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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모삼천지교 Dec 14. 2023

우리애가 그런 애가 아닌데요…

예의와 위계가 만드는 여러 가면들에 대하여.


젊은 시절에는 교사를,

나이가 더 드신 후에는 공무원이 되신 할아버지는

"예의"에 굉장한 철학이 있는 분이셨다.


아마 내가 지금 우리 아이보다 조금 더 컸을 때였을까.

추석을 맞아 찾아간 우리를 보러 입구까지 마중 나와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온 가족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연휴 직전, 학교에서 재미있던 일이 있었던 나는 할아버지를 만나면 그 이야기를 해드려야겠다고 다짐하고 왔던 터라, 빨리 전하고 싶은 마음에 "할아버지! 있잖아요~"라고 했는데...


"어디 어른이 말씀 중이신데 말을 끊어!

예의 없는 것!"

할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할아버지를 웃겨드릴 생각에 그저 신이 났던 기분은 사라지고 엘리베이터 안의 서릿장 같은 공기에 사색이 되었다. 내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만 생각하느라, 할아버지가 아빠와 말씀 중이신 것도 신경을 못썼던 것.


그렇게 잘못된 타이밍에 꺼낸 이야기주머니는 결국 나와서 웃음 보따리를 만들기는 커녕 눈물만 방울방울 만들었다.울면 더 혼날 것 같아 조용히 아빠를 따라 걸어가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할아버지 댁까지 가는 길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지금도 그날의 기억이 선명한 것을 보면 할아버지가 꽤 무서웠고, 꽤 놀랐었나 보다.


그 뒤. 말 잘 듣는 어린이였던 나는 이런 말들을 마음에 새겼다.

'누가 말 할 때는, 말 끊는 것 아니다.'
'어른들 말씀 끝날 때까지 기다려.'
'누가 말씀하실 때는 조용히 집중해서 들어야 해.'


문제는, 재미있는 이야기들도 전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길지 않은 어린이의 집중력은, 기억력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기에...'어, 이거 말해야지.'라고 했어도 말할 기회를 바로 잡지 못하면 하고 싶던 이야기는 공중으로 솔솔 날아가버리고는 했으니 말이다.

하굣길의 아이에게 '오늘 어땠어?'라는 질문을 던져본 분들은 아시리라. "재미있었어." 또는 "뭐, 그냥" 같은 두, 세 단어로 돌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꽤 많은 경우는 하루 중 있은 그 많은 일들이 정말 '기억이 안 나서'인 경우가 많다는 점을. 허허. 대신, 시시 때때로 본인들 하고 싶을 때 사라진 기억이 되살아 나 조잘거린다. 그러니, 그 이야기주머니를 받으려면 매일 5분 대기조의 마음자세로 준비하지 하지 않으면 안 될 일!



다시 그날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렇게 나는 할아버지의 불호령 이후.

자의 반 타의 반.

어른들 앞에서는 많은 말 하지 않고 듣는.

어른들 말로, '군말 없는' 어린이로 자랐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많은 이야기들은

그렇게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로부터 한참 시간을 건너뛰어.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나를 닮은 아이가 막 유치원에 입학했다.


한국과 달리 유치원 과정부터 초등학교에 부속되어 있는 미국에서는 실제 "입학"과 같은 느낌이 물씬 나는 시즌이 바로 유치원 입학이었다. 그동안 다닌 Preschool(프리스쿨)의 가족 같은 분위기를 벗어나, 높은 철장이 둘러져 있는 학교에 아이를 들여보내고 나니, 새삼 [학부모]라는 단어가 가슴에 쿵 와닿았다.


등교 첫날.

하교하는 아이 손을 잡고 "오늘은 뭐 하고 놀았어?" 하고 물어보니 "줄리가 책 읽어 줬어."라는 답이 돌아왔다.

'줄리..? 담임 선생님??'

"아~room teacher (담임 선생님?)? Do you call her Julie? (선생님을 줄리라고 불러?)"

"Yes. Everyone calls her Julie!"(응! 모두 줄리라고 불러!)

이미 다닌 프리스쿨에서도 아이들을 선생님을 친구처럼 이름으로 부르긴 했지만..

완전 아가들인 데다가, 워낙 자유로운 분위기의 프리스쿨이었어서 그곳만의 문화려니 했었다.


그런데, 학교로 입학한 뒤에도 같은 반 친구처럼 담임 선생님 이름을 이야기하는 아이의 종알거림을 들으며, 머릿속에 고민의 빨간 불이 켜졌다.

아이는 다른 친구들도 다 "줄리"라고 선생님의 이름의 부른다고 했지만... 혹시, 우리 아이만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가 잘못 알고 실례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부모의 무지가 아이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되기도 하기에, 늘 두 배는 신경을 써야 하는 이국에서의 삶은 이럴 때 참 고달팠다.


