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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몬 베유 Jul 05. 2021

내 장례식장에선 치킨파티를 열기로 했다.

미래 없는 20대 청년들의 유서 쓰기.

 설령 내일 죽는다고 해도 치킨은 옳았다. 유서를 황급히 치우고는 집 앞까지 배달 온 치킨이 유서에 끼는 우울감을 몰아낸 이유는 다름은 아니었다. 닭다리 하나를 물면 유서를 쓸 때조차 기분이 좋아져서 문장은 재빨리 매무새를 마친 채 결말이 나곤 했다. 치킨, 정확히는 네네치킨 청양 마요는 유서를 끄적이면서도 살아갈 이유를 부여해 줬다. 치킨은 유서를 성급히 쳐내고 식탁을 피게 만들 정도로 맛있었다.


 대학교 시절, 4년간 벽돌만큼 두꺼운 철학책과 싸워도 가끔은 치킨이 승기를 잡았다. 치킨은 때때로 대학교 4년 동안 배운 철학보다 더 많은 삶의 이유를 부여해줬다. 때론 플라톤이니, 니체니 하는 사람들이 쓴 문장과 사유보단 네네치킨 청양 마요 소스와 함께 넘어가는 치킨은 삶의 의미와 힘을 되살려줬는데 비록 건강이 좋지 않아 맥주와 함께 즐기는 날은 많지 않았지만 치킨은 그 맛만으로도 삶의 의미를 충분히 더해줬다. 허기진 뱃속에 따뜻하니 차오르는 탄수화물과 그 맛은 하루를 더 살 이유를 만들어 준다고 해도 그 표현에는 거짓이 없었다. 배달비까지 해서 2만 원 밖에 안 하는 치킨은 가끔 삶을 하루 이상 연장시키는 가치로 충만해 있었다.


 물론 잊고 있던 치킨파티를 떠올린 건 허기에 의해 떠오른 네네치킨을 먹고 싶다는 생각 때문은 아니었다. 밤마다 알바로 날을 지새는 친구는 어느 날인가 유서를 써서 보내왔는데, 유서 옆에는 “자살 아님”이라고 적혀 있었고 그다음으로는 타인들을 안심시키는 문장들을 적어놓은 채로 사진을 보내왔다. 물론 그 착한 마음씨가 이어진문장들은 자신을 위해 현악 4중주를 대기시키고는 화려한 장식품과 함께 우울한 진혼곡을 연주해달라는 이야기보다는 소박한 파티를 열어달라는 단촐한 요구로 수렴됐다.


 “얘였으면 이 상황에서 이랬을 텐데”하는 기억으로 장례를 즐겁게 치러달라는 요구는 죽음을 기념하는 파티치곤 꽤 소박해 보였다. 평소에도 현실적이었던 친구가 적은 글엔 소박함 뿐만 아니라 멋도 있었는데, 죽은 사람은 사라졌고 남은 자들은 슬퍼하니 파티로 자신의 슬픔을 잊든가, 덮든가, 아니면 진짜로 현실을 즐기기를 원하는 마음은 그 친구 나름의 멋이었다.


 하지만 그 멋도 눈치 없는 나에겐 하나의 이야깃거리였으니, 눈치 없는 나는 그 멋을 내 맥락으로 이기적이게 전유해버렸다. 나는 그 멋 뒤에 눈치를 상실한 채 ‘나는 파티는 그래도 치킨파티’라며 답장을 이었다. 다행히도 나에게 파티의 전권을 위임했으니 자살이 아닌 상태로 이 친구가 죽는다면 나는 친구의 유서를 빌미로 치킨파티를 열 수 있었다는 생각 아래, 메뉴는 다른 사람과 소통해야겠지만 적어도 네네치킨 청양 마요는 하나 이상시켰을 것 같다고 상상에 잠깐 빠진 뒤 파티는 “역시 치킨파티”라고 답을 적었다.


 그 답 위에 이어서 답을 단 것은 염치없게도 내 손가락이었다. 언제나 마음에 품고 있던 ‘장례식에서 여는 치킨파티’는 염치없이 튀어나올 준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가 치고 들어올 틈도 주지 않으며 눈치 없는 답글은 노란 화면 위에 염치를 쌓아갔다. 친구는 “나는 내가 죽으면 꼭 치킨파티를 열어달라고 친구들에게 말했다”라고 한 답글에 대해 삭제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은 채로 그 친구는 ‘살아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었다’며 “꼭 가야지…”라고 내 염치를 감내하며 대답해줬다.


