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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경 Mar 20. 2023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청춘열차

[김유경의 영화만평] 인생의 미니어처를 밝힌 <더 퍼스트 슬램덩크>

농구를 즐기는 지인이 있다. 그는 실직과 이직을 되풀이하던 한창때에 밤이면 농구를 했다. 어쩌다 덩크 슛이라도 하면 미친 듯 골대 주변을 맴돌았다. 번듯한 정규직을 꿈꾸면서 탑돌이 하듯. 그는 지금 대기업 부장으로 재직 중이지만, 가끔 헬스장 대신 농구 골대를 찾아간다. 여전히 자기와 싸울 일이 있다는 얘기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농구 애니메이션이다. 만화책 <슬램덩크>의 원작자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각본과 감독을 맡은 극장판이다. 북산고와 산왕공고의 농구 대결에 얽힌 미야기 료타(송태섭)의 가정사와 링에서 고투하는 선수들의 순간적 의식 흐름을 내면 심리로 묘사한 연출이 인상적이다. 자기와의 싸움이 삶의 필수라는 인생의 미니어처를 밝힌 앵글이다.

      

실전 링에서 빚어진 경악 깃든 환호, “드디어 서태웅이 패스했다”가 터지면서 결말이 뻔한데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감동이 한동안 이어진다. 개인기·팀워크·끈질김이 어우러진 현장의 열기는 농구에만 필요한 게 아니다. 캐릭터별 고뇌하는 순간을 연속으로 접하며 관람 중에 내 외로움이 위로를 받는다.  


   

그 과정에서 안자이 미츠요시(안한수) 감독이 실전 현장에서 선수들의 강약점을 설명하며 줄탁동시 닮은 작전 지시로 개인기와 팀워크를 살리는 게 눈에 띈다. 겪어야 비로소 체득되는 지혜를 하나같이 고집스런 눈빛으로 입 다문 북산고 캐릭터들이 내면화하도록 제때 이끌어주기는 쉽지 않다. 홀로 곱씹으며 감내한 덕에 선뜻 응한 자생적 팀워크가 승리를 거머챈다. 


    

그런 연출은 이노우에 다케히코 감독이 고교 시절 농구 선수였기에 가능했을 수 있다. 키가 작아 포지션이 가드인 송태섭을 드리블의 한계를 넘어 돌격하도록 한 것도. 등을 다친 정대만의 투혼을 발휘한 청춘열차가 비현실적이지만 내 응원을 불러일으킨 것도. 형 송준섭(미야기 소타)과의 추억이 송태섭의 에너지로 승화하듯, 캐릭터별 그림자가 빛(주인공)으로 바뀐 것도. 

    

사실 나는 일본 만화 주인공 이름을 한국식으로 바꾼 로컬라이징이 맘에 안 든다. 예매할 때 더빙이 아닌 자막 상영관을 선택한 이유다. 북산고의 5인조는 미야기 로타(송태섭), 사쿠라기 하나미치(강백호), 아카기 다케노리(채치수), 루카와 카에데(서태웅), 미츠이 히사시(정대만)인데, 자막에서 한국식 이름을 읽을 때마다 원작의 맛을 앗기니 아쉽다. 

     

어쨌거나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빛나게 한 건 “정말 끈질겨”를 내지르게 하는 데 있다. 형이 꿈꾸던 최강 산왕전에서 승리한 송태섭은 일단 꿈을 이루었지만, 그의 꿈꾸기는 계속된다. 삶은 하나의 산을 넘으면, 넘어야 할 다른 산을 또 보게 되는 거니까. 지인이 농구공을 놓지 못하듯 홀로 개인기를 연마해야 하는 시간이 이어져야 제대로 살 수 있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 만큼 멀리 내다보기는 없어도,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는 삶의 질을 업그레이드하는 평소의 끈질김이 덕목이다. MZ세대도 열광하는 풍성한 농구 기술들을 선보인 것과, 긴 터널을 통과하여 엄마와 화해하며 느끼는 송태섭의 오글거림 등이 그 결과다. 나도 배경이 된 바닷가 마을을 일본 사죄 후에 찾겠다는 질긴 맘을 챙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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