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고 나서야, 내가 살던 세상이 얼마나 작았는지 알았다.
퇴사 5년째 되는 어느 화요일, 평일 낮 11시.
일산의 사무실 주변 대로변 카페에서 창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형 트레일러가 수시로 지나가고, 배달 차량, 크고 작은 차량들이 쉴세없이 지나가고, 가게 안에서는 커피 머신이 에스프레소를 내리고, 직원의 포터필테의 원두찌꺼기를 치는 '탕 탕' 소리가 울린다.
누군가는 배달을 뛰고, 누군가는 커피를 내리고, 누군가는 작은 편의점을 지키고 있었다.
그 풍경을 보면서 나는 멍하게 생각했다.
"도대체 나는 평일 낮에 세상에 아무도 없다고 왜 믿었을까?"
12년 8개월 동안 은행이라는 공간만 드나들던 나는
세상은 전부 사무실 안에 있고,
거리의 낮은 늘 한산할 거라고 생각했다.
내 삶을 은행이라는 작은 행성 안에 가둬 놓고 산 것을,
퇴사하고 나와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을 나는 머리로만 알았다. 이제는 온몸으로 안다.
퇴사 직후 나는 SNS 마케팅으로 소득을 만들어보겠다며 당당하게 나섰다.
하지만 준비는 어설펐고, 나는 금세 현실에 눌렸다.
이제 와 말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나는 회사에서 꽤 잘했으니, 나와도 잘할 수 있겠지’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숨어 있었다.
그 착각이 무너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회사에 있을 때는
가만히 있어도 월급이 들어왔다.
업무 시간이 끝나면 하루가 끝났고,
예측 가능한 월급과 평가 사이에서
내 삶은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있었다.
명함을 내밀 때 사람들이 보여주던 미묘한 존중,
대출 상담을 할 때 고객들이 건네던 신뢰,
친구들이 물어보던 재테크 질문,
나는 그게 '나'여서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그건 'KB국민은행 이과장'이어서였다.
그런데 세상 밖으로 나오니,
리듬도, 보호막도, 후광도 모두 사라졌다.
내 명함에 찍혀 있던 굵직한 ‘KB’ 두 글자가
얼마나 큰 보호막이었는지
나는 그제야 알았다.
솔직히, 나는 한동안 스스로에게 실망했다.
“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그 사실이 나를 가장 깊이 흔들었다.
하지만 그 흔들림 속에서 한 가지 작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세상에는 각자의 24시간이 있다.”
나는 은행이라는 작은 세계의 24시간만 살아왔을 뿐,
세상은 그 외에도 무수한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누군가는 새벽에 일하고,
누군가는 점심때 영업을 뛰고,
누군가는 저녁이 되어야 하루가 시작된다.
각자의 리듬이 있고, 각자의 생존 방식이 있었다.
그 단순한 깨달음은
나를 이상하게 평온하게 만들었다.
세상 안에서 내가 특별해서 살아남는 게 아니라,
그저 나도 움직이기 때문에 살아남는다는 사실.
그걸 인정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인정하고 나니,
나는 조금씩 다시 앞으로 갈 수 있었다.
지금 나는 공인중개사이자 재무상담가이고,
퇴사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중개 현장에서 공장과 창고를 보고,
20·30대에게 종잣돈과 투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누군가의 퇴사 이후를 함께 설계한다.
완전히 잘된 인생은 아니지만,
그래도 분명히 ‘살아내는 인생’이다.
아직도 불안할 때가 많다.
고객이 없는 날엔 잠시 멈춰 서기도 하고,
상담이 몰리는 날엔 하루 종일 말만 하다가 지치기도 한다.
가끔은 방향을 잃고,
가끔은 어린아이처럼 겁도 난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는 퍼즐 조각이라고 믿는다.
퇴사 이후의 삶은,
누가 대신 설계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더 어렵고, 그래서 더 의미 있다.
당신도 혹시 지금,
오랫동안 머물렀던 세계가 전부라고 믿고
다른 가능성을 미뤄두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여전히 정답을 모른다.
그렇지만 확실한 건 하나 있다.
밖으로 나오면 비로소 보이는 삶이 있다.
그리고 그 삶은 생각보다 더 넓고,
조금 더 따뜻하고,
조금 덜 극적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데 충분히 값지다.
나는 오늘도,
그 한 걸음을 조용히 다시 내딛는다.
그리고 당신도,
어디에 있든
당신만의 한 걸음을 시작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