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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경 Aug 20. 2023

섹시한 이성의 원폭 개발자, 그를 왜 호명하는가.

[김유경의 영화만평] 인간적 매력이 넘치는  <오펜하이머>

먼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에게 엄지척을 보낸다. 미국의 프로메테우스로 불리는 개척 물리학자의 영욕을 흑백 영상 범벅의 스펙터클류로 압축한 연출이 독보적이다. 시점이 다른 로버트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 분) 비공개 보안 청문회와 루이스 스트라우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청문 분) 인사청문회 현장을 왼쪽의 되감기와 오른쪽의 미리 듣기 버튼을 숨차게 오가듯 짜깁기한 화면들로써 정치적 비화를 전달하는 속도감은 3시간 러닝 타임을 압도한다. 내가 ‘원자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를 처음 안 날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오펜하이머를 빼쏜 듯한 킬리언 머피의 표정과 언행에 앵글을 맞춘 감독은 오펜하이머의 지적 독립성, 공산당과 거리두기, 애정사, 부부관계, 과학자들과의 개방적 교류 등을 감칠맛 나게 삽입하며 수소폭탄 개발을 반대한 그의 진정성을 다각도로 가늠하게 한다. 연인 진 태틀록(플로랜스 퓨 분)과 나체로 마주 앉아 심각하게 얘기하는 장면은 오펜하이머가 섹시한 이성(理性), 즉 복잡다단한 인문학적 물리학자임을 귀띔한다. 육아에 시달리는 키티 오펜하이머(에밀리 블런트 분)를 다독이기 위해 아기를 친구에게 맡기는 쿨한 장면만큼이나 인상적이다. 


                   (생전의 오펜하이머)


그건 감독이 정치적 덫에 걸린 과학자 오펜하이머보다 거리낌 없이 자기를 드러냈던 인간 오펜하이머의 물리학자적 고뇌를 제대로 이해하여 전달하고자 애썼음을 암시한다. 그런 노력은 킬리언 머피가 오펜하이머에 대해 출중하게 감정 이입을 할 수 있는 동기부여로 작용했으리라. 특히 오펜하이머에게 엄습했을 물리학적 영감들을 환상적 섬광으로 시각화한 장면들은, 트리니티 실험 성공 직후의 원폭 피해 영상까지 포함해서, 이론 물리학자의 상상력이 실험 물리학자와의 소통과 과학 문명 발달에 불가결한 요소임을 새삼 일깨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톰 콘티 분)은 오펜하이머와 동시대인이다. 공헌 분야가 다른 20세기 물리학의 두 거장이 ‘맨해튼 프로젝트’ 관련 의견을 짧게 나누고 헤어지는 장면에서, 아인슈타인은 “파멸의 연쇄 반응”을 암시한다. 2차대전 종식과 동시에 핵무기 경쟁에 기여한 핵폭 개발자 오펜하이머의 도덕적 고뇌를 담은 발언과 스트라우스의 정치적 음해가 맞물린 역사적 청문회를 예고하듯. 결과적으로 “죽음의 신”을 거쳐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된 오펜하이머에게서 객석에 앉은 내가 인간적 매력을 느끼는 순간들은 대개 그 청문회 지점에서 나온다.  


  (오펜하이머와 스트라우스)  


증인이나 참고인으로 출석한 사람들 중 인간 오펜하이머를 믿는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맷 데이먼 분)조차 보안 인가 갱신 불허를 편들어 오펜하이머의 심사를 불편하게 한다. 카메라는 그들을 응시하는 오펜하이머의 침잠한 메마른 눈빛과, 음해 세력에게 왜 저항하지 않느냐는 키티의 힐난에 대해 묵묵부답하는 조용한 몸짓을 비춘다. 그 장면들은 키티가 청문회에 불참할까 걱정하는 변호사에게 “우린(키티와 나는) 성인이다”,라고 일축하는 오펜하이머와 어우러져 동료 과학자가 스트라우스의 음모를 고발하는 인사청문회 장면에서 절로 박수하게 한다.


  (보안 청문회에서 오펜하이머)   


국제 사회에서 핵무기 경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역사적 인물 원폭 개발자 오펜하이머가 지금도 강화되는 패권주의의 수단이었음에 방점을 찍는다. 그렇다면,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AI 개발자들은 수단화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오펜하이머의 인간적 매력에 흠뻑 취했던 상영관을 나서는 마음이 무겁다. 사회적 이슈로 세상이 시끄러울 때마다 역사가 심판할 것이라는 말을 아직도 듣게 되는 현실에서 무력감을 느낀다. <오펜하이머>의 역사적 조명이 창조적 연출력을 넘어서 과학계나 정치계의 돌아보기에 효과가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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