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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모삼천지교 Dec 22. 2023

겨울보다 더 차가웠던 수갑

마이너리티 리포트

날씨와 함께 떠오르는 추억들이 있다.


나에게 겨울은.

입김이 나는 추운 날 이모의 손을 잡고 걸었던 명동에서, 곳곳에 울려 퍼지던 캐럴과 김건모의 노래를 들으며 새로 산 은색 가방을 메고 너무너무 행복했던 날이기도 하고. 크리스마스 날 아침, 머리맡에 놓여 있던 산타의 선물과 엄마의 눈웃음이다.

아이와 함께 집 앞에서 어른들도 여럿 들어갈만한 이글루를 만든 날과, 핫 초콜릿에 넣은 눈사람 모양의 마시멜로우가 순식간에 녹아버려 울상이 된 아이의 얼굴이기도 한 겨울.


그렇게 모락모락 나는 입김과 함께 떠오르는 이런 이야기들을 하나씩 까먹으며 지내는 계절이라, 춥긴 하지만, 추운 만큼 따스함도 더 크게 느껴지는 이 계절을 좋아한다.


그런데 이 많은 이야깃거리들 중,

우리 가족에게는, 차갑다 못해 어이없이 서늘한 “수갑”에 얽힌 추억이 있다.



2020년 2월.

겨울 스포츠를 좋아하는 남편 덕에, 출산 후 한동안 쉰 스키와 보드를 다시 시작하고 나서는 겨울이면 스키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 주말에는 맨해튼에서 차로 4-5시간 정도 걸리는 버몬트 주에 있는 killington스키 리조트에 가기로 했었다. 당시 새로 차를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계속 고민을 하고 있던 시기라 우선 렌터카를 빌려 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집 현관에서 기다리던 나와 아이 앞에 남편이  "플로리다" 번호판이 붙어 있는 새 빨간색의 도요타 프리우스를 가지고 나타났다.

이 정도까지 낡은 차는 아니었지만 ㅎㅎ 이런 빨간색이었다!

예약해 둔 차는 어디 가고, 이 차 밖에 없었다며 어이없어하는 얼굴이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뭔가 잘못되면 수정하는데 더 한세월이 걸리는 미국이기에.

그냥 포기하고 보기에도 부담스러운 새빨간 차에 스키를 주섬주섬 싣고 스키장으로 떠났다.


그렇게 시작부터 삐그덕 했지만, 낮에는 스키를 타고 저녁에는 난롯가에서 보드게임을 하며 세 가족의 못 잊을 겨울 추억을 잔뜩 만들었다. 늘 일상보다 빠른 시간으로 흐르는 여행은 곧 끝이 났고, 3박 4일을 내리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이어진 스키캠프에 피곤해진 아이는 집으로 돌아가능 차에 오르자마자 뒷좌석에서 곯아떨어졌다. 찬 바람에 빨갛게 튼 볼을 그대로 내보인 채 세상모르고 자는 아이 얼굴로 선팅이 하나도 되어있지 않은 창을 뚫고 햇빛이 내려앉았다. 눈이 부셔 자꾸 찡그리는 아이를 보고 뒷좌석에 있던 신문을 하나 펼쳐 차 유리창에 끼워주고는 설경을 즐기며 집으로 향하는 길은 그저 예쁘기만 했는데.

Vermont 주의 경계가 저 멀리 보이고 곧  New York 주로 편입이 되는 도로를 향해 진입이 얼마 안 남은 시점,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저녁에 집에 도착하면 뭘 해먹을지 남편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중이었다. 그저 평범한 귀갓길에 갑자기 그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스쳤다.


저 차가 우리를 따라오고 있는 것... 같아.
이상하네.. 사이렌을 켜고 있는데,
경찰차도 아닌 것 같고.
근데 급하면 먼저 갈 텐데
좀 전부터 계속 우리 뒤에 있어.


누가??? 저 차??? 우리를?
에이. 왜. 우리를 따라오겠어.


