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가족은 나와 아들뿐이 됐고 죽음의 원인은 명확하지 않다. 나는 그를 살해한 혐의로 지목돼 형사재판에 기소됐다. 사법부 상대로 결백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려면 스스로 우리 가족의 내밀한 부분까지 이야기해야 한다. 그래도 증거물과 검사, 여론은 나를 점점 옥죈다.
남부 3군에서 볼 수 없는 영화다. 보려면 대전이나 김천은 가야 한다. 그래도 이 영화는 소개하고 싶다. 영화는 수업이나 강의의 교육 효과를 더욱 내는 도구로도 많이 쓰인다. 감히 예상하지만, 이 영화는 이런 자료로 많이 쓰일 것이다. 젠더, 부부관계, 국가권력이라는 폭력성, 철학적 주제 등 많은 토의 거리를 담고 있다. 아쉽게도 시골 주민에게 영화 접근권은 더욱 제한돼 있어, 보고 싶은 영화를 보려면 발품을 팔아야 한다. 이 영화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소감을 전하고 싶다.
‘추락의 해부’는 1월 31일 개봉한 프랑스 영화다. 작년 칸 영화제에서 최고상이라 할 수 있는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이 영화의 감독 쥐스틴 트리에는 칸 영화제 역사상 세 번째로 황금종려상을 받은 여성이 됐다. 영화의 큰 줄거리는 집 3층에서 갑자기 남편 ‘사뮈엘’이 추락사하고 아내 ‘산드라’와 아들 ‘다니엘’이 남겨진다. 아내는 남편을 살인한 혐의로 재판에 기소돼, 무고하다는 증거를 찾아내야만 한다. 그리고 변호사와 검사의 치열한 법정 공방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내가 관람한 회차는 특별 상영회였다. 영화가 끝나고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1시간 반가량 영화를 해설했다(생중계는 아니었고 미리 녹화된 영상을 상영했다). 영화관에서 그의 해설을 듣는 건 처음이었고, 내게 그의 해석은 완벽하다고 느껴졌다. 자그마한 의미를 하나라도 더 찾기 위해 어떤 영화든 낱낱이 해부해서 그 결과물을 우리에게 전해주겠다는 느낌이었다.
후반부에 이르러 주인공의 유무죄 여부는 가려진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영화의 핵심은 타살인지 자살인지, 유죄인지 무죄인지가 아니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가족관계의 실체와 구성원 간 신뢰의 변화에 있다. 나도 이동진 평론가의 해석이 가장 그럴듯해 보이지만, 각자의 해석이 분분하고 그것이 중요한 영화이기 때문에 나만의 소감을 남기겠다.
우선 두 시간 반 분량으로 길지만 내내 흥미진진하다. 영화의 절반은 치열한 법정 공방 장면이다. 타살과 자살, 유죄 주장과 무죄 주장, 검사와 변호사의 대립은 패싸움같이 격렬하다. 확실한 증거가 없으므로 한쪽으로 기울 수 없고, 그래서 가치판단만 남는다. 관객은 법정을 가득 채운 참관인이 되어, 이 사건을 심증으로만 판단하게 된다.
부부의 성 역할이 세간과 반전된 것도 흥미롭다. 남편은 교수직과 함께 가사와 아들의 홈스쿨링, 등하교와 집수리를 맡는다. 아내는 통역을 부업으로 하는 전업 소설가로서 직업활동에 집중한다. 둘의 수입 및 경제권은 비슷해 보인다. 이 성 역할을 뒤집어 보면 현실의 맥락과도 끊어지지 않는 묘한 편견과 분위기가 형성된다.
성 역할 측면에서 흥미로운 해석을 소개한다. 혹자는 이 영화를 ‘가부장제의 추락’이라고 평했다. 영화 속 부부의 성 역할을 바꿔 생각하면 영락없이 가부장제의 풍경이라는 의견, 남편이 추락사했던 3층의 삼각형 창문을 바탕으로 영화 속 삼각형 관계(남편-아내-아들 관계에서 남편의 죽음으로 삼각형 관계가 깨지지만, 다른 인물이 남편의 자리를 대체하여 삼각형이 유지되는 것)의 반복,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삼각형의 붕괴와 그 결과물을 여성의 관점에서 해석한 것이다.
진실이 없는 상황에서, 타인의 눈으로 스스로 보아진다는 것
내가 영화를 보고 느꼈던 건 ‘진실의 부재’와 ‘진실처럼 보이는 것의 파편을 다양한 눈 또는 카메라로써, 즉 다양한 시각이 반영된 내용으로 그것을 가치판단 할 수밖에 없는 우리’다. 영화에서 남편이 타살당하거나 자살하는, 친절히 사건의 전모가 설명되는 장면은 없다. 과학수사로도 역부족이다. 미세한 증거도 찾아낼 수 있을 만큼 발전한, 우리가 현실과 매체에서 많이 기대 왔던 것인데도. 진실을 알 수 없지만 사법부는 선고해야 한다.
영화는 묻는다. 이 세상에 진실이 존재하는가. 원초적이면서 답하기 막막한 질문이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가치판단의 산물이었다는 말에 반박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지만, 너무나도 작은 편린만 보면서 각자의 가치판단을 다시 만들어낸다. 우리는 그런 판단들이 모여 현실의 여론이 형성되는 데 참여자이자 목격자다.