집에 돌아와 고민하다가, 선생님께 메일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00 이가 학교와 선생님을 정말 좋아하네요. 도움 감사합니다.... 어쩌고 저쩌고..... 그런데, 아이들이 선생님을 부르는 것을 보니, 앞에 Mr. 나 Mrs. 를 붙이지 않고 이름으로 부르던데요. 물어보니 다른 친구들도 그렇게 부른다고 하던데, 보통... 이렇게 부르나요? 사실 제가 클 때만 해도, 앞에 Mr. 나 Mrs. 를 붙이도록 배웠어서요.]


오래지 않아 '띵동' 회신함이 울렸다.

[하하. 맞아요. 저도 클 때는 그렇게 배웠어요. 근데 요즘은 좀 다른 것 같아요. 아이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는 분위기가 커졌고, 같은 맥락에서 아이들이 어른은 존칭 하는 것보다, 서로 친구처럼 부르는 분위기가 요즘은 더 많아요. 아이들을 작은 어른처럼 대하면, 굳이 아이들만 선생님에게 존칭을 쓸 필요는 없이 서로서로 존중하는 거죠.]


선생님의 깔끔한 회신에 마음을 놓고,

가만히 아이의 학교 생활을 지켜보니

비단 호칭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침에 들어가며 교장 선생님께 공손히 인사..가 아니라  Good morning과 함께

하이파이브를 날린 아이들은,

'교장 선생님'이나 '담임 선생님'이 아닌 '줄리'와, '크리스티나'와 전혀 거리감 없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른은 어른이기에 존경하고 존중해야 한다...

는 문화를 가지고 있는 한국이나 일본의 경우, 언어 내에 '높임말'이 존재한다. 일본어의 경우는 한국어보다 한술 더 떠서, 상대를 높이는 [공손어]와 나를 낮추어 상대를 높이는 [겸양어]와 같이 존댓말이 좀 더 다양한 체계로 분화되어 있다. 나이가 든 어른을 존중하고, 상하명복의 문화가 강한 두 나라의 언어가 이러하니…그 문화 내의 위계질서가 가지는 무게감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언어다 싶다. 반면에 같은 아시아권이라고 해도, 중국어의 경우 공손한 표현은 있을지언정 직접적인 존댓말과 같이 동사의 어미가 달라져 표현되는 높임말은 없는 편.


재미있게도, 이 각각의 언어가 가지는 높임말의 체계와 미국에서 만나는 아시안들의 자기표현의 강도는 반비례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 수 있지만, 영어와 같이 존칭체계가 없는 중국어를 구사하는 중국계 사람들의 경우 본인의 의사나 의견을 표현하는데 거침이 없었다면, 상대에 따라 본인의 의견을 내놓는 정도가 다른 것이 한국, 그리고 그 보다 훨씬 더 폐쇄적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 일본 사람들이었던 것. 특히 상대의 나이가 많거나 상사일 경우 이런 경향이 도드라져 보였다.


언어 내에 상하관계에 따라서 사용하는 언어가 다른 문화권의 아이와 어른의 대화를 보면 대부분의 대화가 A의 말이 끝나면 B가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순차적인 형태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반면, 수평적인 언어체계를 가진 곳의 경우 대화 중간에도 상대가 가만히 듣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추임새를 넣고, 추임새의 와중에 이런저런 질문이 더해지는 경우를 더 많이 볼 수 있고 이를 더 권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두 개의 다른 문화를 오가는 사람들의 경우, 그 차이를 현격하게 느끼게 되는데.. 예를 들어, 한국에서 초중고를 졸업한 뒤 대학을 서구권으로 간 유학생들이 '토론'이 빈번한 수업에 적응하지 못해서 초반에 애를 먹은 경우나, 적극적으로 의견을 묻는 외국인 매니저 앞에서 다들 이리저리 눈치 보며 누가 먼저 입을 떼나 눈치게임을 하던 한국 내 외국계 회사의 회의 모습이 이런 경우일 듯하다.


아이의 담임선생님께 받은 메일을 두고, 미국 다른 지역은 어떤가 궁금했다. (궁금이 병이고 확인이 또 직업인…닌겐이옵니다..) 그래서 몇몇 친구들에게 확인해 보니 마치 코로나를 대하는 방법이 제각각이었듯, 각 주마다 매우 다른 것을 볼 수 있었던 것


특히 보수와 진보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운 지역인지에 따라 해당 주에서 진행하는 교육방식도 차이를 갖게 되고 이에 따라 자연스레 선생님을 부르는 호칭도 달라지게 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뉴욕의 경우,  미국 내에서도 매우 진보적인 성향의 도시이고, 특히 우리가 살던 지역은 Old money(상속으로 물려받은 재산으로 인한 부) 보다는 New money(스타트업이나 기업 내 고위직으로의 승진 등을 통해서 스스로 일군 부)들이 모여있다고 일컬어지는 곳이었다 보니… 아마도 더 진보적인 교육방식이 분위기를 이끌었던 듯하다.