낯선 상황에 백밀러를 쳐다보니,

정말 웬 검은색 SUV 한 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넓은 도로는 아니었지만, 추월을 하려면 충분히 우리 옆에 비어있는 차선으로 추월이 가능했음에도 계속 우리 뒤에 붙어 사이렌을 울리는 이 상황이 이상하기도 신기하기도(?)해서 그 와중에도 사진을 찍으며 어리둥절하고 있던 우리였다. 그런데, 이 까만 차가 갑자기 라이트로 깜빡깜빡 신호를 보내며 사이렌을 울리는 것이 아닌가.

그날 찍어둔 영상이 이렇게 두고두고 이야기할 거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말 ^_^;;;;


엇, 차를 대라고 신호하는데??
차를? 우리를?? 왜????


당황해 뒤를 돌아보니, 운전자가 수신호로 차를 갓길로 대라는 손짓 중이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일단 차를 갓길에 대니, 이 수상한 검은색 차도, 우리 차 뒤로 4-5m 떨어진 곳에 차를 대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일이냐며 물어보려고

둘 다 동시에 차 문을 열고 내리려는데...


"Freeze!! Put your hands up!!!!!!!!"
(꼼짝 마! 손 머리 위로 올려!!)


영화에서나 보던 대사가 갑자기 뒤통수에서 울려 퍼졌다. 목소리만으로도 덩치가 얼마나 큰지 가늠이 가는 큰 백인 남성 둘이 우리에게 총을 겨누고는 움직이지 말라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남편에게는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지시에 따라 앞을 그대로 본 채 뒷걸음으로 한 발씩 걸어 그들 앞으로 오라 하고, 동시에 문을 열고 내렸던 나에게는 다시 차 안으로 들어가라 소리를 질러댔다. 도무지 경황이 없어 뒤돌아 뭐라 이야기하려고 고개를 돌린 내 눈에 보인 우리를 향해 겨누어진 총.


그대로 온몸이 얼어붙었다.


도대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나도 남편도 이해가 가지 않기는 매한가지였지만, 다만, 그 찰나에 백밀러로 보이는 이 사람들이 경찰 유니폼을 입고 있었기에 강도는 아니구나 싶었다.


하지만, 왜??????????


그렇게 총을 겨누고 남편의 뒤쪽에서 접근한 경찰은, 일단 아무 말 없이 남편에게 수갑을 채운 뒤 경찰차 안으로 끌고 갔고, 도무지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지만 무서워서 눈물도 안 나오는 나는 차 안에 있으라는 경찰의 지시(라고 썼지만, 고함)에 덜덜 떨며 앞 좌석에 앉아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뒤.

남편을 차 안에 구금한 뒤, 나에게도 차 문을 열고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음을 보이도록 손을 머리 위로 올린 뒤 뒷걸음으로 차 뒤쪽으로 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리고 내 손목에 채워진 차가운 수갑.


“What's wrong? we are on our way back home from skiing....................... We have a kid. she's in the back. She's sleeping......”

(무슨 일이죠? ㅠㅠ 스키타고 돌아가는 길이에요.. 뒷좌석에 잠든 아이가 있어요.ㅠㅠ)


이 짧은 문장을 입 밖으로 꺼내 놓는데도 벌벌 떨려 말이 이어졌다 붙었다 했지만, 뭔가 설명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있는 남편 대신, 아찔한 눈앞을 부여잡고 힘을 내야 하는 것은 나 뿐이었다.


우리는 원래 뉴욕 주민이고,

스키를 타러 버몬트에 온 것이고

차 안에는 내 아이가 자고 있어요.

우리가 뭘 잘못해서 지금 이러는 것인가요. 


벌벌 떨면서도 눈물을 삼키며 온 힘을 다해 랩 하듯이 읊어대는 나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듣고 있던 굳은 얼굴의 경찰관 둘 중 한 명이 (분명..기혼자에 아이가 있지 않았을까!) 호소 아닌 호소에 마음이 움직였는지, 슬쩍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설프게 햇볕을 가리려 붙여둔 신문지 사이로 가득한 스키 장비와 스키복을 입은 채 볼이 빨갛게 되어 기절하듯 잠들어 있는 아이를 본 경찰관은….. 그제야 내 손목에 채워져 있던 수갑을 풀어주었다.


물론 끝은 아니었다.