  하지만 그 답 뒤로 내 손가락은 제대로 된 답을 입력할 수 없었는데, 염치 때문이라기보다는 치킨에 대의명분 같은 게 붙으면 괜히 가볍게 먹는 치킨임에도 그 무게가 무거워지기 때문이었다. 물가는 치킨을 함부로 사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상승해 치킨 값은 어느새 2만 원을 웃도는 상품이 되었으나 치킨이라고 함은 퇴근길에 가볍게 사 먹을만한 이미지를 내칠 수 없었다. 나 역시도 ‘장례식은 역시 치킨파티지’라는 향방 속에 치킨의 가벼움을 무겁게 만드는 의미라던가, 단어라던가, 근거 같은 것을 만들기는 싫었으나 치킨파티를 계획한 이유는 “꼭 가야지…”같은 마음을 먹게 하는 것과는 조금 멀었다. 장례식을 치킨파티로 보내야겠다는 말은 치킨을 먹고는 다시 힘을 내서 닭 가슴살 만큼이나 퍽퍽하기만 한 인생에 친구의 장례식을 빌미 삼아 하루를 쉬고, 또 치킨을 먹는다면 얼마나 행복할지 상상하며 내뱉는 말이었다. 그렇게 언제부턴가 발칙한 상상력은 머리 이상으로 뻗어나가 입 밖으로 꺼내졌는데, 아무튼 이 생각은 죽음을 기념하는 장례식이 가진 힘을 살아있는 사람의 또 다른 힘으로 돌리려는, 기존의 선을 넘는 상상력이었다.


 그래도 나도 사람인지라 말을 뱉기 전에 생각이란 것을 하는 편인데, 장례식을 치킨파티로 바꾼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잠들기 한 시간부터 나름대로 공상을 통해 현실 예측해보았으니 공상 속에서 떠오른 사실들은 다음과 같았다.


1.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내 주변 친구들은 ‘고생했으니 편히 쉬어’라는 말을 나에게 던지고는 자기들도 바쁜 삶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2. 죽음을 빌미로 바빠버린 세상 속에서 치킨을 뜯으며 삶을 즐길 것이다.

3. 그리고 정말 치킨파티를 했다면서 역시 똘끼가 충만한 친구였다며 나에 대해 토의할 것이다.


다른 장례식과 차이를 가지는 지점을 생각해보자면 이 세 가지였다. 물론 치킨만 먹고 돌아가는 사람이 존재할지도 모르겠지만 예의상 참가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치킨의 가벼움과 장례식의 무거움의 딜레마에 끼여 조금 더 가볍고 의미 있고 장례식에 참여할지도 몰랐다.


 물론 차라리 장례식에 참여할 에너지로 집에서 발 닦고 잠이나 자는 게 더 편하지 않느냐고 되물어볼 수도 있다. 맞다. 하루 일 안 하면 최소 8만 원이 날아가는 이 세상에서 죽은 사람을 기념하는 장례식 같은 행사는 인사치레, 인간관계, 공식적인 행사, 어쩌면 마지막 남은 인간성과 같은 행위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돈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당사자들의 우울과 장례식장에 가면 찾아올 수밖에 없는 죽음에 관한 공포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효율과 생산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진정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다면 죽지 않는 게 제일 좋다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시간은 많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반대쪽에서 문뜩 생각의 문을 두드리는 하나의 사실도 있었으니 ‘죽음은 끝까지 버티다가 가차 없이 찾아온다’는 사실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도대체 이 간극을 피할 수가 없어서, 자살을 하든, 투병생활을 하든, 심지어 교통사고를 당하더라도 죽기 직전까지 살아남을 방법을 찾기에 나는 잠깐이나마 두 생각을 중재하고 관리자의 입장으로 휴전을 신청했다.


