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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ga and story
Aug 24. 2020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치졸하고 뒤틀린, 세속적이고 계산적인 마음을, 내가 품는 것이 그리도 부끄럽고 자존심이 상했다. 빈도는 ‘잎새에 이는 바람’만큼 잦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그러한 마음을 품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으니 말이다.
남들이 종종 착각하곤 하는 나에 대한 묘사, ‘투명한 풍선’ 같은 사람이었다면 누군가의 달콤한 말에 숨긴 속내를 눈치 채지 못하고 놀아났을 것이다.
그렇게 순진해 빠졌다면 훗날 배신감에 치를 떨 일은 없었을 수도.
다만, 기대와 현실 사이의 괴리를 좁히려 얼마나 많은 타협과 합리화를 했을 것인가! 적당히 약아서 다행이었다.
더 많이 약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의 달콤한 말과 눈빛에 녹아버릴까 걱정이 된다. 결코 술을 마셔도 안 된다.
그는 능구렁이다. 나에게 궁금한 것이 많다고, 시간을 내어달라고, 함께 밤길을 걷자고 하던 그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여자친구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나는 그에게 사이드 메뉴는커녕 기억도 가물가물한 소스쯤으로 취급될지 모른다.
“이 맛에 여기서 일한다. 자연 풍경 좋다~”
“그러게. 초등학생들 소풍 왔나 봐. 어릴 땐 식은 도시락 먹기 싫어서 소풍 가는 거 썩 안 좋아했던 것 같은데. 지금 보니 소풍 참 부럽네.”
동료와 점심을 먹으러 나와 마주한 풍경이 그에 대한 생각을 잠시 접게 했다.
복잡한 실타래를 얹고 사는 지금. 왜 학생 때는 즐기지 못했을까. 그때 더 과감하게 자유를 펼쳤을 수도 있었을 텐데.
주변의 눈치, 당장 1년 뒤의 밥벌이, 그리고 상도덕, 자존심... 가진 것도 얼마 없지만 지킬 것이 참 많다.
어렸을 적 잃을 게 별로 없던 시절 더 자유를 펼쳤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념에 잠길 뻔하던 사이, 낯익은 것이 시야에 잡혔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대기시간이 참 많았다.
두 줄로 서서 강당에서 교장 선생님 말씀을 기다리던, 체육 시간 선생님을 기다리던, 점심시간 밥줄을 기다리던.
그리고 밀려나 있는 아이. 그 지루한 시간을 때우려 모두가 수다를 떨고 있을 때 두 발로 선 채 온몸으로 그 기다림을 견뎌내는 아이.
그 모습이 10년이 지난, 내가 다니지 않는, 이곳에 소풍 온 학교에도 여전히 존재했다.
그리고 저기 돗자리를 깔고 삼삼오오 모여 도시락을 먹는 무리와 동떨어져, 홀로 앉아있는 아이가 보였다.
그래. 역시나 잔인했다.
어른 세계뿐 아니라 저 어린아이들의 세계도.
기억이 났다.
현재를 즐기지 못하고 돌덩이 하나 안고 사는 지금처럼. 울타리 안 학창 시절에도 하루하루를 즐기며 살지 못했던 이유를.
단지 찬 도시락 먹기 싫어 소풍을 즐기지 못했던 게 아니란 것을.
경계의 언저리쯤에 있었던 것 같다.
너무 혼자이지도 않은, 너무 친구가 많지도 않은. 가해자이지도, 피해자이지도 않은.
적당한 친절을 베풀지만 방관자에 가까운.
너무 모나지도, 너무 튀지도 않는. 균형점을 찾기 위해 그토록 위태로웠던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렇게 살아내 온 삶의 방식이 지금의 고단함을 만들어냈는지도 모른다.
내용은 달라도 방식은 비슷한.
아니 제발 방식이 달라졌기를. 그렇게 아둥바둥 애를 써왔는데 같은 굴레 안이었다면, 앞으로의 삶이 기대가 되지 않을 것이기에.
아, 어쩌면 달라졌다는 근거가 확실히 있다. 여전히 앞을 예측할 수 없으니 말이다. 내 삶의 문양이 달라지지 않았다면 과거에 비추어 앞일을 유추할 수도 있겠지. 하지면 여전히 모르기에.
그때도 결코 해결되지는 않았다. 그 줄타기를 위태롭게 하며 떨어지지 않기만을 바랐고, 시간이 흘러갔을 뿐.
나를 포기하지는 않지만 적당히 나를 미워할 정도의 죄책감, 상대를 미워하지는 않지만 나를 보호할 정도의 적당한 무신경함을 장착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