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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천협회 윤범사 Nov 17. 2021

사토라레サトラレ悟られ

사토라레'가 무슨 뜻이야?

글쎄, 사람이름이겠지


아닌 거 같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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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영화 제목이 'サトラレ'였다. カタカナ語인가 했다. 비행기 추락 씬에서 구조대원들이 하나 남은 꼬마생존자의 마음을 듣더니 サトラレ를 발견했다고 한다. 이건 또 뭔가. 여객기가 추락해서 사람이 수십 명은 죽어나간 상황에 サトラレ를 발견했다고.


サトラレ 7号의 성장기를 듣고서야 サトラレ가 '悟られ'라는 것을 알아챘다. 세상에, サトラレ 7号라니. 이건 언어의 무서움이다. 우리말로 해봐라. 알아채임? 눈치까짐을 당함? 그냥 의미에 충실하게 번역해서 들킴? 悟られ는 悟る(알아채다, 눈치채다, 깨닫다)의 受身形( _영어의 수동태 개념과 유사하다)를 명사화한 어간이다. 수동태 개념이 어색한 한국어로는 직역도 어색하며, 직역을 한다한들 그것을 명사화해서 어떤 개념을 아우르는 상위명사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다. '반경 100m의 사람들에게 마음의 파동이 전해져서 생각하는 바를 모두 들키고 마는 사람'을 우리말로 정의하려면 한자어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어려울 것 같다. '들킴' 혹은 '들킴이'로 정의하기엔 영 어색하지 않겠는가. 우리말로는 어렵고 일본어로는 어렵지 않은, 이런 성질은 분명 일본어의 장점이다. 한자어 아닌 고유어로 다양한 정의를 할 수 있다는 것. 언어의 소리가 많지 않아 오히려 유리한 점이 이런 점이다. 우리말 '들킴'은 그 소리가 주는 뜻이 너무 명확하여 저런 정의를 하기가 어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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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サトラレ'는 '트루먼 쇼'와 닮았다. 시골의 작은 마을 사람들 가운데 그가 천재성을 가진 サトラレ임을 모르는 사람은 그 자신을 제외하고는 없다. サトラレ 7号는 자신이 청년으로 성장하도록 작은 마을을 떠나 본 적이 없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그의 생각을 생방송으로 듣는다. 듣기 싫어도 들리는 바람에 정부 산하 サトラレ委員会는 그 지역에 최신의 도로와 병원과 학교를 지어주어 마을 사람들에게 보상하고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 마을 사람들은 듣기 싫어도 평생 들리는 サトラレ 7号의 잡념을 듣느라 스트레스에 괴로워하기도 한다. 뭐 그래도 サトラレ 7号의 천재성 덕에 마을의 GDP가 성장하고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야. サトラレ 1号의 발견 이후 サトラレ의 존재는 일본국 최고의 기밀이자 보물이다. サトラレ에게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자격은 처음부터 박탈되는 것이다. 여객기 추락사고에서 サトラレ 7号를 발견할 줄이야. 수십 명의 희생 속에서 이런 국가적인 보물을 찾을 줄이야.


트루먼과 달리 サトラレ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サトラレ임을 모른 채 살아간다. 생각이 모두 노출돼서 거짓말도 통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섹스도 생각할 수 없으며, 그래서 변변한 애인도 없이 철저히 국익을 위해 천재성을 발휘해야 하는 존재로서의 サトラレ를 흐드러지는 벚꽃 아래에 그려넣으며 영화 サトラレ는 끝을 맺는다. サトラレ를 사랑할 수 있는 단 한 사람, 유일한 피붙이인 할머니를 등에 업을 수 있는 '유일한 인간다움'을 부여한 채.


サトラレ 7号가 근무하는 병원의 원장은 3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남을 속이는 거짓말보다 질 나쁜 거짓말은 자신을 속이는 거짓말이고, 그런 거짓말을 늘 해야 하는 나의 괴로움도 이해해 달라고. 그는 サトラレ 7号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스스로도 괴로운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일본의 무서움은 이런 면이 아닌가 한다. 국익을 위해 내가 괴로워야 한다면 기꺼이 그러마, 고. サトラレ 7号 네가 사회 속에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는 것도 국익을 위해서니까, 어쩔 수 없다고. 일본의 한 작은 마을에 갇혀 평생 자신의 천재성을 개발해야 하는 サトラレ 7号는 성공적으로 나라에 이바지하고 サトラレ委員会의 サトラレ 사례 7번으로 남을 것이다. 비밀이란 비밀은 모조리 까발려진 채. 정작 자신은 그것을 모르는 채.


영화 サトラレ를 즐길 수 있는 일본의 문화에 작은 소름이 돋는다. 'サトラレ'는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선사하는 멋진 작품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나도 그 감동과 웃음을 받았던 것처럼. 다만 일본인이 아닌 나는 영화를 보고 나서 그 뒤에 숨은 무서움을 눈치챘을 뿐이다. 일본인 친구와 이런 얘기를 나눈다면 나의 발견에 후한 점수를 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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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サトラレ'를 보기 전에 나는 내가 '트루먼'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때가 종종 있었다( _'트루먼 쇼'를 보기 전에도 그런 생각이 종종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 삶에 내 발끝에 채이는 돌맹이 하나하나까지 의미를 갖고 그것들끼리 착착 앞과 뒤를 맞추며 내게 이렇게 영향을 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와 함께 성장한 모든 것들이 '지영원년' 부터 '지영26년'까지 원래 그 자리에 그 시간에 있기로 되어있었다는 상상은 가끔 주변의 사람들을 의심의 눈으로 보게 만든다. 어이 거기 내 知人님, 자네 혹시 '지영xx년'에 뿅 하고 나타난 것처럼 '지영80년' 쯤에 나와 같이 뿅 하고 연기같이 없어지는 거 아냐? 자네 집이고 한국이고 지구고 전부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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サトラレ는 평생 그 마을을 못 벗어난다. 지구인으로서 나는 サトラレ가 아닌 것이 틀림없다. 역으로 이 말은 サトラレ가 되지 않으려면 지구인으로서 부지런히 싸돌아다녀야 한다는 뜻이 된다.


(04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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