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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연 Jan 22. 2021

연애 뭣이 중헌디.

둘이 하는 겁니다.

스무 살 이후 모든 것은 개인적인 일이다.


스무 살 이후 모든 것은 개인적인 일이다. 무엇을 하든, 누구와 관계를 맺든, 어떤 식의 삶의 형태를 선택하든 그건 한 사람만이 권한이다. 그 누구도 개입하거나 대리하는 역할을 할 수 없다. 나를 양육하고 사랑해주신 부모님의 의무는 미성년자까지로 제한되며, 그 이후 어떤 권리와 의무도 갖지 못한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감당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경제적인 독립을 하지 않은 채 부모님의 잔소리를 듣지 않는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달리 말해 경제적으로 자립을 해야 정신적으로 독립된 성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도움과 지원을 받으면서 자유를 운운할 수는 없다. 요컨대 성인은 경제적, 정신적으로 독립된 개체로서 삶에 대해 무엇이든 선택하고, 책임을 지는 존재이다.


연애는 나를 마주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다.


한 사람의 전반적인 인생에 걸쳐 영향을 주는 사건과 일은 무수히 많다. 그중 연애만큼 정신적인 과로와 행복을 동시에 수반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회적인 존재로서 인간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마주할 때 자기 자신을 보다 잘 이해하게 된다. 연애는 그 모든 종류의 관계 중에서도 나 자신을 마주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으로 개인적인 일이다.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다.


즉 당사자 외 다른 사람의 감정과 생각이 개입될 수 없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나의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여야 할 필요도 없고, 나 역시 그 사람의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여야 할 이유가 없다.


어떤 이유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만 괜찮다면 되는 일이다. 그 사람은 주변인들에게 괜찮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평가받아야 하는 사람이 아니다.  서로의 주변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주변인’ 역할을 할 뿐이다. 친한 친구나 부모님 역시 당사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주변인’이라는 사실에 변함이 없다.


하지만 때때로 타인의 참견이 개입된다.


하지만 나를 아껴주고 걱정하는 사람들은 때때로 실수를 저지른다. ‘그 사람은 아니야’ ‘왜 만나는지 이해할 수 없어.’ ‘그 사람 xx점이 아쉽다.’ 라며 요구하지도 분석과 평가가 시시때때로 이루어진다.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이 내가 아끼는 사람을 함부로 대상화 존재로 전락시킨다.  물론 아끼는 그 마음의 진실성을 의심하거나 평가절하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지만 경제적, 정신적으로 자립한 성인이 어떤 삶을 선택하고 어떤 사람을 만나든 그 누구도 참견할 수 없다. 특히 가족은 자녀를 어린애로 인식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지 말라며 극구 반대하는 경우가 있다. 스스로 선택을 할 수 있는 주체적인 존재로서의 성인으로 보는 게 아니라, 보호가 필요한 어린아이로 보기 때문이다. 성장한 어른으로서 인정하지 않으면서,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불신의 눈길을 보낸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연애.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연애를 시작했다. 친구의 표정은 밝아 보였고, 하루하루 연애로 인해 행복한 것 같았다. 그 남자는 다른 누구도 줄 수 없는 종류의 행복을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오래된 우정이나 연대, 가족 간의 사랑도 대체할 수 없는 사랑은 때로 연애를 통해서 얻게 된다. 물론 행복할 수만도 없고, 좌절, 상처, 아픔도 따르기 마련이다. 그건 ‘연애’이기 때문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행복과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친구의 남자 친구가 누구든 어떤 사람이든.


친구의 가족은 친구 남자 친구의 00점이 아쉽다고 말했다. 친구는 만나보지도 않은 채 평가해서 기분이 좋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는 “가족들은 네가 아니야. 네가 만나는 사람에 대해 가족들은 권리가 없어.”라고 말했고 친구는 동의의 표현을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형제가 들으면 “야 네 친구는 네 가족이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지.”라고 말할 거라 했다.



나는 여자 형제가 있는데 나의 여자 형제가 누구를 만나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녀는 성인이고 스스로 선택하고 고민할 수 있는 사람이다. 가족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나는 친구를 성인으로서 존중하기 때문에 그녀의 사랑을 응원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도 이해되고,  상처 받지 않고 안정되길 바라는 마음도 이해한다.



그리고 주변인의 우려대로 우를 범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 또한 개인이 겪으면서 감당할 몫이지 가족들의 소관이 아니다.


잘 보여야 할 필요 없어.


마찬가지로 그 친구에게도 말하고 싶었는데, 차마 하지 못한 말이 있다. “사실, 그 사람이 너의 가족들에게 잘 보여야 하는 것도 아니야. 가족들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는 일이야.” 가족의 부정적인 평가로 인해 불만을 토로하는 그녀에게 말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연인이 환영받길 바라는 마음도 이해되었기 때문에 삼켜 두었다.


연애는 개인적인 일인데, 어쩐지 공동체적인 일이 되어버린 것 같다.


아, 그래서 나는 말하지도 않고, 뭐라 말하든 무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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