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무게에서 내일의 무게로 우리는 나아가고 있음을.
순식간에 지나가는 하루들이 쌓여서 어느새 주말이 되고, 평일을 돌아봤을 때.
내 몸은 무거운데 하루들은 너무 가벼워서 바람에 흩날리는 잎새처럼 빠르게 날아가듯이 없어졌을 때.
나는 그 하루를 가볍다고 느낀다.
매일매일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할 일들을 하나씩 해치우고 시간이 흘러 저녁을 먹기 위해 식탁 앞에 앉았을 때 오늘 하루는 과연 어떤 스토리가 있었던가.
생각해 보면 그냥 어제와 같은 하루였던 것 같기도.
머릿속에 오늘의 특별함을 담는 바구니가 있어서 매일매일을 기록한다면, 어제오늘과 같은 하루들의 바구니는 매우 가벼울 것 같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체처럼 누워있는 날의 바구니에는 내 베갯속 담겨있을 솜 몇 뭉치가 들어있어서 부피도 차지하지 못한 채 다른 바구니들과 겹쳐져 담길 수 있을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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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안 좋은 꿈을 꾼 날이었다. 불길한 악몽에 일어나자마자 머리가 지끈지끈하고 기분이 찝찝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 날은 엄마의 수술일이었다. 큰 수술은 아니고 시술에 가까운 수술이긴 했지만 우리 집에서 자궁경부암을 유발하는 전조단계의 시술을 받는 사람은 엄마가 처음이었다. 서둘러서 핸드폰을 꺼내 꿈해몽을 찾아봤더니 내 꿈은 누군가의 병, 부부의 싸움 등을 의미하는 거라고 한다. 엄마의 수술이 잘 끝날 수 있다면 오늘 남편과 싸워도 좋다는 생각으로 집을 나섰다. 엄마의 평일 이른 시각 수술에 보호자로 동행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프리랜서 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수술은 다행히 내 꿈과 다르게 무사히 잘 끝났고 엄마는 퇴원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외할머니가 쓰러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외할머니는 93세의 나이에도 아픈 곳 하나 없이 정정하게 살고 계셨는데, 전라남도 섬에 혼자 살고 계신 집에서 쓰러져계셨다는 얘기는 나에게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다시 한번 내 꿈이 떠올랐다. 다행히 할머니는 마을사람에게 발견되어 응급실로 옮겨졌고 몸상태에 문제가 없다는 진단을 받으셨다. 얼마 전 외삼촌이 다녀가셨는데 자식이 있다가 없어지니 외로운 마음에 기운을 놓아버린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할머니는 동네 분들과도 친하게 지내셨고 항상 경로당에서 노래를 부르고 티브이를 함께 보며 즐겁게 살고 계신다고 들었던 터라 더 뜻밖이었다. 사람의 몸은 이렇게 나약한 거였던가. 병이 아닌 사무치는 외로움과 그리움에도 힘없이 쓰러질 수 있는 거였던가. 할머니 몸에 이상이 없다는 건 참 다행이지만 나이가 든 사람도 역시 외로움을 이길 수는 없고, 그 외로움을 남편과 자식이 아니면 풀어줄 수가 없다는 것이 가족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저녁, 신랑이 야간 출근을 하고 강아지와 함께 잘 준비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침대에 누운 내 몸이 고단하고 무거워서 침대가 푹 하고 꺼지는 것 같았다. 내가 오늘 수술을 받은 것도 아닌데. 내가 오늘 쓰러진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오늘 하루종일 내 꿈 때문에, 누군가의 아픔 때문에, 누군가의 외로움 때문에 내 몸이 무거워진 것만 같았다. 하루종일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 때문에 내 하루는 너무나도 무거웠다. 서둘러서 냉장고에 보관하고 있던 화이트 컵와인을 한 병 꺼냈다.
마음 한편이 푹 하고 무거움에 꺼진 기분이었다. 오늘 아침 엄마의 보호자가 되어 손을 잡아주면서, 왠지 모르게 내가 엄마의 보호자가 된 기분이 낯설고 어색하고 동시에 애틋했다. 할머니가 쓰러졌을 때 보호자인 엄마의 보호자는 이제 나다. 사랑꾼인 아빠도 엄마의 수술이 끝나고 회사에서 급히 달려왔다. 나는 오후에 회의가 예정되어 있어 엄마를 봐줄 수 없기 때문에 온 것이다. 동생은 회사에서 엄마 상태를 살피기 위해 오늘만 10번은 전화한 것 같다.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시어머니는 우리 엄마와 자주 만나서 동네에 있는 서울숲 산책을 다니셨는데, 소식을 듣고 걱정되셨는지 죽을 싸들고 오셨다. 우리 엄마는 아직 아플 때 챙겨주는 사람들이 많아 외롭지 않다. 계속 이랬으면 좋겠다. 엄마가 언젠가 외로움에 정신을 놓아버릴 것 같을 때에도 우리가 옆에서 놓지 않게 잡아주고 싶다.
나도 가정이 생기고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성격이 무던해지고 어떤 일에도 크게 반응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진상 거래처들도, 회의 중 나를 답답하게 하는 상대도, 가끔 상처를 주는 말을 하는 주위 사람에게도 나는 이제 아무렇지 않다. 나이가 들 수록 나를 무겁게 만드는 것은 바로 가족과 나이 듦이다.
오늘 하루 내 마음속 바구니에 물건을 채우라고 한다면
꿈에 나온 파도 한 바가지, 울적한 내 마음 한 되, 엄마의 수술이 끝나고 회의 가기 전 급하게 챙겨 먹은 햄버거 세트 하나와 할머니의 외로움을 달래주던 티브이 한 대, 그 티브이를 볼 수 있게 도와주는 돋보기안경과 자기 전 생각나 마신 컵와인 한 병이 들어갈 것이다.
오늘 같이 무거운 하루에는 한없이 가볍게 느껴지던 매일이 그립다.
아무렇지 않은 날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이렇게 가벼운 하루의 연속에 무거운 날이 찾아오고 언젠가는 또 행복하게 무거운 날도 찾아오겠지.
오늘도 다행히, 이 무거운 날을 넘겼다.
하루라는 것에 분명 끝이 있어서 다행이다.
내일은 다시 가벼운 날들을 시작해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