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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몬 베유 May 12. 2024

이토록 다른 모양의 사랑 (1)

베를린에서 보고 온 사랑 

(어느 정도의 각색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토록 다양한 모양의 사랑


밍밍함의 맛. 건강해지는 맛. 나는 설렁탕을 이토록 정의한다. “간을 안 해서 먹어요?” 그러므로 내가 설렁탕을 다른 사람과 먹으면 종종 듣는 질문이다. 건강을 챙기려는 목적이 아니라, 설렁탕 본연의 맛이 거기 있다고 생각하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자취방 냉장고를 열어보면 맵고, 짜고, 단 음식들이 냉장고를 빽뺵히 채우고 있다. 설렁탕의 하얀 국물과는 대비되는 마음 가짐으로. 색깔도 형형색색으로.


존경하는 진은영 시인은 자신이 고른 일곱 개의 단어에 대해 나름대로 느낀 정의를 적어 놓는다. 거기에 담긴 언어는 ‘봄’, ‘슬픔’, ‘자본주의’, ‘문학’, ‘시인의 독백’ , 혁명’, ‘시’ 다. 아쉽게도 ‘사랑’은 시 안에 주어지지 않았지만 나에게 있어서 사랑을 스스로 정의해 본다면 거기 꼭 들어갈 단어는 ‘건강함’ 또는 밍밍함이다. 


환승연애, 솔로지옥등이 성공을 이룬 현시대에 밍밍함이 중심이 되는 사랑에 대한 정의는 조금 이질적일지도 모른다. 아마 이 프로그램을 보고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자신의 사전 안 ‘사랑’에 대한 속성에 밍밍함이나 건강함보단 ‘정신이 번쩍 들 정도의 달콤함’ 이라던가, ‘왜 지금까지 이 맛을 모르고 살아왔지 하는 자극’ 등이 써져 있을지도 모른다. 마치 퇴근 후 열어보는 나의 냉장고에 섞여 있는 혹은 내 냉장고와 비교가 되지 않는 최상의 조합으로 일궈낸 단짠 조합이 그들의 ‘사랑’의 정의에 부합할지도 모른다.


아쉽게도 내가 다루고자 하는 사랑의 모양은 밍밍함과 건강함의 맛에 가깝다. 그러므로 내 사랑은 자극적이거나 중독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평양냉면과 설렁탕이 오래 살아남고, 가끔은 ‘힙’ 해지는 지금의 트렌드로 볼 때 내 사랑의 맛은 의미가 없지는 않다고 느껴진다. 베를린 향 육수를 담가 길게 우려낸 사랑이라고 칭하기도 뭐 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사랑에 가까웠던 것들을, 그럼에도 이런 모양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한 번쯤 다뤄보고자 한다.


13일의 휴가를 받는다면 당신은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13일의 휴가를 받는다면 당신은 어디로 향하고 싶은가? 갑작스레 찾아온 뜬금없는 기회들은 우리를 복잡하게 만든다. 어느 날 로또 2등이 당첨된다던가, 갑작스레 교보문고 100만 원 상품권에 당첨된다던가 하는 일들에 우리에겐 매뉴얼이 없는 것도 같다. 차라리 1등이거나, 차라리 회사에서 잘리거나, 차라리 퇴근시간이 영영 1시간 일찍 된다던가 하는 반복적이면서도 어느 정도 한 번쯤 상상해 보고 플랜을 세워봤던 일이라면 우리는 빠르게 적응하고 반응할 수 있다. 일단 로또 1등이라면 회사를 때려치우고 생각해 본다던가, 회사에서 잘린다면 바로 일자리를 알아본다던가 등이다.


하지만 애매한 것은 우리를 좀 더 복잡하게 만든다. 바로 13일의 휴가가 그랬다. 회사일을 최대한 돕다 보니 선거일을 전후로 휴가를 붙이면 13일 정도의 휴가 일정이 가능했다. 또 받은 휴가는 4월 중순까지 사용해야 했던 터라, 나는 특유의 애매모호함 속에서 고민했다. 13일. 비행기를 빼면 10-11일 정도. 콘텐츠가 많은 한 도시에 충분히 머물 수 있는 시간이라고 판단했을 때 두 도시가 떠올랐다. 뉴욕, 베를린, 파리. 이 세 도시라면 충분히 오래 머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파리는 한 번 다녀왔으므로 쉽게 리스트에서 지워졌다. 남은 건 베를린과 뉴욕이었다. 뉴욕은 좀 더 세상을 멀리 내다볼 수 있다는 관점에서 베를린은 자유와 선진 문화가 함께 있다는 장점에서 나는 고민을 시작했다-라고 그 당시엔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베를린을 후보지에 넣던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던 것 같다. 바로 가벼움과 무거움이 공존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


베를린은 이집트 유물이 있는 박물관부터 홀로코스트 기념관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클럽이 있었다. 나에겐 작 년 제주도 여행 중 스스로 발견한 특이점이 있었는데, 그건 전날 열심히 파티하고 다음 날 차분하게 카페에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는 속도감이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참으로 인간이 신기하다 싶으면서도, 자신을 들여다보면 전날 파티에서도 배울 점과 독특함을 발견해 스스로 이어나갔다. 아 그래. 나는 이런 걸 할 수 있구나- 싶어서는 마음이 베를린으로 점점 기울고 있었다. 모든 공간의, 모든 감정의 속도를, 그리고 거기서 이어지는 연결점들을 보고 싶었다. 감정적 속도의 자유 역시 자신을 사랑하는 점임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회사 내 해외투어 팀 총괄분과 이야기를 나누며 ‘뉴욕은 역사가 짧아 근본 없는 곳’이라는 장난기 가득한 대사를 가지고 나오며 나는 베를린행 티켓을 끊었다. 박물관. 홀로코스트 기념관. 클럽. 그라피티. 지역문화. 벼룩시장. 베를린이었다.


