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경의 책씻이] 평화를 향한 《조국의 법고전 산책》
모처럼 전화해서 네가 부탁했어. “새로운 관심사나 ‘참 좋다’ 여기는 게 있으면 내게 말해주면 좋겠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어서 그러겠다고 했는데, 오늘 처음 해보려구. 저번처럼 서로 감정이 오를지도 모르니까 메일로 보낼게. 너와 연락을 뜸하게 한 장본인, 전 법무부장관 조국의 신간 《조국의 법고전 산책》 독후감이야.
법리보다 앞서는 여론
법무부장관 임명을 둘러싼 청문회로 시끌벅적한 2019년 하반기였지. 통화하다 네게 물었어. “내가 죄가 없다 항변해도 검찰발 피의 혐의 사실 언론 보도가 계속되면, 절친인 너는 내 무죄를 믿어줄까?” 대답을 듣지 않고 또 물었어. “그런 여론재판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너와 나를 포함해서.” 여론이 법리를 앞설 수 있음에 눈뜬 시기였지.
저는 ‘30인 참주정권’이 벌인 폭정의 여파가 소크라테스에 대한 유죄평결에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현재도 그렇지만 재판은 단지 법리로만 결론이 나지 않고 여론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검찰이 재판 개시 전이나 진행 중에 피고인에게 불리한 자극적 정보를 언론에 흘리는 이유도 다 이것 때문이죠. 유죄평결이 난 뒤 소크라테스는 “그런 결과가 나오리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하고 담담하게 말합니다. (8장·악법도 법인가, 363쪽~364쪽)
너는 지난 2월 3일 조국 부부 1심 판결을 어떻게 봤을까. 이 사건을 유발한 권력형 비리라던 사모펀드건은 기소도 되지 않은 채 별건 항목들로 채워졌던. 공교롭게도 그 재판 다음날 JTBC 토일드라마에서 ‘구속심사’를 이슈화한 내용이 방영됐어. 드라마 속 기업 회장은 여론몰이 홍보에 힘입어 보석으로 풀려났고.
자유박탈 그 자체가 일종의 형벌인 까닭에, 형의 선고가 있기 전에는 필요 최소한의 정도 이상으로 자유박탈의 고통을 받아서는 안 된다. 미결구금은 피고인이 유죄 확정될 때까지만 신병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러한 구금 그 자체는 본질적으로 형벌적 성격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그 기간은 가능한 최소한이어야 하며, 가능한 한 관대한 처우를 받아야 한다. (4장·죄형법정주의, 199쪽)
물론 그 영상물에는 정치 편향적인 ‘하이에나 저널리즘’이 없지. 조국 청문회 중에 느닷없이 부인 정경심 교수를 기소해 “미결구금”으로 ‘구속심사’를 받도록 한몫한. 체사레 베카리아의 위 주장을 읽는 내 속이 시끄러운데, 작가 조국은 “목에 칼을 찬” 티를 내지 않아. 정을병 단편소설 <육조지>의 “판사는 미뤄 조진다”로 ‘신속재판의 원칙’을 갈음하면서.
부정의한 ‘인간의 법’을 거스르는 ‘시민불복종’
그리스 3대 비극 중 하나인 《안티고네》를 법고전 마당으로 끌어들인 바도 신선해. ‘인간의 법’과 ‘왕의 법’을 ‘신의 법’으로 비판한 대목을 가리키면서, 안티고네를 “문헌상 확인되는 최초의 ‘시민불복종’ 실천자”로 소개해. 정부에 복종할 의무가 없다는 1장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시민참여재판’의 물꼬를 튼 2장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과도 맥락이 닿아 있어.
우리는 먼저 사람이 되고, 그다음에 국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함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오히려 착했던 사람들도 법을 존중하기 때문에 나날이 불의의 하수인들로 변해가고 있다. (9장·시민불복종, 403쪽)
‘시민불복종’ 개념의 창시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정부의 폭정이나 무능이 극에 달해 견딜 수 없을 때” 시민의 폭력적 저항인 ‘혁명권’은 정당하다고 했어. 정의를 위반하는 악법이나 법 집행을 법으로 받아들일 것인가는 시민의 몫이라는 거지. 2017년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시킨 ‘촛불혁명’-세계에 유래 없는 비폭력적 선진적 ‘저항권’ 마당을 선보인 시민불복종 시위-가 좋은 예지.
요즘 ‘사법 리스크’와 ‘방탄 국회’ 프레임으로 야당 인사를 다루는 기사들 댓글을 보면, 국민들은 지난 2020년 12월 온라인을 달구며 회자된 “99만원짜리 불기소 세트”의 검사(검찰)을 위한 ‘기소편의주의’나 ‘유검무죄 무검유죄’를 떠올리는 듯해. 곽상도 의원 아들 퇴직금 50억 무죄 판결 후폭풍 중 지난 2월 11일 보도된 울산시 남구 현수막도 그걸 대변하는 거지.
동서양의 ‘폭군방벌론暴君放伐論’
그렇게 보면, 우리네 사법에는 존 로크의 “무사공평한 재판관”이나 베카리아의 “형벌의 확실성”이 대개 안 보여. 민주공화국에서 행정부·입법부·사법부의 권위는 국민이 위임한 내용을 벗어날 때 없어진다는 걸 국민의 ‘의무’로써 일깨워야 할 판이야. “법적으로 보호되는 이익”인 “권리 침해에 저항하는 것은 의무”라는 루돌프 폰 예링의 《권리를 위한 투쟁》을 떠올리면서.
법의 목적은 평화이며, 평화를 얻는 수단은 투쟁이다. 법이 부당하게 침해되고 있는 한-그리고 세상이 존속하는 한 이러한 현상은 계속된다-법은 이러한 투쟁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법의 생명은 투쟁이다. 즉 민족과 국가권력, 계층과 개인의 투쟁이다. (7장·권리, 311쪽)
각 개인이 아주 사소한 일에서도 스스로의 권리를 대담하게 주장하는 일이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민족에게서는 어느 누구도 그 민족이 보유한 최고의 것을 빼앗으려고 시도하지 못한다. (7장·권리, 325쪽)
지난 2월 6일 국회 정치·외교·통일·안보 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고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박진 외교부 장관에게 대법원 판결을 존중하느냐고 물었어. 대법원 판결을 뒤집는 강제징용 배상 협상안에 대해 일침을 가한 거지.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일본 교과서 왜곡과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결정에 대해서도 예리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정부는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거지.
국익과 민생 안정을 위협하는 무능한 정부에 대한 ‘예방적 저항’이나 ‘예방적 혁명’은 국민의 의무인 거지.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와 요하네스 알투지우스 등의 ‘폭군방벌론暴君放伐論’, 즉 “폭군을 쫓아내고 죽일 수 있다는 사상”이나, “‘인’과 ‘의’를 해치는 왕은 ‘잔적지인殘敵之人’이므로 죽이고 쫓아낼 수 있다는” 맹자의 ‘역성혁명’ 정당성을 떠올리게 하는 요즘이야.
이렇게 얘기하다 보니 열다섯 권의 법고전이 우리나라에 시사하는 바가 많네. 바람직한 민주공화국은 국민의 의무로써 관리·유지된다는 걸 되새기는 한편 반성도 해. 소위 ‘2찍’들에게 눈 흘기는 내가 ‘다수의 전제專制’에 가담했을 수도 있기에. 양심적 병역거부자, 성적 소수자,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등 다양한 소수자의 인권 문제에 대해 소극적이었으니까. 암튼 너랑 조국의 신간을 들추다 보니 봄 맞이한 기분이야. 또 다툴지언정 줄곧 화해하며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