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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별 Aug 30. 2020

BUCHSTABEN MUSEUM,
도시를 기억하는 활자

베를린 : 타이포그래피 뮤지엄



01. 도시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활자. 

베를린의 타이포그래피 뮤지엄인 'BUCHSTABEN MUSEUM (The Museum of Letters)'. 전 세계 최초로 공공시설의 타이포그래피를 역사의 한 부분으로 전시한 의미 있는 뮤지엄이라 베를린 여행 전부터 기대가 컸던 곳이다. 지하철 역사의 사이니지, 호텔의 간판 등 베를린에서 탄생한 활자를 수집하고,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함께 전하며 도시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Bellevue역의 Stadbahn 아치에 자리 잡고 있어 내부에는 지하철이 지나가는 소리가 울리는데, 마치 도시의 내부로 들어온 듯한 매력이 있다. 


커뮤니케이션 디자이너인 Barbara Dechant와 도시 박물관 디렉터 Anja Schulze.


02. 디자이너와 문화 사업 디렉터의 합작. 

타이포 그라피를 기반으로 도시의 역사를 이야기하기에 국립 박물관처럼 느껴지지만, 놀랍게도 민간에서 추진하여 만들어진 사립 박물관이다. 커뮤니케이션 디자이너인 Barbara Dechant와 도시 박물관 디렉터 Anja Schulze가 2005년부터 준비하여, 3년 뒤인 2008년에 공식 개관했다. 


Barbara Dechant는 어렸을 적부터 타이포그래피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고 한다. 그 후 늘 타이포 그라피 박물관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상했는데, 이는 Schulze를 만나며 현실화되었다. Schulze의 꿈은 문화 사업을 실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뮤지엄을 오픈한 지금, 두 사람은 가게 폐업 후 활자물을 기증하는 시민, 전시물을 보며 옛 기억과 감정을 떠올리는 관람객을 통해 큰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데스크마저 멋스러운 웰컴센터. 
전 세계 각지에서 방문한 관람객의 타이포그래피.


03. 관람객의 타이포그래피를 수집하는 웰컴센터. 

입구로 들어서면 보이는 네온사인과 붉은색의 커다란 조형물이 멋스럽다. 전시장으로 향하기 전에 티켓을 구매하고, 아트샵을 구경할 수 있는 곳이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담당자가 내가 이 공간을 보기 위해 서울에서 왔다는 것에 놀라 뮤지엄의 탄생 배경과 역사를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우측에는 전 세계 각지에서 온 관람객들의 타이포그래피를 수집하는 방명록이 있는데 사람에 따라 대문자 A와 소문자 a, 이름, 출생지를 적는 타이포그래피가 달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담당자에 따르면 이 방명록은 향후 전시물로 활용될 예정이라고 한다. 


시간, 아날로그, 빈티지의 느낌을 고스란히 담아낸 아트샵.


04. 뮤지엄의 메시지를 매력적으로 반영한 아트샵.

전시장 입구의 아트샵 제품들이 매력적이다. 실크스크린으로 활자를 찍어 만든 공책, 베를린 각지에서 수집한 조형물, A부터 Z까지 타이포 디자인을 담은 엽서 등 다양한 제품으로 구성되어 '시간, 아날로그, 빈티지' 등의 느낌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전시만큼이나 흥미로운 구성이었다. 사실 예술 기관의 전시 수익은 티켓보다 아트샵 제품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한다. 관람객의 관람 만족도가 높을수록 아트샵의 제품 구매율이 높아지기에 전시의 흥행 지표가 곧 아트샵의 판매 수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나는 이 날, 두 달간의 여행 기간 중 가장 큰 금액을 지출했다. (과연 위의 사진에서 무엇을 구매했을까? 정답은 마지막에 공개!)


베를린의 가구점 Kern의 간판, 1970년 중반에 Sans Serif 폰트로 제작되었다.
독일의 건축회사 Eternit GmbH의 브랜드 로고.