 휴전의 결과는 아시다시피 치킨파티였다. 살려고 전심을 다해 노력해보아도 죽을 운명이었다면 살려고 바둥거리지 않는 지금 살아있는 사람을 위해 죽음의 방식 하나 정도는 찾아놓는 것이 좋았다는 게 망상에서 일어난 싸움의 결론이었다. 그 결과 찾은 대답은 유서를 쓰면서도 죽음을 내일로 미루게 만들었던 치킨이었는데, 치킨의 가볍기도 하고 맛있기도 하고 장례식의 무거운 분위기도 흔들 수도 있다는 장점은 살아남은 자를 위한 장례식을 만들 때 충분한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정작 이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식은 치킨처럼 차분한 반응을 꺼내왔다. 내가 원하는 반응은 장례식을 기대하며 잔뜩 힘을 얻은 “너무 좋겠다”거나, “치킨은 무슨 메뉴로 할 건데?”거나, “치킨 맛있겠다”였는데, 유서를 적은 친구의 답은 “꼭 가야지…”였다. 당연스럽게도 내 죽음에 투영되는 감정을 배제하고 장례식을 상상하는 일은 당연히 불가능했겠지만 그 대답엔 약간의 음울이 끼어있었다. 하긴 야 왜 그렇게 힘이 없냐며 사람이 죽은 것은 죽은 것이며, 이제 남은 사람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대답을 달 순 없었다. “꼭 가야지”라고 말한 전제에는 이미 내가 죽었다는 사실이 놓여있는 건데, 죽은 자가 열심히 살라고 말하는 건 내가 부활을 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현실이었다.


 그래도 장례식을 치킨파티로 결정한 일에 대해 후회는 없다. 어쨌든 나는 발칙한 상상력으로 내 장례식장을 그려본다. 내 죽음이 자살이 되었건 타살이 되었건 간에, 갑자기 발목이 접질려 우당탕거리면서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건 아니면 피치 못하게 지병으로 가진 간이 악화되어 둔탁한 투병생활 끝에 고통에 휩싸여 표정관리도 못하고 죽든 간에 친구의 죽음 앞에서 서성이며 장례식장에 방문해줄 친구들을 상상해본다. 거기 참여한 사람들은 나의 죽음에 나름대로의 슬픔을 투영하며 오는 사람들 일터인데, 분명 장례식장 입구부터 풍기는 치킨 냄새로부터 ‘맞아. 얘 장례식 치킨파티로 하기로 했지.’라는 생각이 추억의 실뭉치의 어느 한 올로부터 떠오를 것이며, 점점 다가오는 냄새로부터 배가 고파질 것이다. 대략적으로 의례는 치러야 하니까 장례식 사진을 보고 절을 하면서 ‘역시 미친놈이 맞아.’라고 한 번 생각하고, 익살스러운 사진을 보며 ‘역시 미친놈이 맞아.’라고 한 번 더 자신의 생각을 굳힐 것이다. 풍기는 치킨 냄새 속에서 맞절을 하다가 동생 입가에 뭍은 치킨 양념이라도 보는 날엔 마음을 추스르며 그 간 단련했던 웃음을 참는 방식들을 기억 속 어딘가에서 꺼내와 허벅지라도 꼬집어야 할 것이고, 동생이 말이라도 거는 날엔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즐거움을 뿜어내야만 할 것이다.


 밥을 먹으면서도 난감함은 이어진다. 적어도 한국 사회에선 젊은 사람이 죽는 일은 호사가 아니라고 평가되는데, 호사가 아님에도 밥으로 육개장이 아니라 치킨이 나오는 상황에 대해서 매뉴얼 같은 건 정해져 있지 않으니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해할 것이다. 난감한 표정 뒤로 어떤 테이블은 웃기도 하고, 어떤 테이블은 말없이 닭다리를 뜯을 것인데 어차피 아웃사이더의 친구들은 대부분 아웃사이더이기에 곧 잘 자기 나름대로의 스타일로 적응해갈 것이다. 아 참, 어차피 사람들이 별로 없으니까 옆 테이블 눈치를 볼 일도 없으려나.


