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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경 Aug 14. 2023

한번 같이 가보게요,라는 말의 파토스

[김유경의 책씻이]세상 바다로 발을 내딛은 변화,<작별 곁에서>,신경숙

신경숙 소설의 문체를 좋아했다. 속말을 끌어올려 겉말을 지어 파토스를 일구는. 비록 그 마중물이 사회성과 거리 먼 사소설류라 아쉽기는 했어도. 2015년 본격적인 표절 논란으로 그녀가 뭇매를 맞을 때조차 실망보다 안타까움이 컸을 만큼. 8년 만에 그녀의 신간을 펼치려니 문득 궁금하다. 그녀의 문체는 안녕한가.    

 

『작별 곁에서』는 동시대적 아픔을 곱씹은 세 작품이 내통하는 서간체 연작소설이다. 10.26사태로 닻을 내린 타국살이가, 팽목항의 세월호처럼 오롯하게 가라앉는 친구의 죽음이, 제주 4.3 희생자처럼 황망한 코로나19 팬데믹 속 딸의 죽음이 낱낱의 서사로 한몫하며 작별 코드로 묶여 있다. 치유되지 못한 사회적 속울음을 “작별하는 일이 인생 같다”,로 녹여내면서.   

   

<봉인된 시간>,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 <작별 곁에서> 등이 그 세 작품이다. 첫 작품은 10.26사태를 일으킨 주범의 최측근 외교관 가족이 겪은 참사를 태풍 속 삶의 풍경에 투영하며 토로한다. 둘째 작품은 고 허수경 시인으로 짐작되는 암투병하는 절친의 만남 거부로 현지에 머물면서도 통화만으로 상태를 접하는 절절함을 “각각의 시간”으로 담아낸다.

  

         

“17년 6개월의 굴레, 내가 내 나라에 갈 수가 없고 내 형제가 내게 올 수도 없었던, 국가원수를 살해한 대역죄인의 측근 제1호의 굴레” (<봉인된 시간> 중 62쪽)     


“그때 나도 무심코 네가 어디에 있더라도 이 작품을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퇴락한 기다란 목선 안에 빈틈없이 실린 남루한 살림살이들은 배가 싣고 있는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라는 작품 제목에 비쳐져 그 의미를 곰곰이 되새기게 했다. 우리는 강 위에 떠 있는 수많은 배 중의 하나에 불과하겠지. 강만이 아니라 너의 배에 무엇이 실렸는지 나는 모른다. 나의 배에 무엇이 실렸는지 너도 다 알진 못하겠지. 그래도 너는 베를린에서 나는 제주에서 같은 작가의 작품을 보며 동시에 서로를 생각했다.”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 중 121쪽) 


         

앞 두 작품이 제 몫의 고통을 혼자 감당하는 사회적 거리두기에 무게를 실었다면, 셋째 작품은 민박 주인 유정을 통해 그 거리두기를 허물자고 넌지시 제안한다. 서로 애써도 저마다의 배에 실린 것을 다 알 수 없이 강을 떠다닐망정 모든 배의 발버둥이는 각자도생하는 것만으로 해결될 수 없음을 일깨우듯. 신경숙 소설들을 다 읽은 내가 처음 대하는 그녀 문체의 파토스다. 

         


“유정씨는 나중에 한번 가보세요,라고 하지 않고 나중에 한번 같이 가보게요,라고 했습니다. 함께해주겠다는 뜻이겠지요. 나중에 한번 같이 가보게요,라는 말. 무심히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말. 방금 유정씨에게 들은 말을 바다를 향해서 가만 내뱉어봤습니다. 나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올까요? 무엇인가를 같이 해보자는 말요. 딸을 잃고 난 후 모든 것에서 의미를 함께 잃었습니다. 자전거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리는 눈 속으로 바다 저편의 우도가 들어왔습니다. 지금의 우도엔 무엇이 있고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싶은 궁금증이 생기다니……  참 낯설군요. 그 옛날 소를 관리하기 위해 섬 속의 더 깊은 섬 우도로 배를 타고 들어갔을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곳에도 저 푸른 바다에 가려진 초목들이, 차마 말하지 못하고 숨겨놓은 안타까움이, 한번 들어가서 돌아오지 못한 오래된 사람들의 역사가 스며 있겠지요. 선생님이 삼년을 생각하고 고국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가지 못하는 삶을 여태 살고 있는 것처럼, 통증에 함몰되어가던 친구가 한사코 자신의 고통이 있는 곳으로 나를 오지 못하게 막았던 순간들처럼요. 그렇게 시간은 그리고……를 계속 이어가는 것인가요?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어느 날인가는 유정씨와 내가 이 섬의 성산항에서 우도로 들어가는 배를 타기도 할까요? 그럴까요, 선생님? 그리고 또 어느 날 우도로 들어가는 뱃전에 나란히 서 있는 사람이 선생님과 저이기도 할까요? (233쪽 ~234쪽)  


   

스스로 감당할 각각의 시간은 다를망정 ‘너’를 ‘나’만큼이나 생각하는 서간체 소설 『작별 곁에서』는 더 알찬 문체로써 세상 바다로 발을 내딛은 작가 신경숙의 변화를 귀띔한다. 원래 눈이 큰 그녀가 추후 작품들에서 보다 밝아진 큰 눈의 유정이 되어 세상 바다를 향해 함께해주겠다는 말을 고함치며 낯선 섬으로 들어가길 기대한다. 지금 여기 바다는 몹시 목마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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