그러니.

가장 보수적인 언어체계를 가진 한국에서 자란 나와 남편이, 가장 진보적인(.. 음. 어쩌면 지구에서 제일?) 문화를 선보이는 뉴욕에서 형성된 자아를 가진 아이를 키우며 느끼는 어려움이나 이질감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부분이리라. 다행히 이런 어려움을 우리만 겪고 있는 것은 아닌 것이, 미국 내 교포 커뮤니티에서 아이와의 세대차이는 기본이요 너무나 큰 문화차이로 인해 가정 불화가 생겨 상담을 통한 해결을 위해서 애쓰는 경우도 많이 볼 수 있기도 했고, 이런 이슈들이 최근 다양한 작품들로 드러나고 있기도 하다.


(1)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음식 - 이민진  (2) 엘리멘탈 (3) H마트에서 울다 - 미쉘 자우너

(1) 보수적인 한국 이민자 부모와, 뉴욕에서 자란 딸 사이의 삶에 대한 가치의 갈등을 보여주는 이민진 작가의 소설

(2) 이민 1세대인 부모와 2세대인 자식사이의 직업이나 삶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를 그린 영화 엘리멘탈. 감독이 코리안 아메리칸인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어쩌면 그의 자전적인 경험을 모티프로 한 것일 수도:)

(3) 한국인 엄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작가가, 2가지의 다른 문화권을 경험하며 자란 소회와 갈등. 그리고 한국인인 엄마의 죽음을 계기로 한국 음식과 한국을 바라본 여정을 그린 자전적 에세이


얼마 전 읽은 “WEIRDest people in the world.”라는 책에 이런 나의 고민과 매우 맞닿아 있는 흥미로운 사례가 한 가지 실려있었다.

[WEIRD란?

Western countries, Educated, Industrialized, Rich, and democratic : 서양, 교육받은, 산업화된, 부유한, 민주적인(WEIRD)을 나타내는 용어]


전반적으로 WEIRD라는 특성을 가진 문화권과 사람들에 대한 분석과 다양한 실험, 연구 결과들이 총망라된 책이었는데…기본적으로 '서구'라고 칭해지는 미국이나 유럽권의 사람들의 특성에 대한 연구를 담은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런데 그 내용 중 “한국인”과 “미국인”을 비교한 실험 결과가 눈길을 끌었다.


방식은 간단했다.

“A”라는 동일한 사람에 대해서 그의 부모와 친구들이 이 사람을 어떤 사람이라 생각하는지 묻고, 거기에 나라별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들여다본 것.

미국인들의 경우 부모님을 대할 때와 친구를 대할 때의 모습이 일관성 있는 경우, 그 모습이 다른 경우보다 "사회적으로 뛰어난" 것은 물론 "매력적"으로 평가받았다. 이는, 미국에서는 어떤 관계에 있더라도 일관성을 유지(누구에게나 똑같은 모습의 스스로를 내보이는 것)하는 것이 사회적으로도 더 큰 이익을 가져오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의 결과, 어떤 관계에도 상관없이 자신의 모습에 일관성을 유지하며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삶의 만족도를 높이는 중요한 기제로 작용한단다.


반면, 한국에서는 사회적으로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아무런 이점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결과에 개인적 경험을 더해보자면, 한국의 경우 [친구들 사이에서의 나 ]와 [회사에서의 나], [부모님 앞에서의 나]가 각각 다른 모습인 경우가 더 삶에 유리하다는 느낌이 든다. 가정에서는 아이와 남편을 너무나 신경 쓰는 아내이자 엄마지만, 직장에서는 가정에 신경 쓰지 않고 일에 매진하는 사람이어야 더 인정받는 분위기이고, 친정에서의 나의 모습과 시댁에서의 나의 모습은 같기 쉽지 않다. (다들 말 안 해도 아시죠?ㅎㅎ)


흥미로운 포인트는, 바로 이런 차이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도 차이를 만들어 낸다는 데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문서화된 실험 결과를 보니 더 쇼킹했다.

미국에서는
부모와 친구 그룹이 동일한 사람을 두고
그의 특성에 대해서 똑같이 보는 경우가 한국보다 두 배 더 높았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한국에서는 동일한 개인을 친구와 부모가 더 다르게 경험한다는 것 나타낸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인싸라는 아이가 집에서는 한마디도 안 하거나, 집에서는 조용하고 순종적인 아이가 밖에서 마주하는 사회관계에서는 폭군 같은 기질을 발휘하는 경우와 같이 극단적으로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으리라. 그래서 한국에서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은 그다지 새로운 일은 아니다.

