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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라도 삼월에 오는 눈은 오면서 물이 되는 눈이다

나태주 '3월에 오는 눈'

by 맨모삼천지교 Mar 1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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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비랑은 연락하고 지내지? 그래도 아비인데, 자주 전화 해 보아라."

"네, 할아버지. 그럼요."

이틀에 한 번씩, 어떤 때는 하루에도 여러 번 걸려오는 할아버지 전화의 시작도, 끝도 늘 같은 말이 흐른다. 이미 죽은 자식의 안부를 알지 못하는 아비는, 손녀에게 이렇게 자꾸 묻는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나서 무거워지는 가슴도 이젠 적응이 될 법 한데, 한 번씩 이렇게 마냥 그리움이 담긴 할아버지의 전화속 목소리에 서인의 눈이 묵직해졌다.


퇴근 길에 들린 강남역 한복판의 서점은,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2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각종 시험을 준비하는 학원과 학생들이 들끓는 공간답게, 대부분의 책들이 시험 준비 교재들이었다. 한 눈에도 시선을 끄는 빨강, 파랑의 큰 글씨들이 던지는 피로함을 피해, 서인은 일부러 에세이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떤 책을 데리고 집으로 갈까 싶어 베스트셀러 서가에 있는 책을 하나 집어 두어 앞쪽을 좀 읽어보는데, 영 마음에 차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읽는 이야기가 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는 모두의 탓일까, 자신의 탓일까 생각하며 이미 나온 지 좀 된 책들을 모아놓은 곳으로 발을 옮겼다. 한번 사람들의 마음을 타고 넘어 오래오래 서점에 머문 책들에는 특유의 안전함이 있다. 잠깐 스쳐가는 유행이 아니라, 오래 머금어도 되는 생각들이라 가지게 된 무게. 그런 책들을 하나하나 만지며 책이 가진 물성의 즐거움을 손끝으로 느끼는 서점에서 서인의 마음이 쉬어간다.


서인이 기억하는 첫 책은, 엄마 아빠의 손에 들려온 동화책 전집이었다. 왜 할머니랑 놀고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할머니가 구워주시는 떡을 먹으며 햇살을 튕겨내는 반질반질하게 윤이나는 툇마루를 신기하게 보았던 순간을 기억한다. 여름날이었는지, 디딤돌에 신발을 벗어두고 거실에서 놀다가 그대로 거실에서 선잠이 들었는데 잠결에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와 낮게 깔리는 아빠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서인아, 일어나 봐. 엄마 아빠가 선물 사 왔어!"

진득한 한 여름의 낮잠을 떨쳐내고 눈을 떠보니, 책들이 한 무더기 쌓여있었다. 글을 읽을 나이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온 동화책 더미는, 페이지마다 담긴 삽화들로 서인을 유혹했다. 그림 속에 담긴 이야기가 궁금해 수십 번도 넘게 같은 페이지를 반복해서 읽어달라던 서인은 그렇게 어느 날 배운 적도 없는 한글을 떼었다.


나가서 뛰어노는 것을 좋아하던 두 남동생들과 달리, 책 두어 권만 있으면 집 밖으로 나갈 줄 모르던 서인에게 가장 큰 즐거움은 가끔 아빠가 어디선가 얻어오는 종류를 가리지 않는 다양한 책 꾸러미였다. 병원에 있는 친구를 만나는 날에는 병원에 비치하는 고급 패션지들이, 기자인 친구를 만나는 날이면 평론지들이, 어쩌다 헌책방을 가는 날이면 한자가 가득한 책들을 박스로 하나 가득 들고 퇴근하던 아빠. 그런 아빠의 손을 가장 반기던 것이 서인이었다. 밤이 새는 줄 모르고 아빠가 가져온 책더미를 헤치며 열린 틈으로 서인이 자랐고 서인의 세상이 자랐다. 잡지 속 가득한 배우들과 감독들의 이름을 외우며 어느 날은 영화 평론가를, 또 어떤 날은 패션 디자이너를, 그리고 또 어떤 날은 한자를 더듬거리며 시인을 꿈꾸며 자란 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아빠를 아주 많이 닮으며 자라났다. 종류를 가리지 않는 책더미 사이를 헤치고 읽고 또 읽으며 하루를 보낸 날이면, 어딘가 뿌듯한 마음에 잠이 들고는 하던 서인이 아비를 따라 글밥을 먹고사는 일을 직업으로 택하겠다 한 것도 너무 자연스러운 필연이리라. 다섯 식구 지내기도 빠듯한 집이었지만 공간을 고려하지 못하고 사들이는 책들이 책장을 덮고, 집안 곳곳에 탑을 이루었고 그 책무더기를 요리조리 피하며 아이들이 자랐다.


책상 앞에서 공부는 언감생심, 어린 동생들을 돌보아야 했던, 졸업하자마자 돈을 벌어야 했던...그래서 부모의 도움은 커녕 공부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말을 밤낮으로 듣던 한을 책으로 덮어야 했다는 아비.그런 아비의 꿈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도 사그라들 줄을 몰랐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야학으로 이어간 공부에 코가 빠지는 줄도, 가세가 기우는 줄도 모르고 그저 묵묵히 책상을 지키던 아빠를 두고, 엄마는 세상살이 모르는 바보라 했다. 세상 사는 데는 도통 융통성이라고는 없이 책이나 파고 있는 아빠 때문에 온 가족이 이리 곤궁하다 탓했다. 제때 피지 못한 꿈은, 키워야 할 다음 세대의 꿈을 대신 잡아먹고서 핀다했다. 그렇게라도 한번은 꿈꿔보고 싶었던 아빠의 간절함을 엄마는 이해할 수 없어했다.