신분증을 내놓으라는 경찰의 지시에, 조심조심 움직여 뉴욕시 시민임을 증명하는 NYCID를 내밀었는데, 혹시 내가 차에서 총이라도 꺼낼까 싶어 그러는지….이 모든 과정에도 매섭게 보고 있는 그들의 눈빛이 등 뒤로 꽂히는데 얼마나 무섭던지. 그리고 속으로 제발 잠들어 있는 아이가 깨지 않기를 빌었다.


신분증을 내밀자, 본격적인 심문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차 세우라는 신호를 한참 했는데 왜 계속 도주했죠? ”

“우선, 차를 세우라는 신호를 보지 못했어요. 남편도 저도, 한국에서 뉴욕으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뉴욕에서 우리가 보는 경찰차는 모두 흰색 바탕에 NYPD라고 파란색 표시가 된 것들이라, 이렇게 검은색으로 된 차가 경찰차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ㅠㅠ 정말이에요.ㅠㅠㅠ”

네.. 전 경찰차는 다 이런 줄 알았네요. 흑

“이 플로리다 플레이트의 차는 누구 거죠?? ”

“렌터카예요.ㅠㅠㅠ 여행 오느라 빌렸어요.ㅠㅠ 저희 차 아니에요.ㅠㅠ”


그렇게 우리가 거주하는 곳과 나와 남편의 직업, 언제 미국에 온 것인지 등을 디테일하게 묻고 난 뒤 경찰차 안에 먼저 가두어 둔 남편에게 가서 이런저런 질문을 던진 경찰관이 남편을 차에서 데리고 나왔다. 어이없음과 당황스러움, 공포와 놀라움이 다 뒤섞여서 뭐라 할 수 없는 표정으로 마주 본 우리 둘은 이어지는 질문들 속에서 그제야 더듬더듬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저지른 위반 내용인 즉...

첫째. 버몬트 주에서는, 갓길에 대고 있는 경찰차(그... 시커먼 검은색의 suv. 도대체 경찰차인 줄 어떻게 알아보냐고...!)를 발견하면 달리던 속도를 줄이고 차 내부의 운전자를 확인할 수 있도록 서행으로 통과해야 하며, 이를 어길 시 벌금에 처한단다.

둘째, 경찰이 차를 세우라 지시할 경우 즉시 차를 멈추고 경찰의 지시에 따라야 함.


그런데 우리는 그런 교통법규가 있는 것도 몰랐거니와…..

우리를 따라오는 것이 경찰차인 것도 못 알아본 것은 물론, 우리를 추격중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 한 결과!

거의 10여분 가까이를 추격전 아닌 추격적을 펼친 것.

거기다, 하필 운전하고 있던 차도 뉴욕에서 한참이나 먼... 플로리다 주의 번호판을 가진 새빨간 프리우스.

아, 추가로... 아이가 잔다고 창문에 신문지로 햇볕을 가려둔 것이 차 내부에 어떤 물건을 감추었다는 경찰의 의심을 키웠다. (이런 조합이 한번에 모아지기도 힘들지 않을까 ㅜㅜㅜ)


그러니, 경찰 입장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도록 가린 플로리다주(버몬트 주에서 차로 15시간 이상 걸리는...) 번호판을 단 차가, 교통법을 위반하여 세우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 사이렌을 울리며 따라붙는데도 무시하고 10분 가까이 도주를 하니……

여간 의심스러운 상황이 아니었던 듯하다.


다행히 덜덜 떨며 전한 설명의 끝에 경찰은 원래는 우리 둘 다 경찰서에 구금되어야 하지만 아이가 있는 것을 보아 이 정도 선에서 봐준다며 500달러짜리 딱지를 내밀고 우리를 보내주었다.


오는 내내 어안이 벙벙했지만 뒷좌석에서 여전히 곯아떨어져 있는 아이를 보며 얼마나 안심을 했던지. 부모인 우리가 둘 다 경찰서에 갇히게 되는 상황이라면... 아이는 어찌 되었을까??? 아무도 없는 이 생경한 주에서…?????아찔함이 뒷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집으로 돌아온 뒤, 후에 혹시 이 범칙금으로 인해 면허 정지가 되는 것은 아닐까 (+ 보험금을 엄청 때려 맞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어 이리저리 알아보는 과정에서 우리는 몇 가지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 경찰이 이야기한 교통법규는, 버몬트 주에만 있는 규칙으로... 실제 이를 잘 모르는 타 지역에서 온 여행자들을 노려서 과한 범칙금을 부과하기도 해서 이미 미디어에서 한번 문제가 있다고 보도가 된 적이 있었다.

