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몬 베유 Sep 07. 2021

아날로그 시대에선 메시지옆 숫자 1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날로그 세대만 누릴 수 있는 행복.

 아날로그 시대에선 ‘메시지 옆 숫자 1’이 사라지지 않았다.


 혹시 동네 놀이터에서 친구를 기다리던 추억을 가지고 있는가. 요즘 아이들은 놀이터나 운동장으로 나가지 않는다. 줌에서 친구를 기다린다. 이는 코로나 비대면 시대를 맞이한 탓이기도 하지만 요즘 친구들은 줌으로 만나 수다를 떤다. 그러면 사람은 어떻게 부르냐고? 친구 개개인에게 연락하는 모습은 친구네 집 앞에 가서 ‘누구야~ 놀자’하고 부르던 기억, 집에 전화를 걸어 ‘혹시 누구누구 있어요.’ 하던 기억은 이제 넣어두기로 하자. 그 친구들은 페메와 카카오톡으로 언제 오냐고 재촉하고, 인스타그램 DM으로 빨리 오라며 친구를 불러 모은다. 


 하긴 야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이제 아빠나 엄마를 통해 친구를 찾는 상황은 사라졌다. 매 번 누구 있냐고 물어보면 수화기 너머에선 친구의 어머니나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은 친구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자연스럽게 알게 되고, 통성명도 하고, 실제로 만나면 ‘아 너가 누구누구구나’ 하는 모습이 90년대 중반에 태어난 사람까지만 해도 존재했다. 거기서 전화를 건 자신은 괜스레 부담스럽고, 뻘쭘하고, 긴장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다이렉트 메시지라는 이름처럼 직접 메시지를 보낸다. "야, 나와"하고는. 


 과거와 현재, 각 시대마다 행복이 존재한다. 줌으로 친구들을 만나는 2021년에는 빠르고, 편하고, 간편하게 만날 수 있는 행복이 있다. 적어도 스마트폰이 보급된 세대는 밖에 나가서 친구를 기다리지도 않고, 부모를 한 번 거쳐야 하는 수고스럽고 부담되는 일을 겪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행복은 빠르고 간편한 속도에서 온다. 속도가 빠르니까 좋아하는 친구를 빨리 만날 수 있고, 또 빨리 헤어지고 자신의 일에 집중할 수도 있다.


 반대로 아날로그 시대는 기다림의 행복이 있었다. 혹시 공중전화 박스에서 수화기를 붙잡고 있던 기억이 있으실까. 아날로그 시대에선 상대를 기다렸다. 놀이터에 나가서도 기다리고, 약속을 잡고 상대가 오지 않으면 하염없이 기다렸다. 아, 무엇보다 문자를 기다리고, 전화를 기다리고, 연락을 기다렸다.(나보다 더 전세대들은 삐삐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 기다림 속에서 우린 설렘과 기대와 때론 실망과 슬픔을 쌓아나갔다. ‘은실이 방금 밖에 나갔다.’는 말을 들으면, ‘이제 곧 친구가 오겠구나.’ 설레 하면서, 그러나 '친구가 곧장 나타나지 않으면 다른 무리로 갔으면 어쩔까' 전전긍긍하면서 혹은 상대 편의 부모가 나를 탐탁지 않아하면 연락할 방도도 없는 채로 그 친구가 자주 출몰하는 도서관이나 빵집이나 민들레 영토를 기웃거리면서 우리는 기다렸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빠르지도 않고 효율적이지도 못했다. 약속이 엇나가면 하염없이 약속 장소에서 기다려야헸고, 시시각각 연락하지 못해 공중전화를 붙잡아야 하는 일이 일어났다. 돈이라도 없는 날엔 콜렉트콜로 전화를 걸어서 상대방에게 양해를 구해야만 전화가 연결됐다. 그뿐일까. 연락이 닿지 않으면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초조함을 견뎌야 했다. 만약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초조함을 넘어서 슬픔, 아픔, 긴장 등을 기다림의 자리에서 소화했다.


 하지만 지금이 좋은가. 주변 친구들과 이야기해보면 비효율적이고 전전긍긍하던 그때가 더 좋았다고 평가한다. 아날로그 세대는 효율과 속도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 모든 감정을 느끼며 상대를 기다렸다. 현재에 주어진 정보와 속도에 발맞춰 살아가며 자족했다. 친구가 오면 오는 대로, 오지 않으면 오지 않는 대로 자신의 속도에 맞춰서 흘러갔다.


 하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는 어떤 빠른 속도가 기준점인 것만 같다. 줌 모임에 10분 정도만 늦어도 메시지가 울린다. 메시지를 읽지 않으면 닦달을 시작한다. 더 나아가서 카카오톡을 하루 정도만 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페이스북 메시지를 몇 시간 읽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몇몇 사람들은 실망감에 빠진다. 물론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몇 시간 만에 답장이 왔는지가 인간관계의 척도가 되고 접속 중임에도 답장을 하지 않으면 나에게 별 관심이 없다는 것으로 판단된다.


 여기에 카톡은 상대가 읽었는지 읽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기능까지 지원한다. 인스타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페메는 상대가 접속 중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기능이 포함되어있다. 이러면 기다림은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다. 나와 상대 모두 읽고 싶지 않아도 읽어야 하고, 답하고 싶지 않아도 답해야 한다. 답장하기 싫은 상대방에게 온 메시지를 실수로 눌러 카카오톡 메시지 옆 1이 사라지는 순간… 우린 허둥대기 시작한다.