문제집들 사이를 가로질러 먼지가 좀 앉은 서가의 가장 아랫칸을 들여다보던 서인의 눈에, 기후변화에 대한 책이 들어왔다. 우주에서 내려다본 지구의 구름 사진을 표지로 삼은 책을 보고 있노라니, 정말 맥락 없이 아빠의 서가에 꽂혀있던 "세계의 기후"라는 사진첩이 떠올랐다. 두껍고 단단한 표지에 전체 페이지가 선명하게 올컬러로 인쇄된, 여러 나라의 인상적인 날씨들을 담은 그 책. 아빠도 사두고 까먹은 것인지, 아니면 어디서 얻어온 것인데 아까워 버리지 않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책장 가장 아래쪽에 꽂힌 채 잊혀가고 있었다. 그러다 열어보기 시작한 서인 덕분에 책 위의 먼지가 옅어졌었다. 아마 아빠도 몰랐을 것이다. 비행기 한 번을 못 태워준 딸이 그 책으로 세계 여행을 하고 있는 줄은. 여행 뿐이었을까. 테니스도 글로, 볼링도 글로, 배드민턴도 글로 배우던 아빠였다. 집에 굴러다니는 운동 관련 책으로만 본다면 이미 올림픽 선수의 코치정도는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싶던 아빠를 따라 뭐라도 새로운 운동을 시작할 때면 관련된 책을 먼저 주문하고 있는 자신을 볼 때면. 어쩜 이리도 닮는가 싶어 웃음이 갑자기 터지고는 하던 서인이 있을 줄 모르셨으리라.


-지잉. 지잉. 지잉.

화면에 '할아버지'라는 이름이 뜨는 것을 보며 들춰보던 책을 내려두고 전화기를 들었다.


"서인이냐. 밥은 먹었지."

"네, 할아버지, 먹었죠."

"궁금해서 전화했다."

"하하, 아까도 전화하셨었어요 할아버지."

"그랬냐. 내가 요즘 정신이 까무룩 하다. 에미도 잘 지내지?"

"네, 엄마 잘 지내시죠. 추석에 뵈러 갈게요 할아버지."


자식의 배우지 못한 한이 녹지 못한 눈처럼 응어리져 암이 되는 줄도 몰랐던 할아버지는, 자식을 보낸 후에도 보내지 못하고 공부하러 멀리 떠나 연락이 없다고 믿으며 아들을 그리워하고 그리워하시며 그 아들을 쏙 빼닮은 서인에게 안부를 물으신다.


"그래, 아범은 연락 되니? 공부가 그리 바쁘다니"

"아빠도.... 잘 지내신대요. 할아버지. 지금이라도 못한 공부 엄청해서 행복하대요 할아버지"

"그래. 그럼 되었다. 니들이 다 잘 지내는 게 내 바람이여.내가 그걸 그리 하지 못하게 해서 벌 받았지... "

"... 할아버지?"

"그걸 못하게 한게 그리 한이 될 줄은 몰랐다."

"..할아버지.."

"학교 보내달라는걸, 그렇게 때렸데이. 애비가 아픈데 무신 학교냐고. 내가 그렇게 때렸어."

"......."

"그래서 벌 받았지. 벌받았어. 그 맴에 내가 상처를 너무 줬시야..."

"..... 할아버지..아빠... 괜찮대요."

"그렇다니."

"네."

"... 그래. 그럼 되었다. 되었어."

"곧... 뵈러 갈게요. 쉬셔요."


언젠가. 책상에 앉아서 열심히 무언가를 또 읽고 있는 아빠에게 어린 서인이 물은 적 있었다.

"아빠. 아빠는 책이 재미있어? 이 책은 뭐가 재미있어?"

"음.. 지금 이 책은 재미는 없어."

"근데 왜 읽어?"

"그냥 이걸 이렇게 읽고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좋아서 자꾸 읽게 되네. 아빠가 어릴 때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동생들 돌보고, 나무도 해오고, 과일도 따야해서 이렇게 앉아서 볼 수 있는 시간이 없었거든. 그래서 그저 이렇게 앉아서 책만 보는 이런 시간이. 너무 좋네 아빠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서인의 머리를 쓰다듬던 아빠를 따라 서인도 그저 따라 웃었었다.


할아버지는 곧 또 전화를 걸어 아빠의 안부를 물을 것이다. 현실을 깨달았던 순간도 이내 잊히고, 다시 그리움 속에서 아들을 찾으시겠지. 하지만 서인은 알려드리고 싶었다.

늦은 3월에 내린 눈처럼, 아빠의 한(恨)은 이미 서인의 삶 속에서 녹아 물이 되었다고. 책이 되어, 길이 되어, 서인의 삶을 키웠다고.

그러니 이제 그만 미안해하시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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