- 경찰의 처리가 불합리하다고 생각될 경우, 항소가 가능하지만 이럴 경우 버몬트 주의 기관을 찾아가야만 처리가 가능하다. 직접 방문이 어려울 경우 변호사를 선임하여 처리도 가능하지만, 많은 비용이 들게 되는데 이런 부분을 악용하여 다른 주에서 온, 재방문이 쉽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을 주로 노리기도 한다는 점.

-우리가, 한눈으로 보기에도 백인이 아니라는 점 역시, 경찰이 이런 식으로 행동한 이유 중 하나라는 점 역시 명확해졌다. 아무런 무기를 소지하지 않았음을 충분히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수갑을 채우고 뒤에 세워져 있던 경찰차에 남편을 잠시 구금하기까지 했는데... 이 과정에서 일체 우리에게 안내된 법적인 기본권이나 조치에 대한 설명은 없었던 것. 이를 전해 들은 변호사인 친구가, 펄쩍 뛰며 당장 항소하라고 이야기한 데에도 이유가 있었다.


과하게 볼 수 있는 조치구나..라고 생각하던 얼마 뒤.

말콤 글래드웰의 [Talking to Stranger]를 오디오 북으로 듣던 나는 또다시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책의 첫 번째 챕터 [ Introduction: Step out of the car]에 우리가 겪은 상황과 유사한 사건의 실제 대화가 실려있었던 것.(*)


2015년 7월. 대학을 졸업한 뒤 새로운 직장도 구하고 유튜브에 일상도 올리며 생기 있는 삶을 이어가던 한 젊은 흑인 여성 블랜드(Bland)는 마트를 가기 위해서 나섰다가 교통 법규 위반으로 경찰로부터 차를 세우라는 지시를 받게 된다. 그리고 경찰이 차 밖으로 나오라고 이야기하는데, 블랜드는 그런 경찰의 조치와 지시가 과하다고 이야기하며 차 안에서 담배에 불을 붙인다. 그리고, 경찰의 지시에 대해서 자신을 이렇게 대할 이유도 권리도 없다 이야기하며 경찰의 지시에 불응한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은, 그녀에 의해 다 녹취, 녹화되어 후에 유투브를 통해 공개된다.


갑자기 차를 세우라고 하는 앞뒤 없는 상황 속에서 그저 당황하여 경찰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줄만 알았던 우리와 달리... 음성파일 속 흑인여성 블랜드는 대차게 경찰에게 따진다. 아마도 수세기에 걸쳐서 학습된, 흑인을 상대로 한 여러 불합리한 처우들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에 대학도 졸업한 명민한 이 젊은 아가씨는 다른 대응을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당신은 나에게 이럴 권리가 없어요. 이럴 이유가 없어요. 내 차 안에 가만히 있는데 왜 담배도 못 피우게 하는 거죠? 변호사를 부르겠어요."


오가는 설전 속에, 결국 둘의 감정은 상할 대로 상하게 되고...결국 경찰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I'm going to yank you out of here.
(너.. 내가 이 차에서 끌어내리고 만다.)"

오가는 설전 끝에 체포된 블랜다는 결국 경찰서에 구금되고, 3일 뒤 경찰서에서 자살하게 된다.


우리에게는 어이없는 와인 안주거리와

500불의 딱지로 남은 에피소드였지만,

비슷한 상황를 맞이한 사회 새내기였던 흑인 아가씨의 삶은, 경찰과의 대치 이후 구치소에서의 자살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 2020년 5월.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흑인 조지플로이드**가 사망하면서 전 미국이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 외치며 들끓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며, 그날 우리가 찼던 수갑이 우리에게는 그냥 한겨울의 추억의 한 조각으로 남았지만, 더 나쁜 경찰을 만났다면 비극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지금도 가끔 등골이 서늘하다.


만약에, 그날.

누가 보아도 그 두 경찰보다 체구가 작은 아시안이 아니라... 체격이 건장한 흑인이었다면?