영화는 매체와 대중의 관계를 체감하고 생각하도록 한다. 영화의 카메라는 다양한 시선, 시각으로 변주된다. 경찰이 아들을 신문하는 것, 경찰의 현장검증, 변호사와 뉴스 매체의 인터뷰, 산드라의 소설과 재판 내용을 연결 짓는 TV쇼, 개의 시점 쇼트, 그리고 아들의 시점 쇼트 등. 영화의 다양한 관점은 우리가 접하는 셀 수 없이 많은 매체가 형상화된 것이다.
관객은 대중의 자리에 놓인다. 재판 내용을 비롯해 영화 속 모든 장면을 보는 증인이면서도 진실을 알 수 없다. 게다가 뉴스 인터뷰와 TV쇼 등 다양한 매체는 재판 내용마저도 극히 일부만 묘사할 수밖에 없다. 영화 속 매체들만으로 정보를 얻는다면, 대중이 된 관객은 마치 역삼각형처럼 맨 아래에서 극히 양이 적은, 또는 자극적인 것이 돌출된, 각자에게 울퉁불퉁하게 제공되는 정보로 가치판단이 강제된다. 영화 전체의 몽타주는 관객에게 똑같이 제공되지만, 관객의 마음속이 ‘집합되지 않았을 뿐인 여론’이 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제 어찌해야 할까. 영화는 결정적인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어떤 인물에게 말한다. 두 가지 선택지 중 선뜻 하나를 선택하기 어렵고, 선택할 근거가 서로 팽팽하게 맞선 정황뿐이라면 한쪽을 선택하기로 믿는 것이다. 이 순간만큼은 이동진의 말을 빌려야겠다. 그는 이 장면에서 스콜라 철학의 창시자 안셀무스의 철학을 언급한다. ‘믿기 위해 이해하는 것이 아닌,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라고 말했다. 알기 위해 이해하는 것이다.
'추락'과 해부', 그리고 '이해하기 위해 믿기'는 하나의 순서다
‘추락’과 ‘해부’는 하나의 순서다. 추락은 남편의 추락과 가족관계의 추락을 의미한다. 추락은 같은 뜻의 영어 ‘Fall’의 다른 뜻인 몰락을 의미하며, 영화의 운동 방향으로서 하강으로 표현된다. 그다음 단계는 해부가 진행된다. 진실에 가까워지려는 발버둥이다. 해부 역시 남편 몸의 해부와 재판 과정을 통한 가족관계의 해부 등 여러 의미를 갖는다. 해부로서 수치스러워 감추고 싶었던 것들마저 낱낱이 파헤쳐지고, 그 결과물이 타인의 눈으로 보아진다.
해부의 다음 단계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 것이다. 믿기 위해 이해한다고 가정하면, 이성적 판단이 감성보다 앞선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가치판단뿐이기에 이성적 판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 사회에서 사법체계는 비교적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그 체계의 결론을 확인하기 전에 미리 판단해 버리곤 한다.
이성적 판단을 토대로 한 가치판단의 결과를 보라. 재판 결과 전 매체들의 모습으로 산드라를 보면 검사의 주장처럼 도덕적인 잘못, 성 역할과 양성애 등 삐딱한 시각으로 보아지는 것, 소설 내용과 재판 내용의 유사성. 돌출되어 보이는 것에 대한 의심과 혐오를 불러온다.
이는 사회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의 폭력성을 드러낸다. 형사재판에서 검사의 역할, 그리고 미디어의 역할이 그렇다. 이들은 그래야 하고 그럴 수밖에 없다. 또한 절차적 정당성도 충만하다고 볼 수 있다. 검사의 행정 집행은 법제에 근거하며, 다양한 미디어는 억누를 수 없는 표현의 자유에 근거하고 있다. 영화는 이들의 표적이 된 한 사람이 견뎌내야 하는 숨 막히는 무게감도 어루만지고 있다.
사뮈엘은 산드라가 그를 믿고자 이해했기 때문에 죽었다. 영화에서 가장 감정의 파고가 큰 한 장면. 격한 부부싸움의 녹음본이 재생된다. 사뮈엘은 자기에게 너무 많은 역할이 쏠려 있다며 호소한다. 산드라는 부부관계 속 타협의 산물이며 당신의 선택이라고 냉소적으로 답한다(물론 이것이 사뮈엘의 죽음을 해명해주지는 못한다). 그는 지인들에게 다른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다며 지적당하기도 한다.
절정 단계, '이해하기 위해 믿은' 한 인물이 증언한다. 그리고 사법부는 선고한다. 산드라에게 사뮈엘의 죽음과 형사재판 과정은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는 사고체계로 물들여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타인의 눈으로 자기를 보게 되는 경험, 즉 자기가 갖고 있었던 ‘믿기 위해 이해하는 시선’으로 자기 보기를 체험한다. 그리고 사뮈엘을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결국, 산드라는 사뮈엘을 믿으면서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사뮈엘은 이 세상에 없다. 비극적인 성장 서사는 마무리됐다. 앞으로 산드라는 어떤 신념을 갖고 살아가게 될까.
어쩌면 이성은 객관성보다 온도가 아닐까. 세상을 보는 시선, 세상이 무언가를 보는 시선이 차가운 상태에서 시작한다면, 따뜻해지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릴 테다. 하지만, 산드라의 온도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올라갔다. 너무 늦게 깨달은 자이자 선구자라고도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