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제 가슴을 가장 따뜻하게 해 주셨던 분은 할머니이십니다. 어머니는 일 욕심 넘치는 초등교사셨고, 아버지는 건설회사의 현장소장으로 근무하셨기에 일찍 집에 들어오시는 경우가 드물었습니다. 자연스레 제 주 양육자는 할머니가 되셨고, 삼대독자로 태어나 할머니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저는 그야말로 독불장군이었습니다.
버릇없고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아이로 자라기는 했지만, 양육방식의 옳고 그름이나 결과물을 떠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정말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 하나 하나가 저를 이렇게 미소 짓게 하는 것은 할머니로부터 받은 사랑이, 그 따스함이 제 무의식 속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부모님의 이혼 이후 친가와의 관계가 단절되었기에 할머니를 찾아뵐 일이 없었습니다. 부모님의 이혼을 겪으며 대인기피가 생길 정도였으니 옛 사건들을 떠올리게 할 누군가를 만나는 것조차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초등학교 이후 뵙지 못했던 할머니를 다 큰 성인이 되어 결혼을 앞두고서야 찾아뵙게 되었는데 이것조차 어릴 적 받았던 상처로 인한 트라우마가 조금은 치유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겠지요. 그 날 이후 가끔 할머니께로부터 전화가 오곤 했습니다. 잘 지내냐는 인사말과 함께 정확히 알아듣기 힘든 이야기들을 중얼거리시다 전화를 끊어버리시곤 했습니다. 여든이 넘어가시는 할머니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그럴 법도 하지요. 횡설수설하시는 이야기를 한참 집중해 듣다가 뭐라도 대답할라치면 어느새 끊겨있는 전화에 당황하기 일수였답니다.
어떤 날입니다. 문득 휴대폰을 보니 할머니의 부재중 전화 기록이 남아있더군요. 일과 중이라 바쁜 업무처리에 정신이 없었던 저는 그 기록을 확인만 하고 전화는 드리지 못한 채 지나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이틀 뒤, 할머니께서 소천하셨다는 부고를 받았습니다. 눈 앞이 깜깜했습니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치더군요. 감정의 소용돌이가 잠잠해지고 난 뒤 불쑥 고개를 든 하나의 감정이 있었습니다. 할머니께 답신을 드리지 못했다는 ‘죄책감’. 이런 운명의 장난이 있을까요. 이렇게 가버리시다니. 부재중 전화 기록을 보고 또 보며 자꾸만 한숨을 쉬어댔습니다.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그건 제 잘못이 아니니 죄책감 느낄 필요는 없다며 위로를 건네더군요.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할머니께서 갑작스레 소천하신 것은 제가 전화를 받지 못했던 것이나, 답신드리는 것을 잊어버린 것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할머니의 소천 소식을 들었을 때 제 속에 요동쳤던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도 제 탓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 저도 잘 압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제 가슴이 져며왔습니다. 그때 왜 전화를 다시 드리지 못했을까. 자꾸만 솟아나는 아쉬움과 뭔가 모를 미안함이 자꾸만 나 자신을 탓하는 걸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KTX를 타고 빈소가 설치된 수원으로 가는 길. 창 밖에서 스쳐가는 풍경들이 어찌나 우중충하던지. 푸르러야 할 하늘이 잿빛으로 보였습니다. 할머니의 빈소로 간다는 부담감 때문이었을까요. 어릴 적 아버지와 멀어지는 과정에서 겪었던 일들부터, 오랜 시간 연을 끊고 살았던 친가 친적들을 다시 봐야 한다는 부담감까지. 온갖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빈소에 도착해 오랜만에 친가 쪽 친지들을 만나 인사를 나눴습니다. 갑작스러운 할머니의 별세 소식도 큰 충격이었지만, 오래간만에 봐야 하는 친척들과의 만남 또한 옛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 자극이었습니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2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연을 끊고 살았던 분들과 다시금 만나 ‘그간 어떻게 지냈냐’는 뭐라 대답하기 어려운, 사실 대답하고 싶지도 않은 질문과 조우해야 한다는 사실이 참 두렵더군요.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이혼 이후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아버지가 먼저 도착해계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미 다른 사람을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리신, 이젠 마음속에 ‘남’이라 정의되어 있는 아버지를 만나야 한다는 것이 어찌나 부담스럽던지. 오히려 담담하게,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인사를 드리고 장례식이 끝나 장지에 할머니를 묻는 그 순간까지 눈 몇 번 마주치지 않고 자연스레 지나쳤지만 돌이켜보면 결코 괜찮지 않았던 것 같아요.
발인을 하기 전 유족들과 고인이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싸늘하게 굳어버린 할머니의 시신을 둘러싸고 온 가족이 작별을 고하는 시간이지요. 고인과 대면하여 할 수 있는 정말 마지막 순간. 저는 할머니의 먼발치에서 발등을 어루만지며 고인의 평안을 빌었습니다. 30년도 넘게 지난, 기억조차 나지 않는 할머니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어린 시절 나를 길러주신 정성과 사랑에 감사하단 말을 전했습니다. 둘러싼 모든 이들이 저마다의 속내를 털어놓으며 눈물을 흘릴 때, 저 또한 시간의 지평선을 거슬러 올라가 30년 전의 할머니와 작별했습니다. 내 눈 앞에 계신 할머니와 함께했던 시간들은 이미 과거에 멈췄기에.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단절된 관계가 어찌나 서럽게 느껴지던지. 가슴속 깊이 묻어둔 어린 시절의 아픔들이 혹여나 솟구칠까 감정을 억누른 채 묵묵히 할머니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이렇게 가시는구나. 다시는 못 볼 사람이 되어버린, 어린 시절의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한 사람. 어느 순간엔가, 내 어릴 적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만큼 내가 늙고나면 무엇을 후회할까요. 조금 더 사랑할걸. 조금 더 먼저 미안하다 말할걸. 가지려고만 하지 말고 좀 나눌 걸. 무엇보다 가족과 더 오래 함께 보낼 걸.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할 시간이 이리도 짧다면, 혹 더 많은 시간 함께 할 수 있다 해도 지금의 나와 지금의 그가 함께 할 시간은 지금밖에 없다면, 매 순간 매시간 함께 하는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그것도 가족이라면 말입니다. 휴대폰 알람이 울리네요. 둘째 어린이집 하원 차량이 올 시간입니다. 오늘은 덜 혼내고 덜 싸우고 사이좋게 지내야지. 더 사랑해 줘야지. 또 다짐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