그 두 경찰을 향해, 상황을 설명하며 감정에 호소한 것이 아니라 법리를 따지며 조목조목 반박했다면?

... 그랬다면.

우리도 다른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었던 것 아닐까???

나쁜 경찰이 작정하고, 나와 남편을 교통위반을 이유로 구금하려 했다면. 그랬다면 우리 아이는 낯선 곳에서 부모와 분리되어 어딘지도 모를 곳에서 울며 평생 씻을 수 없는 나쁜 기억을 가지게 되지 않았을까?

만약에? 그랬다면??????

반대로, 우리가 미국 내 경찰의 권위와 폭력적인 처사 등에 밝은 “백인”이었다면? 어떤 처우를 받았을까?


그날은 [우리를 지켜주는 경찰]이라는 존재가 미국에서는 때로는 다른 의미일 수 있다는 것 못지않게, 정말 새로운 나라와 환경에서 [마이너리티]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 새삼 생각해 보게 되었던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공부나 일을 잘한다고 해서 한 사회의 관습과 분위기를 단번에 이해하는 현지인이 되기란 정말 쉽지 않다. 시간만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노하우들이 훨씬 많고, 책에는 한 줄로 써져 있는 내용이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도 늘 곳곳에 다분한 것이 삶이니까. 그래서 타국에서... 그것도 소수인종의 하나로 살아간다는 것은 늘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살아가는 삶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존재하는 미묘한 차별과 불합리함을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일들도 비일비재한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이렇게 보낸 시간들 속에서

그동안 내가 한국인으로 한국에서 살면서.

당연하다 생각한 것들이,

하나도 당연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 모든 것들이 참 감사한 것들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똑같이 무수한 차별이 존재하는, 아니 미국보다 어떤 면으로는 더 심한 차별이 존재하는 한국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그 안에서 차별의 대상이 되는 경험은 겪지 않고 그동안 살아오고 대우받았었다는 사실이 새삼 감사한 동시에... 그걸 늦게 깨달아 새삼 더 부끄러운 삼십 대였다.  




손목에 찬 수갑에 대한 이야기가

와인 안주거리로 숙성되어 갈 즈음.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와 또 새로운 삶을 살아내기 시작했고, 아이도 이제는 공부 비슷한 것을 하는 나이로 자랐다. 그리고 이런 뜬금없는 질문도 하기 시작했다.




엄마. 우린 previleaged(특혜를 받은) 사람들이야?


갑자기 왜?
어떤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건강히 학교 다닐 수 있고
엄마 아빠도 너를 사랑하고
 생활은 안전하니까.
충분히 특혜를 받은 삶이라고 해도 될 것 같은데?
그런데 그건 왜 갑자기?

오늘 학교에서 선생님이
우리한테 수업 시간에 뭘 나누어 주셨는데.
우리 팀에만 종이도 조금 주고,
색칠할 수 있는 색연필도 조금 주었어.
다른 팀에는 많이 주고. 그래서 우리 다 엄청 화났거든...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선생님이 그거 일부러 그랬던 거래 Privileged(특혜를 받은)와 disadvantaged(사회적으로 혜택을 받지 못한) 알려주려고.


아, 그랬구나. 그럼 disadvantaged 되어서 기분이 어땠어?


엄청 화났어 기분 안 좋았어 속상했어.


아이의 학교에서의 경험을 듣고 이야기하며,  "Previleaged"와 "disadvantaged"의 개념을 수업 중에 먼저 접했다는 사실에 일견 일견 안도의 마음이 들었다.


아이는 기억하지 못하거나 못 느꼈겠지만 분명 우리가 미국에 살던 시기에는 disadantaged 쪽에 가까운 상황에 놓였던 경험도 꽤 있었으니까. 그저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우리 아이만 콕 집어서 괴롭히는 반 친구덕에 원장님과 담임 선생님을 붙들고 해결책을 찾느라 고심한 시간도 있었고, 코로나가 시작된 이후에는 마트의 좁은 복도 반대편에 서서 우리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백인 노인을 마주한 적도 있었다. 사람이 가득한 지하철 안에서, 제일 작은 체구의 나를 타깃으로 닌자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쫓아오던 부랑아를 만난 적도 있었고. (써놓고 보니 참 ㅋㅋㅋㅋ별일이 다 있었네요).