 그래도 “꼭 가야지…”한 친구는 꼭 올 터이니 한 테이블 이상은 존재할 것 같다. 물론 의례상이든, 진심이든 간에 어머니와 아버지의 친구들이 올터이니 꽤 북적일 수도 있다. 물론 난감한 건 이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망자가 죽기 전에 꼭 부탁한 일이라니 어떻게 안 먹을 수도 없고, 상주들에게 장례식에서 이게 뭔 짓거리냐며 나무랄 수도 없다. 그래도 죽기 전에 꼭 부탁한 일이니까.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호사가 아닌 죽음에 치킨을 내온 곳에서 지을 수 있는 표정”과 같은 책은 나오질 않았으니 그들도 무척 난감할 것 같다. 난 부디 어머니와 아버지의 친구들 역시도 잠깐 빠른 삶을 멈추고 ‘이렇게 죽을 수도 있구나’ 같은 발칙한 질문을 던져줬으면 하지만 평생 50-60년을 죽음을 진지하게 다루며 살아온 이들에게 내 생각을 강요할 수는 없으니까 좀 미안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물론 이들도 앞 선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치킨 냄새를 맡고, 익살스러운 영정사진을 보고 웃음을 억눌러야 하고, 상주의 얼굴을 보고 감정을 추슬러야 한다. 그렇기에 제발 구멍 난 양말을 신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장례식은 산 사람들을 위한 행사라는 점을 인정한다. 또한 장례문화는 전통과 많이 연결되어있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어렸을 때 학습했던 내용 중에 장례풍습과 무덤의 모양으로 민족의 기원을 찾는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었는데, 장례식을 의무적으로라도 가야 하는 나이가 서서히 엄습해오다 보니 왜 그런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민족의 정신이라고 말할 정도로 잘 변하지 않는 장례식은 변하지도 않을뿐더러, 사회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은 자가 장례식에서 밤 놔라 배 놔라 할 수 없는 노릇일 수도 없는 생각이 든 건 상상들을 이어가다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난처한 표정 때문이었다. 난 내 장례식에 밤도, 배도 아니라 치킨을 올려놓으려고 했으니.


 또한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사실 역시도 장례식에 개입이 불가능하다는 한계를 일깨워줬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정확히는 말을 할 수 없다. 그 유서가 어떻게 읽히든 간에 어떻게 손 쓸 방도가 없다. 내가 3일 만에 부활한다고 하더라도, 장례식은 3일 동안 치러지니까 장례식의 방향과 의도에 영향을 끼치는 건 불가능하다. 유서에 철자라도 틀려서 치킨파티가 아니라 지킨 파티로 바뀌어 슬픈 마음을 굳건히 지킨다던가, 아니면 치킨파티를 열어달라는 말이 ‘치킨파티’라는 치킨 브랜드를 창업해달라는 말로 들려서 부모님이나 친구가 치킨집 사장님이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어떻게 손 쓸 방도가 없다. 물론 그건 3일 만에 부활하면 곧잘 막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꼭 가야지…”같은 마음을 “와 오늘 치킨 먹는다!”로 바꿀 순 없는 노릇이다. 내가 원래부터 치킨파티를 계획했다는 맥락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아들이 죽었는데 위로해줘야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고 왔는데 치킨 향이 나니, 그 의도를 파악하다가 장례식장을 나올지도 모를 노릇이다.


 하지만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횡포를 부릴 수 있는 신이 되는 과정이 아니다. 가장 생산성 없는, 이제 잊혀만 하는 시체가 되는 일이다. 이는 장례식은 본질적으로 산 자들의 일이고, 사회와 연결되어있고, 망자가 원하는 대로 의도를 꺾지 못하며, 오는 사람도 당황할 수 있다는 생각들은 그냥 기존의 장례풍습으로 보내면 좋겠다는 마음 한쪽 주장의 근거가 됐다. 그래서는 ‘오늘 치킨집은 휴무입니다.’처럼 ‘장례식에서 치킨파티를 기대한 사람들이 있다면 미안해요. 그냥 장례는 기존의 풍습대로 치를게요. 와서 수육과 육개장을 드세요.’라고 적어놓을까 몇 번을 고민했다.


 하지만 생각 끝에 적은 건 역시 치킨파티였다. 대신 좀 유연한 어조로 적기로 했다. ‘가능하다면’ 같은 접미사를 붙여서 읽는 이의 심정을 누그러뜨리고는 ‘가능하다면 치킨파티로 해달라’고 적었다. 유서가 힘이 있는 전언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기에, 그리고 발칙한 상상력 속에서 마주한 사람들의 당황스러움과 그 당황스러움을 소화하는 친지들의 모습이 그다지 달갑지는 않았기에 꽤 유연한 어투로 치킨파티를 적기로 했다. 그러면 분명 살아 있는 자는 한쪽에 치킨이 있다거나, 육개장과 치킨을 함께 낸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타협점을 찾아갈 수 있으리라. 물론 동생의 입가에 뭍은 치킨 양념과 영정사진에 나온 익살스러운 표정은 내가 어찌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나름대로 머릿속에 남아있는 매뉴얼대로 행동할 수 있겠고, 적절한 슬픔을 유지하면서 유족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장례식을 경험한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호사가 아닌 죽음에 치킨을 내온 곳에서 지을 수 있는 표정”은 없더라도, “유쾌함을 잃지 않으려는 망자의 모습에 대응하며 유족을 위로하는 나름대로의 방식”은 있으니까.


