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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모삼천지교 Dec 27. 2023

한 뼘 나아간 아이, 두 뼘 달려버린 우리.

눈물의 크리스마스

산타를 믿던 아이가

크리스마스 한 달여 즈음 전에 이런 말을 했다.


"엄마. 아빠. 산타... 진짜로는 엄마랑 아빠지?"


너무 갑작스러운 일격에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갈 곳 잃은 눈빛을 서로 교환하던 나와 남편은, 이 참에 진실을 이야기해주어야 하나.. 라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단, 다른 질문을 좀 던지며 시간을 끌기로 했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내가 작년에, 사실 진짜로 원하는 선물은 마음속으로만 엄청 이야기하고 엄마아빠한테는 말 안 했었거든. “

‘………..?????!!!!!!!!’


‘근데, 엄마&아빠한테 말한 선물이

산타한테 왔었어. 그 뒤 계속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아무리 고민해 보아도.. 산타 없는 것 같아.

Tooth Fairy(이빨요정)처럼, 엄마&아빠가 산타인 척한 거지??"


아....
때가 왔는가.




사실 엄마아빠 산타 작전의 첫 위기는,

아이가 1학년 겨울에 한번 닥쳤었다.

당시, 코로나로 인해서 온라인 수업 중인 반 친구들 중에는 4~5학년인 언니, 오빠를 둔 친구들도 있었는데, 언제나 그렇듯.. 좀 더 나이가 많은 형제들을 통해서 최신 트렌드를 더 많이 접하는 이 친구들은 늘 같은 반 아이들의 선망이 되는 물건이나 정보를 가져오고는 했다.

그날은 크리스마스 전, 수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는데, 마침 선생님이 "산타"에 대해서 가장 크게 떠오르는 기억을 이야기해 보라고 한 것이 시작이었다.


앞서 나가는 아이들 중 하나였던 브리트니가,

"너희들 그거 알아?

사실 산타 할아버지 없어.

엘프도 가짜야!"라는 엄청난 발언을 해버린 것.


온라인 수업이라, 화면에 집중하고 있는 아이 곁에서 나도 내 일을 하며 앉아 있어 화면 속 아이들의 황당한 표정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 일하고 있던 남편 역시, 소리를 내지는 못하고 입모양 만으로 "누가 저런 (용감한) 소리를?"이라며 눈이 동그래졌다.


그때만 해도, 매번 땡스 기빙 다음날부터 산타에게 아이들의 행실을 전하는 요정이라는 엘프를, 매일 아침 아이가 일어나기 전에 요리조리 바꾸어 진열하며 크리스마스를 둘러싼 아이의 환상을 한껏 지켜주려 애를 쓰던 시기였는데. 아뿔싸.


핵폭탄급의 진실 폭로에,

이를 어쩌나 싶어 사색이 되었는데.

부모들보다 더 화가 난 것은 같은 반의 아이들이었다.

폭로된 진실에 갸웃하지 않을까 했는데 웬걸.

산타할아버지를 지키고 있는 것은.
어른들의 동심을 지키기 위한 거짓말이 아니라,
아이들의 믿음이었다.


"아니야!!"

"너 거짓말쟁이야!! 산타 할아버지 있어!!"

"너 그렇게 이야기하면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안 주신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아이부터,

눈물이 그렁해서 그럴 리 없다고 말하는 아이까지..


순식간에 아우성이 되어버린 수업시간이 선생님에 의해 진정되기까지, 아이들은 그렇게 한참을 산타는 존재한다며, 산타 할아버지는 있다고 외쳤다. ( 아. 물론.. 그중 가장 목청 큰 아이는 우리 집 아이였다. 헛헛)


‘기껏 진실을 알려주었더니, 시시한 것들..’이라 말하는

것 같은 얼굴을 했던 브리트니도 할 수 없이 다시 입을 다물었고, 크리스마스의 환상이 아직은 유효하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린 그런 12월의 아침이었다.




그리고 다행히 몇 해가 순조롭게 지나갔다.

날로 진화하는 기술은 산타의 위치를 추적한다는 가상의 앱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이제 산타 합성사진 정도는 눈감고도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선물사진 찍고 어플에 올려서 합성사진 만들기...덕에 감쪽같이 속이기가 더 가능했죠 ㅎㅎ

그렇게 계속 우리는

이 “산타놀이”를 계속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영화 속에서 보던 흰 수염의 외쿡인 산타할아버지를 현실에서는 보기 쉽지 않은 한국에서는, 진실의 문을 일찍 연 친구들이 주변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그만큼 뭔가 이상하다 생각한 아이의 갸웃함도 늘어갔다.


결국 우리도 모르게 진행된 아이의 셀프 테스팅에 진실을 고백한 우리는, 기왕 이리된 것 이 참에 아이에게 선물도 합리적으로 해보자는 제안을 건넸다.


최근, 일본에서 수입한 제품으로만 구매가 가능한 미니어처 장난감에 빠져있는 아이였다. 그래서 가지고 싶다는 선물이 온통 이 미니어처였기에 크리스마스 선물 아이템 선정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환율도 이해를 하고, '돈'이라는 것의 가치를 꽤 정확히 인지하는 나이가 되었다 싶어서 [한국에 수입되는 품목도 적고, 가격은 일본 현지의 1.5배가 넘는 이 제품을 한국에서 사는 것 ] 보다 내년 봄 정도로 계획 중인 [동경 여행에서 직접 가서 보고 더 다양한 종류 중에서 고르면 ]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건넸다. 여기서 정해진 것들 중에서 2개 사는 것보다 현지에서 직접 보고 고르며 3개 사는 것이 어떤지 묻는 우리의 말에 요리조리 고민하던 아이는 흔쾌히 “그래! 나 일본에 가서 살래!”를 외쳤는데.