당신은 나와 처음 춤춰준 사람이에요. 정말 고마워요.


베를린에서 어떤 사랑을 보고 왔는가-라고 말한다면 아직도 잊히지 않는 하나의 장면이 있다. 휠체어가 힙한 공간. 자신의 색깔로 춤출 수 있는 공간. 자유가 자유로써 빛을 드러내는 공간이 여행 이후에도 길게 남아 잊히지 않는다. 어느 휠체어를 탄 남성이 번역기를 돌려 “당신은 나와 처음 춤춰준 사람이에요. 정말 고마워요.”라고 보여준 장면, 그 장면은 어떤 의미였을까.


이 장면을 설명하기 위해선 나름대로의 맥락이 필요하다. 첫 번째는 한국에서의 맥락이다. 한국의 클럽이나 파티문화에서는 아무래도 남녀가 서로에게 호감을 표출하려는 목적이 큰 것 같다. (많이 경험한 건 아니지만 대부분 그런 것 같다.) 제주도 파티나 이전에 갔던 클럽에서 느꼈던 건 ‘음악과 흥에 진심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제주도에 파티에 취했다가 다음 날 정리했던 느낌에는 분명 ‘음악과 흥에 진심이 아니다’라는 애매모호한 낯선 느낌이 있었다. 물론 전부가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매력 어필과 흥이 혼잡한 그 느낌이 머리보단 감정을 혼잡스럽게 했다.


두 번째는 베를린의 맥락이었다. 도시에는 장애인이 한국보다 많이 보였다. 동양인에겐 ‘독일어가 편해요? 영어가 편해요?’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물어줬다. 관광지로써 마냥 유명한 공간이 아님에도, 다름에 대해 인정하는 법, 대화하는 법, 배려하는 법이 익숙해 보였다. 내 착각일 수 있지만 단순 서비스에서 오는 배려나 친절함은 분명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자유에 대한 낯 섬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에게 자유는 낯선 것이었다. 욕망을 솔직히 드러내고, 춤을 추고, 그런 공간에 있으면 나는 파괴적으로 변한다는 어떤 두려움이 있었다. 최소한 나에게 자유는 두려운 어떤 것이었다. 최소한 나는 사람의 욕망은 나쁘기 때문에 법과 울타리가 그것을 구속한다고 배웠으며, 나 역시도 어느샌가 나를 자유로운 공간에 놓아두었을 때 나도 악마가 된다는 그런 두려움을 안고 살았다.


그러므로 나의 클럽에 대한 선입견은 별로 좋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음악에 진심이지 않은 사람들이 있고, 나를 자유롭게 풀어놓아 이기적으로 변할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그러나 내가 그곳에서 본건 다름 아닌 장애’조차’ 힙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었다. 장애인도 편견과 차별 없이 다닐 수 없는 베를린에서, 사람들이 음악에 진심으로써, 자신이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에 휠체어를 무대 중간으로 올려줬다. 그리고 춤을 췄다. 춤. 몸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자유로운 몸짓. 휠체어로만 출 수 있는 춤을 췄다. 그리고 그는 영어 번역기를 스마트폰으로 켜, 자신과 함께 춤춰준 사람에게 이렇게 적어줬다. “당신은 나와 처음 춤춰준 사람이에요. 정말 고마워요.”라고.


물론 거기엔 노인도, 라틴 아메리카 사람도, 흑인도 있었다. 한 가지 간과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들 모두 클럽에 입장했다-는 사실이었다. 소위 말해 입뺀 당하지 않은 그들은 클럽 안에서 춤을 출 수 있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음악에 진심인 라틴 아메리카인 세 명이 나를 편견 없이 끌고 가 계속 춤추자며 쉬고 있던 나를 끌고 가거나 무작정 모르는 친구가 나와 스탭을 맞추는 일들도 비일비재했다. 자유. 나는 그 순간을 통과하며 자유가 어느 정도 친숙해졌던 것 같다.


그 순간만큼 법과 룰은 나의 욕망을 누르는 숨 쉴 수 없는 압박이 아닌, 나의 자유와 상대의 자유를 마음껏 펼치게 만들 수 있는 허용된 울타리가 되어 줬다. 그 자유 속에서 생전 처음 보는 라틴 아메리카인과 발을 맞췄고, 서로 안부를 나눴고, 춤을 잘 춘다는 칭찬을 나눴다. 휠체어의 춤과 노인의 춤과 그들이 어우르는 어떤 멋짐을 엿보고 왔다. 사랑에 대한 개념이 다시 쓰였다. 상상보다 몇 발 앞선 현실의 장면으로. 내가 다음 날 향한 곳은 나치박물관(공포의 지형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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