 그래도 육개장 옆에 양념치킨이 나온다면 분위기가 무겁게 흘러가지 않으리라 예상된다. 그렇다고 해서 양념치킨은 어색하지도 않아 보인다. 어쨌든 한국 장례식에 전통적으로 올라오는 메뉴는 빨간 메뉴가 주로 올라오니까. 육개장과 오징어무침 혹은 홍어무침 사이에 양념치킨이 올라간다면 별로 어색해 보이진 않아 보인다. 물론 맛이 짜기보단 달고, 젓가락으로 집어서 먹기엔 좀 힘든 감이 있어서 어색할지도 모르지만 색깔로는 네네치킨 청양 마요 같은 갈색과 하얀색이 섞인 치킨이 아니라면 내는데 용기가 필요해 보이진 않다. 상 위에 치킨이 올라오면 누군가 의미를 묻기도 하고, 누군가는 진짜 이걸 한다며 추억하기도 하면서 분위기는 조금이나마 가벼워질 수 있겠다.


 무엇보다도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 개인은 너무 많은 힘을 빼앗기지 않을 것 같다. 치킨을 보며 웃고 즐기는 분위기가 전제되어 있다면 상주들을 포함한 조문객은 몸에 강하게 밴 힘이 풀릴 수밖에 없다. 적절한 피로도 속에서 먹으면 또 맛있는 음식이 치킨이다. 장례식장이니까 당연히 배치된 맥주와 함께 치킨을 먹고 마시며 조문객들은 다른 장례식보다 조금 더 자유롭게 드나들 것 같다. 맛있는 음식이 들어가면 몸에 활기가 돌고 말할 힘도 생기니까 죽은 사람이 왜 죽었는지, 어떤 심경인지 오히려 잘 물어볼 수 있을 것만 같다. 이 상상이 지극한 개인적인 희망일지,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상상만으로도 꽤 괜찮아 보인다. 장례식이 치킨파티라면 다들 먹고살기도 바쁜데, 적어도 내 장례식만큼은 먹고살기 바쁜 일상에 흠집을 내는 축제처럼 멈추는 공간을 열어주지 않을까.


 하지만 치킨 파티를 열면 가장 아쉬운 쪽은 망자일 것이다. 망자는 이 즐거운 모든 상황을 볼 수 없다. 망자는 말이 없을 뿐만 아니라, 들을 귀도, 이 모든 상황을 볼 눈도, 축제 분위기를 느낄 신체도 없다. 좀 오해가 있을만한 발언 같기에 좀 더 정확히 하자면 그 모든 신체는 지금 영안실 안에서 방부처리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까 느낄 에너지가 없는 게 맞겠다. 만약 사후세계가 없다면 망자는 그 즐거운 순간을 모두 놓친다. 함께 즐기고, 먹고 마시는 그 순간들과 치킨 냄새가 나서 당황하고, 웃음을 참을 수 없고, 결국은 의례적으로 단단해진 몸의 긴장을 풀고 함께 닭다리를 뜯는 그 모습을 모두 놓친다. 그 즐거움은 모두 산 자의 몫이다.


 물론 사후세계가 있어도 ‘함께’ 즐길 수는 없다. 만약 유령이 되어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다면 ‘누군가의 장례식에서도 삶을 이렇게 즐길 수 있다면 아 더 살 걸. 까비.’ 같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옆에선 이제 가야 한다며 저승사자든, 천사든 신의 언어를 대언하는 사람들이 나를 붙잡고 천국에 가긴 글렀으니 아마 지옥으로 끌고 갈 것이고 한 편에서는 그리고 즐겨줘서, 내 유언을 잘 지켜줘서 고맙다는 생각을 한 채로 천천히 저 편으로 사라져 갈 것이다.


