나를 생각하지 않거나, 내가 걱정하는 만큼 그 사람이 나를 걱정하지 않더라도 그건 그 사람의 자유이다. 나의 자유에 따라  상대를 위한 행동을 한 것처럼, 그 사람의 자유에 따라 어떤 결괏값이 나오든 내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타인의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 욕심내지 말아야 한다.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지 말고, 나의 자유에 대해 고민해보아야 한다. 인간은 물리적인 침해는 민감하면서도, 감정에 대한 침범에 대해 무감각하다. 부조금이 내가 한 만큼 돌아오지 않았다. 욕을 하고 싶다. 친밀감, 타인의 시선, 체면 등으로 인해 액수를 정한 건 나였고, 그 사람 역시 자유대로 액수를 정할 수 있다. 이 정도는 예의 아닌가라며 판단하는 것도 나이고, 그럴 필요 없다고 액수를 정하는 것도 그 사람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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