그런데 그 모든 경험이 아이의 기억에 상처로 남기보다는 모르는 채로 지나갔다니!

엄마의 이기적인 마음으로는 안도했다.


하지만 동시에.

아이에게 태어나면서부터 조건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또는 주어진 환경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 것일까? 고민 또한 크다. 나는 우리가 한국사람으로 한국에 살면서 누리게 되는 당연한 안전함과 편안함, 편리함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하지만, 다른 삶과 관점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도록 하기에, 아이와 함께 돌아온 이 한국이라는 사회는 '나와는 다른 사람'을 만나기는 참 어려운 곳이다 싶다.

한국에는, 특히 서울에는 어딜 가나 ‘비슷한’ 사람들만 모이는 공간들이 가득하다. 아이가 있는 사람들은 키즈카페로, 아이가 없는 사람들은 노 키즈존인 카페로. 비슷한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끼리 비슷한 구역의 학교에 배정받고 서로 비슷하게 생긴 집을 오가며 논다. 커피 한잔에, 빙수 한 그릇에 쓰는 비용의 크고 적음에 따라 만나는 사람들이 달라진다. 호텔 로비에서 마시는 커피와 메가커피를 사 마시는 사람들은 서로 교차하지 않는 삶의 영역을 지난다. 그렇게 연령이, 성별이, 성향이나, 삶의 방향이, 정치색이나 경제적인 상황이 다른 모두가 어울릴만한 공간이 흔치 않다. ***


그래서... 나와 거의 모든 생활 반경을 우리와 함께 하는 아이의 경험 역시 우리와 같을 수밖에 없기에 아이에게 어떤 세상을 접하게 해주어야 할까에 대해서 더 많은 고민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모두가 다 비슷비슷해서 내가 가진 보석이 보석인 줄 모르고, 남이 가진 보석도 보석인 줄 모르고 당연시하게 될까 싶어 말이다.



스무 살 여름.

라식수술이 끝나고 난 뒤, 안과 선생님은 내 눈의 동공이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많이 큰 편이라, 늘 빛을 훨씬 더 많이 받아들이는데 알고 있었냐 물으셨다. 한 밤 중의 가로등이나 비 오는 날의 불빛 등은 또렷한 동그라미가 아니라 성탄절에나 등장하는 뾰족뾰족한 별모양처럼 보이는 것이 모두에게 그런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어찌나 충격적이던지.

아마 그 날 안과 선생님의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나는 모두에게도 1년 365일 가로등의 불빛 아래 길쭉길쭉한 빛 막대기가 달려있는 것 처럼 보인다 생각하고 살지 않았을까. 이 작은 눈 안의 작은 구멍의 크기만 달라져도, 이렇게 보는 풍경이 달라지는데. 타고난 피부의 색이,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가정의 환경이, 태어난 나라가 다름으로 인해서 보게 되는 세상의 차이는 얼마나 어마어마 한 것일까. 그리고 그로 인해서 달라지는 사고와 삶의 형태는 또 얼마나 클까.

그 차이를 생각하며 늘 살아갈 수는 없지만.

너와 나에게는 편안한 이 환경이. 누군가에게는 낯설수도 있고, 아무것도 아닌 일들 역시 어려울 수 있다는 사실을. 그 어떤 추위보다 차가웠던 수갑의 선뜻함을 되새기며…곁에 있는 아이의 손을 잡아본다.







*Talking to Stranger 책에 실린, Introduction: Step out of the car 부분에 수록된 실제 사건의 대화가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의 링크에서 확인 가능하세요:)

https://www.penguin.co.in/step-out-of-the-car-excerpt-from-talking-to-strangers/


**조지플로이드 :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A1%B0%EC%A7%80%20%ED%94%8C%EB%A1%9C%EC%9D%B4%EB%93%9C


***경제적인 상황으로 나뉘는 공간의 부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유현준 교수의 강의 영상

서울의 도시구성에 대해서 설명하는 내용 중,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른 경제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한 공간에 머물 가능성이 낮은 도시"

 https://youtu.be/m1WUJETaI2U?si=2q0aiDy1X5QeQGd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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