 답장하기 싫다는 방향과 다르게, 답장을 신중하게 하기 위해서 읽지 않은 메시지도 읽게 되면 사단이 난다.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해서 컨디션이 좋을 때 답장하고자 밀어놓고 있었는데, 아뿔싸 채팅방을 누르고 말아 버리면 우린 상대방에게 자친 실수할까 봐 혼란에 빠져버린다. 속도, 속도가 이걸 망쳐버렸다. 단 10년 만에 사회는 빛의 속도로 기준치를 바꿨고 읽은 즉시 답장해야 하는 그 보이지 않는 속도는 우릴 혼란에 빠뜨려버렸다.


 요즘 아이들이 기다림의 아름다움을 몰라서 재촉한다고 한다면 꼰대 같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와이파이 없음. TV 없음. 저녁 6시 이후로 핸드폰 금지.’라고 적어놓고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신 사장님의 말은 아이들이 기다림의 아름다움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주장에 찬성표를 던져준다.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은 그렇게 3일만 지나면 부모와 대화를 시작하고, 불을 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고, 그간 꺼내지 못한 이야기를 꺼낸다고 했다. 서로의 이야기 속에서 숲을 통과하고 나무를 보면 부모세대는 다시 사람의 속도에 발맞추던 속도를 떠올리고, 아이들은 사람의 속도에 발맞춰 갈 때 보이는 아름다움을 깨닫는 시간을 경험한다고 했다.


  아날로그 시대에선 ‘메시지 옆 숫자 1’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 시대를 통과한 사람들은 속도에 얽매이지 않던 순간을 기억한다. 속도와 효율에 반대해서 기다림을 포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날로그 세대는 진실로 문자가 오기까지 설레던 미묘한 아름다움과 카카오톡으로 ‘어디까지 왔니?’라고 묻지 않던 선선함을 경험했다.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전까지 인간은 한 사람의 감정을 기다렸고, 스스로의 감정을 살폈고, 감정이 찾아오는 속도에 자족하며 살았다. 그리하여 한 사람이 가지는 감정의 속도들을 알아갔다.


  관찰해보면 나보다 더 윗 세대들은 감정의 속도에 대해 더 잘 이해하는 것 같다. 그들은 세상이 돌아가는 속도에 비해 인간이 얼마나 무심하고, 느리고, 차분하고, 더딘지 안다. 그것은 시간을 통해 많은 인간을 경험한 탓도 있겠지만 그들이 디지털의 빠른 속도보다는 인간과 인간이 관계 맺는 아날로그 속도 속에서 많이 산 이유도 있을 것이다. 


 디지털 시대로 넘어오며 인간이 놓친 것은 속도의 자족일지도 모른다. 우린 너무 빠르다. 이젠 설렘도 느끼기 전에 띄어쓰기 없이 ‘어디까지 왔어?’라고 카톡을 보낸다. 1분, 2분이 늦으면 핸드폰만 쳐다본다. 10분, 20분이 늦으면 전화를 수십 통 건다. 과거, 혹시나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 공중전화 박스로 가서 맘 졸이면서 전화하던 장면은 없다. 오히려 내 안에는 냉정함이 남는다. ‘감히 내 시간을 빼앗다니.’하는 냉정함이. 


 이젠 아이들조차 줌으로 빠르게 모여 빠르게 흩어지는 시점에서 기다림의 아름다움을 경험한다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빠르게 흘러가고, 전화하는 시간도 참지 못해서 카카오톡과 DM으로 감정을 전달한다. 여기서 기다림의 행복을 찾는다는 건, 곧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상대방과 내 감정을 충분히 느껴 충만해지는 건 어렵다. 시시각각 주고받는 정보는 감정을 포착할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아날로그 시대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이 회복시킬 수 있는 행복은 기다림의 아름다움이 아닐까. 아날로그 시대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은 문자가 오기 전까지의 미묘한 긴장을 느껴본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은 기다림의 아름다움을 안다. 속도가 빨라졌어도 몸속에서는 신체적인 습관이 남아 아재로 놀림받는 이모티콘을 보내고, 문자로 꽃을 놓고, 산과 바다를 프로필 사진으로 꾸며 놓는다. 그 느린 것들을 디지털 세계에 수놓는다. 누가 그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다고 '요즘 것들은 기다림의 미학을 몰라.' 같은 꼰대 같은 발언은 삼가주었으면 좋겠다. 다만 아날로그 시대를 살다온 사람들에게는 기다림의 아름다움이 마음속에 숨겨져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다. 그 아름다움은 아직 건재히 남아서 이모티콘과 사진들 속에, 인간관계와 현실을 바라보는 눈 속에 살아 숨 쉰다. 그래서 프로필 사진의 산과 바다로 교차한다. 


 그러니 ‘적어도 그들은 기다림의 아름다움을 누리지 못한다.' 기다림의 아름다움 누리도록 하자. 그리고 가능하다면 천천히 흘러가는 것에도 나름대로의 행복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도록 하자. 날로그 세대, 그들은 기다림의 묘미를 안다. 그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 같은 아름다움을 아날로그 세대는 가지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카톡프사'들이 점점 비슷해진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