우리 애가 집에서는 안 그런데…
학교만 가면 이러저러해요.
얘가 밖에서는 그런다고요?
어머.. 그럴 애가 아닌데…


세계 어느 곳에서나 "우리 애가 그런 애가 아닌데"는 국룰인 줄 알았더니 아니라는 사실. 놀랍지 않은가.


한국이 특히 심하다는 점을 찬찬히 생각해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문화적 & 언어적 배경이 있지만 새삼 놀라운 결과였다. 여러 가지의 얼굴들을 가지고 살며 대상과 시간과 장소에 맞게 넣고 빼는 기술이 사회적으로만 활성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자식의 관계에도 그러했다니.


그런데, 가만히 이 실험을 들여다보다 든 생각이 있었다.


이런 문제들이 꼭 '국경을 건너' 살고 있는
or
살았던 사람들만 느끼는 문제이기만 할까?


꼭 미국과 한국 사이에만 관찰되는
문화의 차이인 것일까?


이런 의문이 생긴 이유는, [언제 어디서나 “나”로 존재하며 존중받고 싶다]란 이야기가 생소하지 않게 들렸기 때문이다. 최근 이런 욕구를 표출하는 MZ세대들이 너무 많지 않은가? 여러 가지 가면을 번갈아 쓰는 삶이 아니라, 원래 있는 그대로의 나의 욕구에 충실하며 누구에게나 같은 얼굴로 사는 삶을 원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있다는 것은 “대퇴사시대”를 포함한 요즘의 여러 사회 현상들로 충분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이 담론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그러니 어쩌면 지금의 한국은, 인종적으로 '서양'만 아닐 뿐, [교육받은, 산업화된, 부유한, 민주적인] 이 네 가지 요소를 충족하며 서구인들이 삶의 만족가 높다고생각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라는 추측을 조심스럽게 해 본다.


이 측면으로 보자면, 구 세대들이 '한국적'인 정서를 살아가고 있는 와중에 '신세대'들은 WEIRD(서양, 교육받은, 산업화된, 부유한, 민주적인)로 축약되는 서구의 가치관을 더 실질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더욱 격하게 심화되는 세대차이도 납득이 되는

부분.


그래서 이 경험과 고민은.

미국에서 아이를 키운 엄마의 이야기라기보다는...

현실의 한국을 살고 있는 애매한 MZ의 고민일 수도 있겠다 싶다.

(사전적 정의로 1980년-2010년이 MZ세대라지만, 한국에서는 이걸 다시 10년씩으로 쪼개야 설명이 가능할 듯하다. 이 30년 구간 중 세계적으로 논의되는 MZ세대는... 1990년~2000년 초반 생인 느낌쓰. 그러니 나는 애매하게 MZ 되고 싶은 MZ랄까 ㅎㅎ#갑뿐나이오픈… )


애매한 MZ 부모로,

알파세대 어린이를 키우며.

누구에게나 같은 얼굴을 내보이는 것이 완전히 편치않은 나지만. 동시에, 있는 그대로의 나를 온전히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삶의 만족도를 높이고 행복해지는 길인지, 어쩌다 마주하게 된 해외살이로 뒤늦게 알게 된 나라서 이미 알게 된 그 길에 아이와 함께 걷고 싶다. 뉴욕에서 자아가 자라는 동안 물처럼 투명하게 감정을 내비치는 모양으로 자란 어린이가, 이를 꺼내 놓을 때 좀 다듬는 방법을 배워가더라도 감정 자체를 가리지 않는 어른으로 자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미 언어 자체에 높낮이가 있고, 생활속에 갖가지 어른의 지시가 가득한 한국어를 통해 아이와 이야기할 때는 특히 더 주의를 기울여본다.


굳이 내가 힘을 싣지 않아도 고압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표현이 존재하니, 말을 다듬어보자 다짐한 뒤 입 밖에 내놓으려 노력해 본다. (여기에 이렇게 쓰는 이유도 어쩌면, 다짐에 다짐을 해도 쉽지 않은 일이기에 이리 해두면 더 어쩔 수 없이 노력하겠다는!!! 다짐이다. ) 아이의 말을, 행동을, 표면적으로 보이는 대로 내리는 판단을 미루고, 아이가 전하는 말의 기저에 깔린 생각의 배경을 이해하려 노력하며 아이와 같은 마음의 공간에 발을 붙이려 애써본다.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은.

이 작은 아이의 행복,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니까:)

스스로 행복하다 조금이라도 더 느낄 수 있는 방향으로 함께 걸어갈 수 있도록 말이다.





*알파세대(Generation Alpha)는 세계적인 기준으로 2011년부터 2025년까지 태어난 세대를 말한다. 영미권에서는 2010년~2011년생[1]부터 2025년생까지를 알파세대로 구분하고 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2013년생 이후의 세대를 알파세대로 일컫는다.

by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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