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말수가 적다. 나에게 차례를 넘기기 전까지는 그네들이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할 수 있도록 조용히 있는 편이다. 내가 만약 토크쇼에 패널로 나간다면 한 번도 중간에 말을 자르거나 치고 나가지 못한 채 결국 다음 회차에는 불리지 못하는 비운의 패널이 될 것이다.
나는 말하기를 즐기지 않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말로 먹고 산다. 그래도 걱정은 되지 않았다. 대가를 받고 하는 통역이니 말을 해야지 안 하고 앉아만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전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상대의 언어를 전달하기 때문이며, '내가 말을 해야 하는 차례'라는 것도 무언의 약속처럼 별도로 있기 때문이다.
통역사의 일에도 어느 정도 서비스 적인 측면은 있다. 때문에 말을 청산유수 같이 하는 것 외에도 상대의 의중을 잘 간파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쨌든 화자가 하고픈 말이 무엇인지 잘 캐치를 해줘야 하는 것이다. 종종 그런 생각이 드는데, 드라마를 보고 눈물을 곧잘 흘리는 사람이라면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왜냐하면 상대의 마음에 공감을 잘 하는 성격일 것이기 때문이다. 공감을 잘 하고 분위기 파악을 잘 하면 화자가 아무리 두서없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깔끔한 통역을 해낼 수 있다. 그래서 공감을 잘 하여 툭하면 우는 내 성격도 통역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성정이라는 괴변을 잠시 늘어놓아 본다. (물론 통역하다 울면 안된다. 그럴 뻔한 적이 몇 번 있긴 했는데, 다음 기회에.)
그래서 그간은 내가 말 수가 적은 것이 크게 걱정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아이가 생기니 달라졌다. 혼자 종알종알 태담도 해야하고 애가 말 배울 때가 되면 똑같고 의미없는 단어나 말들을 주구장창 반복하며 아이가 언어에 익숙하도록 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인가는 삼십 몇 개월 된 우리 딸을 데리고 단 둘이 동네 놀이시설에 간 적이 있었는데, 옆에 있는 엄마를 보고 깜짝 놀랐다.
‘사장님~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 한 스쿱 퍼주시고요, 그 위에 초코시럽 이랑 아몬드도 듬뿍 뿌려주세요~ 계산은 카드로 할게요~.’ 라는 말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 엄마가 눈치채지 않게 몇 살짜리 애랑 노는 건가 봤더니 어머나 세상에 우리 딸 또래였다. 아니, 겨우 3살짜리 아가한테 사장님에, 피스타치오에, 스쿱에, 초코시럽 이라고? 애가 그 말을 들으면 이해는 하나? 어떻게 저렇게 혼자 쉴 새없이 떠들 수가 있지? 우리 딸이 요새 자주 하는 말로 ‘충격! 스트레쓰!’ 였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말이 이해가 가던 안 가던, 일단 엄마의 조잘거림을 듣는 아기 입장에선 조용한 것보다 훨씬 자극도 되고 무엇보다 즐겁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한 나를 반성했다. 그 사건이 자극이 되어 딸과 둘이 있을 때면 최대한 말을 많이 하려 노력하게 됐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요새는 일곱살이라고 나름 주거니 받거니가 되어 좋다. 어젯밤에는 내게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한 적이 있는 지 묻길래 요새 통역하다 생긴 일 이야기도 해주었고, 딸 애는 자기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도 얘기해주며 서로의 기분을 나누다 잠이 들었다.
하기사, 통역을 할 때도 쉬는 중간 중간 의뢰인과 조금씩 소통하다보면 관계가 조금은 유해져서 그의 말을 좀 더 이해하게 되고 전달하기도 수월해진다. 언어와 소통이란 것이 내 경우에 벌어 먹게도 해주고 딸과 친밀감도 형성해주니 그만한 도구가 없구나 싶었다. 달변은 못 되어도 따뜻한 마음을 나눌 만큼은 즐기고 좋아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말하기'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