크리스마스이브 날.

감기기운이 있던 내가 쉬는 사이, 가족들과의 저녁 식사를 위해 아빠랑 장도 보고 그동안 몇 번 졸랐지만

못 샀던 강아지 장난감도 하나 사서 신나서 집에 온 아이. 곧이어 온 친척들과 함께 모여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며 쿠키도 굽고, 케이크도 굽고 신나고 떠들썩한 저녁을 보냈다.


이때까지만 해도 마냥 즐거웠는데.

아빠와 사촌들과 함께 만든 케이크

모두 떠나고, 주방 정리를 하고 있는 내 등 뒤에서 훌쩍거림이 들렸다.


“엄마. 너무.. 기분이 허전해.”


눈에 찰랑찰랑 눈물을 담고 이야기하는 아이의 마음은.

산타가 없다는 것도 알겠고… 가지고 싶은 물건도 좀 기다렸다가 나중에 받는 게 더 나은 선택인 것도 알겠는데. 너무 잘 알겠는 머릿속의 이성과 달리.


두근거리며 선물과 산타를 기다리고,

산타에게 줄 쿠키를 구우며

두 근 반 세 근 반 하는 기분 좋은 떨림이 사라진

크리스마스이브가 너무나 허전하고

슬프다는 것이었다.


그 두 가지 마음이 너무 이해가 가서. 아이를 꼭 안아주었지만 한번 가라앉은 기분은 쉽사리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허전한 마음을 채우려 크리스마스 영화를 하나 보다가 잠든 아이.


그리고 크리스마스 날 아침.

지난해만 해도 새벽에 몇 번이나 산타를 보겠다며 밤중에 일어나기도 하고, 아주 이른 새벽에 일어나 선물을 뜯고는 온종일 눈 아래 다크서클을 달고 피곤하지만 행복했던 아이는.

기대할 것이 없는 아침, 기다리는 산타할아버지가 없는 아침이어서 아주 늦게까지 잠을 잤다.


이런 아이를 지켜보며, 너무 빠르게 동화 속으로부터 현실로 날아온 우리의 선택을 후회했다.

산타가 사실은 엄마, 아빠라는 사실은 알려 주더라도 기대 못한 선물을 받는 크리스마스 아침은 지켜주었어야 했네...라는 이야기를 남편과 나누며 말이다.


아이가 잘 자라서 어른의 세계로

한 걸음 들어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하지만, 이 성장이 반가운 나머지

이제 막 발을 뗀 아이를 너무 세게 끌어당긴 우리였다.

그리고 그 맞지 않는 속도는

아이에게는 슬픔을, 우리에게는 아쉬움과 후회를 남겼다.


앞으로 자라는 동안 또 이런 일들이 있지 않을까?


아니, 분명 많을 것 같다.


아이가 눈을 뜨는 세상의 진실, 알아야 하는 마냥 반갑지만은 않을 이야기들을 가장 먼저 알려주어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 부모일 텐데.

아이의 눈높이와 마음의 성장에 맞추어 그 수위를 조절하지 않으면 이번처럼 작은 눈에 눈물이 가득한 것을 보아야 할 경우도 생길 테고, 또 너무 과한 필터링이나 시기가 늦어진다면... 또래 사이에서 소외되는 경우는 물론, 엉뚱한 곳에서 정보를 찾게 되는 경우도 생기지 않을까. 그럼 또 다른 이유로 후회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번에는 산타였지만.
다음 질문은 또 무엇일까.
우리가 답해야 하는 진실은 무엇일까.

성에 관한 질문일 수도, 어른들이 만들어 둔 세상에 대한 질문일 수도 있겠지.

때로는 답하고 싶지 않은 진실일 때도 있으리라.


먹고 입히고 재우는 것만 해도 즐겁던 시절이

하나씩 사라지고

다가올 질문들과 그 사이에 잡아야 하는 중심을

고민해야 하는 시기로 접어들고 있음을 느끼며,


부디 아이도, 부모인 우리도 처음인 이 과정에

늘 현명한 부모로 존재할 수 있기를.

그럴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있다면

산타할아버지에게 선물로 달라고 하고 싶었던….

그런 크리스마스가 지나갔다.





제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께.


연말을 맞이하여, 소심하게 몇 줄 남겨보려 합니다.


글을 처음 쓰기 시작한 것은 2018년이었는데, 그 사이 예정에 없이 대륙을 건너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고.... 또 여기서 제게 맞는 삶을 찾으러 여러 번의 변화를 거듭한 끝에 이렇게 다시 노트북 앞에서 톡톡 거리기 시작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흘러버렸네요.

그 사이에도 뜨문뜨문 옛 글을 읽고 반응해 주시고, 구독 취소 안 하시고 때마다 올리는 글에 공감해 주시는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지요.

남은 2023년의 많지 않은 날들도, 일상 속의 소소한 행복을 자주자주 느끼시며 마무리하실 수 있기를 바라고

새로 오는 2024년에는 어제보다 조금 더 사랑이 가득한 매일로 채워나가시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전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이럴 때는 그냥 저 위에 있는 누구에게나 기도하게 되네요. ㅎㅎ)


모두. 주변의 잔잔한 행복에

조금 더 기쁜 날들이기를. 바래봅니다:)

Happy New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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