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이 줄어드는 시간, 무엇을 할까...
최근 의료계의 가장 큰 화두는 단연 AI의 도입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현장에서도 조만간 AI 시스템이 차팅업무를 보조할 것이라는 소식이 들렸다.
이 변화를 마주한 동료들의 반응은 팽팽하게 갈렸다. 누군가는 기계가 사람의 자리를 대체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드러냈고, 다른 누군가는 고질적인 서류 작업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기대를 내비쳤다.
나는 후자다. 단순히 업무가 편해지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 간호사에게 요구되는 역량의 본질이 완전히 바뀔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문서 노동'에서 '임상'으로
이미 글로벌 의료 시장에서는 음성 기반 AI 차팅 시스템이 빠르게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기술 도입의 배경은 명확하다. 실제 사용 보고서에 따르면, AI 도입 후 의료진의 문서 작성 시간은 평균 50% 이상 감소했으며, 환자 1인당 약 7분 정도의 시간을 절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의학 협회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의료진의 약 70%가 이 시스템 사용 후 '업무 스트레스와 피로도가 줄었다'고 답했다. 즉, AI 도입의 핵심은 인력 감축이 아니라, 문서 노동을 줄여 임상 집중도를 높이는 데 있다.
줄어드는 기록시간에 집중할 것
문서 작성 시간이 줄어든다면 그 시간은 다른 곳에 쓰일 수 있다. 환자 교육, 투약 설명, 상담, 그리고 잠재적 위험 요인의 재확인. 의료의 질은 기록 속 문장의 길이가 아니라, 환자가 자신의 상태를 얼마나 이해했는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특히 외국인 간호사로서 영문법과 격식에 신경 쓰느라 소모했던 에너지를 이제는 환자에게 필요한 정보를 전달하는 데 쓸 수 있다. 문장을 매끄럽게 만드는 것은 AI의 몫이지만, 그 너머에 있는 환자의 반응을 살피고 적절한 간호 중재를 결정하는 것은 간호사의 몫이다.
기록대신, 전문성
AI가 문장을 매끄럽게 만들어준다고 해서, 그 내용이 내 지식이 되는 건 아니다. AI 덕분에 문서 작성 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어드는 만큼, 이제는 그 빈 시간을 무엇으로 채울지가 중요해졌다.
그래서 나는 면역학을 깊게 공부하기로 했다. 단순히 접종 스케줄을 외워 전달하는 수준을 넘어, 왜 이 간격이 필요한지 그 원리부터 명확히 설명할 수 있는 전문가가 되고 싶어서다. 더불어 환자와 눈맞추고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더 많이 소통해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간호의 본질을 완성해 나갈 것이다.
새로운 변화 앞에서 두려움을 택할지, 활용을 택할지는 개인의 선택이다. 기록에 뺏기던 시간을 환자의 이해를 돕고 돌봄의 질을 높이는 데 쓸 수 있다면, 병원은 더 안전한 곳이 될 것이다.
AI도입은 업무를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환자를 돌볼 시간을 돌려받는 것이다. 그리고 돌려받은 귀한 시간을 어떻게 가치 있게 쓸지는 결국 우리의 몫이다. 나는 그 시간을 환자에게, 그리고 나만의 깊이를 만드는 데 기꺼이 투자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