 이 모든 즐거움이 내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건 짓궂은 사실이다. 지금 내가 치킨파티를 연다고 해서 나와 관련 있는 모든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즐거움을 누릴 순 없으니까 나는 생에 사람들이 치킨파티로 인해 즐거워하는 모습을 누릴 순 없다. 내가 유령으로 남아 바깥에서 바라보든, 아니면 죽어서 사라지기 때문에 상상으로만 그 모습들을 쳐다보든 간에 난 거기 낄 수 없다. 살아있지 못하니까(않으니까) 누릴 자격 없다고 하기도 애매하고, 욕심이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치킨파티의 즐거움은 내 삶 밖에 있다.


 그럼에도 장례식이 아직 세상에서 사람들의 시간을 잠깐 멈출 힘을 가진다면 그 힘을 조금이나마 이용해 보고 싶다. 다만 그 힘의 방향을 내 혓바닥이나, 번 드러지는 글귀으로는 바꿀 수 도 없을뿐더러, 강요할 수도 없으니까 나는 인간이 꽤 오랫동안 먹어왔던 닭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힘을 사용해보도록 한다. 먼 과거 건 , 가까운 현재건 언제나 닭을 먹을 땐 편안한 상태에서 불이나 TV 같은 것을 보며 먹었을 확률이 농후하기 때문에 신체의 습관을 이용해보도록 한다. 치킨 냄새와 절대적으로 이어져있는 신체의 편안함이라는 특성을 자극해보기로 한다.


 신체가 편안해지면 다양한 이야기가 뻗어 나올 수 있다. 분위기가 무거워지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표정도, 어깨도, 몸도, 심지어 마음도 무거워진다. 하지만 가벼워질수록 말은 꺼내기 쉽다. 말이 들어갈 틈이 생긴다고 해야 할까. 할 수 있는 말들이 넓어지니까. 적어도 “아, 이 집 치킨 맛있네요.”정도는 할 수 있는 분위기는 맞을 것 같다. 어느 장례식에서 “이 집 수육 잘하네요” 하면서 네이버 지도 별점에다가 5점 만점에 5점을 줄 수 있을까. 분위기의 허들이 낮아지면 무슨 말이든 가능해진다. 허들이 낮아지면 젊은 사람이 왜 죽었을 수밖에 없었는지 한 번쯤이나마 이야기가 나오게 되겠다. 분위기가 너무 가벼워진 나머지 ‘죽을 수밖에 없었다’며 뒷담으로 흐르건 간에,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내가 왜 죽었는지 논의하고 토론하건 간에, 치킨에 염분이 녹아들듯 “살아생전 토크” 역시도 장례식 토크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것이다. 이 흐름이라면 망자에 대한 의미와 기억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지 않을까. 왜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 고민해볼 가능성도 내포하지 않을까.