05. 타이포그래피 속 베를린의 이야기

첫 번째 컬렉션 'Möbelhaus Kern'은 1970년대 중반부터 2012년까지 운영된 가구점 Kern의 간판으로 쓰였다. 42년간 베를린의 Barningallee에 위치하며, 세련된 가구로 베를린의 주민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두 번째 컬렉션인 붉은 네온 폰트의 Eternit은 베를린에 지어진 대다수의 상업 건물을 건축한 독일의 건축 회사 Eternit GmbH의 브랜드 로고다. Kern과 Eternit이 베를린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베를리너들은 어떠한 추억을 갖고 있는지를 타이포 그라피를 통해 알 수 있어 재미있었다.  


여러 타입의 폰트로 이루어진 활자의 뒤섞임이 흥미롭다. 노란색의 E가 시선을 모으는 포인트가 된다.
두께와 색이 대비되는 활자를 계단처럼 쌓아 연출했다.
다른 사이즈의 활자로 재미있는 균형감을 만들고, 네온의 세기를 달리해 색감의 대비를 줬다.
전시물 안에 배치한 사이니지. 찾는 재미는 있지만 읽기가 불편하다.
노란색과 파란색 등 색깔별로 구성한 활자 조형물.


06. 멋스러운 전시 연출 구성.  

이곳에서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작품을 전시하는 방식이 아주 멋스럽다는 것이다. 여러 타입의 활자를 한데 뒤섞어 흥미로운 구성을 만들면서도 시선을 모을 수 있도록 포인트를 준다던가, 두께와 색이 대비되는 폰트를 계단처럼 쌓아 연출한다던가 하는 것들이다. 뮤지엄이 가진 '빈티지, 날것'의 느낌을 배가하는 연출 방식이었다.  



07. 활자의 폰트, 제작연도, 위치, 사이즈와 재료.

BUCHSTABEN MUSEUM의 모든 활자 조형물들에는 활자의 폰트와 제작연도, 활자가 있었던 위치, 사이즈와 재료, 그리고 사용 용도가 적힌 사이니지가 함께 배치되어 있다. 사진의 활자 R은 1900년대에(연도미상) 제작되어 베를린 Kaiserdamm에 위치한 한 샵의 사이니지로 쓰였다. 내가 감상하고 있는 이 활자가 어떠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하나씩 읽다 보면 활자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진다. 



06. 아이들을 위한 타이포그래피 놀이. 

뮤지엄, 미술관, 센터 어느 곳이든 훌륭한 예술 기관은 '교육'의 기능을 멋지게 선보인다. BUCHSTABEN MUSEUM은 관람 동선 전체에 아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Kids station을 만들어 아이들이 전시를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직접 따라 그려보고 아이디어를 생각해 보며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을 자연스레 접하고 배울 수 있도록 구성해 두었다. 


BUCHSTABEN MUSEUM에서 구매한 활자 조형물 'e'


07.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가치. 

서울에 돌아온 후에도, 언젠가 내가 예술 기관을 만들게 될 때에도, 이 날 느낀 배움과 감동을 잊고 싶지 않아 전시품인 활자 조형물 하나를 구매했다. '여행 첫 주부터 이렇게 큰 금액을 써도 되는 걸까? 캐리어에는 들어갈까?' 하는 고민이 잠시 있었지만, 금세 사라졌다. 구매를 도와준 직원이 "Are you sure?"이라며 나를 만류할 때쯤엔 그저 얼른 이 작품을 서울로 데려가고 싶다는 마음밖에 남지 않았다. 


BUCHSTABEN MUSEUM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 타이포 그라피를 통해 활자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 담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하는 이들의 진심이 너무나 깊게 와 닿아, 설렘과 흥분으로 가득했던 날이었다. 2019년의 마지막, 내가 한 가장 미친 짓이자 가장 잘한 짓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날이었다. 





[브런치 북 : "도시와 뮤지엄, 60개의 이야기."]

세계 각 도시의 문화 예술 공간은 어떠한 주제로 사람들과 소통하며 도시 문화를 이끌어 가고 있을까요? 전 세계 다양한 예술 공간들이 만들어진 배경과 디자인 그리고 콘텐츠를 통해 매력적인 예술 공간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글쓴이 : 이은별]

100명에서 10만명까지 다양한 규모의 아트 프로젝트를 총괄 기획하고 운영했습니다. 현재 문화예술 기획 회사 curioration을 운영하며, 기업과 예술 기관의 아트 마케팅 및 브랜딩을 진행합니다. 일에서 얻은 배움과 경험을 바탕으로 전 세계 다양한 미술관/뮤지엄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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