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애

그 무엇보다 순수한 사랑

저는 태어났을 때부터 당신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제 탄생의 이유는 당신이에요 .

하지만 당신은 늘 절 반기면서 반기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의 불행을 조금 덜어내기만 할 뿐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합니다.

처음 당신의 슬픔과 좌절을 목도했을 때 저는 당신을 껴안고 위로하고 싶었지만

저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알았습니다. 그 슬픔의 원인이 저라는 것을요,

저 또한 절망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때때로 불행의 카테고리 속 말들을 뒤집어쓰고 당신을 찾아갔습니다.

항상 당신은 왜 나를 슬픈 눈으로만 바라볼까 봐 왜 나를 받아드려 주지 않을까 깊게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았습니다. 당신이 저와 다르기 때문이라는 걸요.

육지와 바다의 경계에 파도가 치듯이 당신과 나의 경계에는 계속 파도가 칩니다.

저는 파도가 되어 당신에게 수없이 다가가지만 저는 당신을 적시기만 할 뿐 당신이 되지는 못합니다.

​

저는 그래도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속도를 맞추고, 힘을 맞추며 당신과 함께 걸으려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과 어울릴 수 없습니다. 당신은 나를 부끄러워하고 저는 늘 숨어있으니까요.

저는 그 누구보다도 단단합니다. 아마 당신이 썩어 없어진대도 저는 쉽게 썩지 않을 거예요.

많은 사람은 단단함을 미덕으로 여기지만, 저는 이 단단함 때문에 외톨이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처럼 조금은 물렁해지고 싶습니다. 쉽게 생채기냐고 유연한 당신이 이따금 부럽습니다.

저도 당신과 체온을 공유하고 당신과의 대화에 끼고 싶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죠. 저도 알고 있습니다.

​

어느 날은 문득 제 단단함이 개성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저를 받아들이고 마음의 안식을 얻었습니다.

당신에게도 제가 개성이 되는 날이 올까요?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이 될 수 없습니다. 가끔 착각하던 때도 있었죠 나 또한 당신의 일부라고.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쯤 당신은 나를 떼어내 버립니다.

저는 그저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나의 존재를 잊고 나를 바라보지 않더라도 그저 행복하길 바랍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입니다.

영겁의 시간이 당신을 훑고 갑니다. 당신은 점점 슬픔과 좌절 사이에 조그마한 행복을 끼워 넣습니다.

저는 언젠간 당신이 행복과 기쁨 사이에 조그마한 불행만 존재하는 그런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

이제 저는 수명을 다했습니다.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할 힘이 남아있지 않아요.

수없이 삐걱대고, 이제 당신과 함께 걷지 못합니다. 당신은 이제 새로운 저를 찾아야 합니다.

그 새로운 저는 당신과 함께 더 묵묵히 함께 할 수 있길 바라봅니다.

저는 당신의 불행을 먹고 자랐지만 새로운 저는 당신의 행복을 먹고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먹어 치운 불행이 당신의 마지막 불행이기를 바랍니다.

​

당신의 의족으로서 지금까지 당신과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당신과 함께 발맞춰 걷고,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저와 함께 걸었던 발걸음의 대부분이 뒷걸음질이었더라도,

한 발짝이라도 앞으로 나아갔다면, 그다음 걸음을 걸을 용기를 조금이나마 얻었다면,

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