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자기 Oct 17. 2020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날 살릴 거야.

중학교 3학년 시절, 우리 반에는 일기장까지는 아니어도 한 문단 정도 글을 써서 내면 담임선생님께서 답변을 달아주시는 공책이 있었다. 어느 날 나는 그 공책에 모 연예인을 좋아한다는 글을 썼고, 그날 담임선생님께 받은 답변은 뜻밖의 것이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니 정말 좋은 일이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정말 소중한 마음이다."


그로부터 십여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종종 나는 그 글을 생각한다. 공책 한편에 받은 짧은 몇 문장이 얼마나 중요한 말이었는지 생각할 때마다 나는 그 선생님께 감사한 마음뿐이다. 


내 중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은 지금 생각해도 특별한 분이셨다. 그분을 생각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야구'이다. 선생님은 모 프로 야구단의 열혈 팬이셨는데 학교에서도 그 마음을 마구 표현하셨고, 체육대회 때 부를 반 응원가는 아예 해당 팀의 응원가를 개사해서 만드셨다. 선생님이 맡으신 과목은 사회였는데, 교육방식 역시 독특했다. 선생님의 사회 교과서에는 여러 도형을 활용한 필기가 가득했고, 수업 시간에 이를 보여주며 진행하셨다. 또한 중간중간 수업 내용과 관련된 영화 토막을 준비해 보여주시곤 했다. 그때 본 영상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영화 제목은 잊었는데) Queen의 "We'll Rock You"가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오는 가운데 중세 기사들이 결투하는 장면이었다. 준비한 짧은 영상이 끝나면 선생님은 마치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 나오는 진행자처럼 영화 내용을 간추려 영업하셨다. 그래서 나는 2년 동안 들은 선생님의 사회 수업 동안 존 적이 거의 없었고, 딱 한 번 졸았을 때 죄송한 마음이 가득했다...


또 한 가지 더 기억나는 것은 선생님의 가족이다. 당시 선생님에게는 어린 아들이 있었는데, 수업을 위해 준비한 자료사진 사이사이에 아들 사진을 넣어두고는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마음껏 표현하는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체육대회 날 선생님의 아들을 실제로 보게 되었을 때, 마치 연예인을 보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선생님이 선생님이 되기 전 이야기였다.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는 공립 중학교였기에 정교사가 되려면 임용 고시를 치러야 했다. 선생님은 교사가 되기 전, 그러니까 임용 고시에 붙기 전에 너무나도 선생님이 되고 싶어서 학교 담벼락 뒤에서 울었다고 말씀하셨다. 


이 모든 수업과 개인사를 아우르는 선생님의 모습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무언가를 좋아하는, 더 나아가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나는 이렇게 무언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을 선생님 이전에, 그리고 그 이후에도 쉽게 보지 못했다. 어쩌면 선생님은 스스로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계셨기 때문에 모 연예인을 좋아한다는 나의 글 아래에 "누군가를 좋아한다니 정말 좋은 일이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정말 소중한 마음이다."라고 적어주셨던 것은 아닐까.


나는 중학교 시절 2년 동안 들었던 선생님의 사회 수업만큼이나 이 문장을 감사히 생각한다. 그 뒤로 지금까지도 나는 사회 교과를 좋아하고, 고등학생, 대학생 시절 야구를 볼 때면 자연스럽게 선생님께서 좋아하셨던 팀을 응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언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지금의 나는 알고 있다.



'무언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정말 소중하다. 그 마음은 어쩌면 나를 살릴 수도 있다.


그 예가 나의 쇼스타코비치 음악 사랑이다... 나는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정말 좋아한다. 내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한때 말 그대로 나의 생명줄이었기 때문이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듣지 않으면 살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 일하러 갈 때, 집에 있을 때, 책을 읽을  때, 그림 그릴 때, 잠자기 전에, 매일매일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들었다.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을 15개나 썼기 때문에 1번부터 15번까지 교향곡만 주구장창 들어도 몇 시간, 하루는 금방 흘렀다. 잔뜩 예민했던 내 신경은 어째서인지 역시 잔뜩 예민하고 날카롭기 그지없는 쇼스타코비치의 바이올린곡을 원했고,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갈등 상황에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속 한 악장을 계속 계속 들었다. 음악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작곡가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갔다. 쇼스타코비치의 전기가 한 권 한 권 집으로 도착하던 날, 내 기분은 축제날이었다. 처음 산 쇼스타코비치 관련 책은 엘리자베스 윌슨의 <Shostakovich: A Life Remembered>였는데, 우편함에서 이 책을 받고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춤췄다.


그날 이후 쇼스타코비치 책은 여행 갈 때에도 함께였고 읽지 않는 날에도 마치 부적처럼 내 침대 위에 있었다. 언어 공부에는 덕질이 최고라고.... 학창 시절 영어 단어 외우기를 너무 싫어했던 나는 (지금도 외우지 않아 읽을 때마다 고통스럽지만) 몇 개월에 걸쳐 쇼스타코비치 책을 읽었고, 심지어 어떤 책은 두 번 읽었다! 덕질에도 때가 맞다고, 2018년 돌베개에서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를 중심으로 당시 쇼스타코비치와 소련의 상황을 담은 책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을 번역 출간했고, 2019년에는 몇 년째 절판되었던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을 온다프레스에서 텀블벅을 통해 다시 복간했다. 그리고 서문을 읽으며 눈물을 철철 흘렸던 스티븐 존슨의 <How Shostakovich Changed My Mind>도 역시 작년 <쇼스타코비치는 어떻게 내 정신을 바꾸었는가>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지금도 나는 쇼스타코비치 공연 소식이 들리면 내적 눈물을 흘리며 당장 예매한다. 특히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공연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연주하는 당신은 최고입니다. 


나의 쇼스타코비치 사랑은 기타 등등 이어진다. 동시에 나는 알고 있다. 아무리 내가 쇼스타코비치를 좋아하고,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듣고, 공연을 찾아다니고,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만화를 그리고... 이것을 평생 해도 쇼스타코비치와 그의 음악에 대해 모르는 게 넘쳐 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사실이 너무 좋다. 어쩌면 내가 평생 좋아할 무언가를 찾았다는 사실, 그 무언가가 평생 좋아하고 듣고 읽고 공부해도 끝이 없다는 사실이 나에겐 정말 소중하고, 때때로 나를 어딘가에서 구해낸다. 무엇보다 얼마간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듣지 않았다가 다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들었을 때, 내가 이 음악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새삼 깨달을 때마다 나는 정말 행복하다.


이렇게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 이 험난한.... 세상에서 내가 좋아할 무언가를 찾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다. 어쩌면 나 역시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지난 일들을 겪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아직도 무언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너무나도 소중하다. 그 마음을 밖으로 표현하면, 신기하게도 그것과 이어진 경험을 할 수 있다. 이 경험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중학교 3학년 시절, 공책에 썼던 한 문단이 나에게 가져다준 말과 같이. 그래서 나는 지금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밖으로 표현하고, 어딘가에 기록으로 남기려고 한다. 이 글을 쓰는 것도 그래서이다.


결론은 이렇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나를 살릴 것이다.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2020.10.15. 도자기

매거진의 이전글 개를 위한 미술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