 하지만 무거운 상태로 다시 일상으로 복귀해야 한다면 논의는 불가능하다. 내일 출근이 아침 9시인데 새벽 3-4시까지 장례식장에 부담 없이 있을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만약 빨리 집으로 복귀한다고 하더라도 하루 정도 시간을 내고 장례식장에 방문해 그 긴장을 온전히 감당함에도 내일을 걱정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다. 몸과 마음이 무거워지면 입도 떨어지지 않는 게 사람의 신체 일터인데, 거기에 당사자가 호사가 아니라 객사나 사고사, 자살이라면 가뜩이나 무거워진 입은 더 무거워져 밥을 먹지도 못하고 “드릴 말이 없다.”라고 간신히 입가를 움직인 뒤에 자리를 뜨고 말아 버린다. 만약 부모보다 먼저 떠난 딸이나 아들의 장례식이라면 분위기는 차마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어찌 설명할 수 없는 중압감은 조의금만 보내고 방문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사정을 이해하게 만든다. 신체가 무거운 분위기를 짊어져 자신도 더한 위로를 더하고 싶어도, 간단한 위로만 드리고 빠져나가는 상황에서 왜 그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 질문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질문이 없어지면 의문도 당연히 사라진다. ‘왜 자살해야만 했을까. 왜 객사해야만 했을까.’ 하는 질문은 중압한 분위기 속에서 사라진다. 하지만 질문이 없으면 죽음은 어디선가 다시 반복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대책을 세우거나, 예방을 하는 일도 당연히 불가능하다. 애초에 어느 자리에서 조차 논의되지 않았기에 죽음은 비슷한 이유로 반복된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죽음을 타인을 위해 완전히 내어주겠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아무리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로봇”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티 스푼 하나 정도의 “따뜻함”은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 죽음 속에서 타인을 위한 힘을 남김없이 발굴해내는 목표를 가진 건 아니다. 아주 소량이라도 내 죽음은 의미가 있었으면 좋겠고, 나도 오래 기억되면 좋겠다. 그렇다. 이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눈치채셨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치킨파티는 무의식 속에서 설계된 나의 짧은 생과 죽음을 기념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고도의 전략 속에서도 남아있는 자들의 몫을 한 번 더 생각한다. 어차피 문화에 의한 강요 건 간에, 진심으로 가슴 아픈 마음을 부여잡고 참여하건 간에 장례식에 참여해야 한다면 치킨이라도 먹으면서 힘을 주고 싶다는 게 아직까진 생존해있는 몸뚱이의 생각이다. 뭐든 힘이 있어야 한다. 슬픔을 이기려고 해도, 향유하려고 해도 힘이 있어야 한다. 다시 일상을 살아가려고 해도, 의문 넘치는 죽음에 대해 가슴에 묻어두려고 해도 힘이 있어야 한다. 물론 망자에 대해 회고하고, 죽음에 대한 의문을 밝혀내려고 한다고 하더라도 힘은 있어야 한다.


 남아있는 사람들을 위해, 나는 유서를 쓰면서 삶에 의미를 더해준 치킨을 불러낸다. 그때 먹은 치킨은 확실히 달고 맛있었다. 장례식과 같은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도 몸과 마음을 일깨울 정도로 맛있는 음식이었다. 어쩌면 왜 사람들이 요즘 빨리 죽는지 질문하고, 왜 저 사람은 죽어야만 했는지 말을 꺼내게 하리라고 예측할 정도로 힘을 주는 음식이었다. 동시에 무거운 우울을 풀어헤쳤기에 무거운 분위기를 과감히 흔들어놓아 위로와 위로를 통하게 하는 금단의 음식에 비견될 음식이었다.


 공상을 마치면서 약간의 우울감에 혀 끝이 시렸다. 만약 개인이 자신의 슬픔을 온전히 소화하고, 죽은 사람에 대해 온전히 질문할 수 있던 사회였다면 나의 장례식은 치킨파티보다는 육개장 파티로 치러질지도 몰랐다. 죽음을 통해 화기애애하지 않아도 됐다면 내 죽음은 꽤 엄숙하고 근엄하고 진지한 채, 모두 표정이 일그러지고 슬퍼진 채로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중요한 사람도 아니거니와 사회 역시도 슬픔보다는 8만 원의 일급과 생존이 중요시되는 사회로 넘어간 것을 어떻게 하나. 우연히 대한민국에 던져졌다 사라지는 일반 민중이 효율을 이길만한 슬픔을 기대하는 건 사치일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장례식에 치킨파티를 넣어보기로 한다. 쓰다 보니 대의명분이 덕지덕지 발린, 별 같잖은 소리를 하고 앉아있는 모습처럼 보이겠다만 사실 별건 아니다. 내 죽음은 대의명분을 녹여낼 힘도 없고, 그럴만한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잘 알기 때문에 치킨파티를 열고자 하는 목적은 다음과 같다. 나는 치킨파티에 두 가지 마음을 가진다. 먼저는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둘째는 나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아줬으면 하는 두 가지 마음을 가진다.


 이와 같은 이유를 근거로 처음 말씀드린 대로 난 장례식에 치킨파티를 열 예정이다. 내가 만약 죽는다면 독자 여러분도 와서 한 입씩 거드셨으면 좋겠다. 물론 파티하면 신나는 음악이지만 가나의 독특한 장례문화와는 다르게 EDM은 아직 한국적 분위기와 멀어 보이니까 파티라고 해서 EDM은 기대하지 않아줬으면 한다. 와서 닭다리 하나씩 뜯어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 의미를 아시는 여러분으로 인해 장례식이 조금 더 화기애애 해질지도 모르니까. 물론 조의금 대신 제 이야기 좀 많이 해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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