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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관 Jul 17. 2023

호주에서 맨땅에 헤딩하기

나의 호주 생존기

1987년 10월 4일은 나에겐 특별한 날입니다.

 36년 전 내가 호주행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을 떠나 22시간 만에 호주 시드니 공항에 도착한 날이거든요.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지요. 어쩌면 그날부터 내 인생은 노마드의 삶이 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끊임없이 더 푸른 초지를 찾아 새로운 길을 개척하며 살아왔고 오늘도 여전히 유목 중입니다.


86년도에 군대를 병장으로 제대하고 고심한 후 대학에 복학하는 것을 포기하고 호주 유학을 결심하고 1년간 준비한 후 생애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호주로 오게 된 겁니다. 미국이 아니고 호주를 택한 것은 돈이 없어도 호주에서는 유학생도 합법적으로 일을 할 수 있어서 돈을 벌면서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정보를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군 전역 후 20개월 정도 형님이 운영하던 체육관에서 사범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토플 공부도 병행했었죠. 수없이 많은 토플 시험을 보았고 1년 후 점수를 겨우 받아서 호주 대학으로부터 조건부 입학허가서를 받을 수 있었고, 이것으로 여권을 신청해서 첫 여권을 받고 6개월 호주비자를 받았었지요. 그동안 모은 돈으로 3개월 어학연수비 1백만 원과 편도 항공료 50만 원 그리고 유학원 알선료로 60만 원을 지불하였었답니다. 그리고 호주행 비행기를 탔을 때 내가 가진 돈은, 도로에서 생선장사를 하시던 어머니가 친구분들께 빌려 주신 1백만 원과 ROTC복무 중이던 친구가 쥐어준 30만 원이 전부였지요.


시드니 공항에 도착해 마중 나온 분이 데려다준 곳은 시내에서 기차 타고 1시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한국 아저씨가 혼자 운영하던 하숙집이었습니다. 조그만 집에 17명이 있었고 한방에 5-6명씩 잤는데 이불도 베개도 제공되지 않았었죠. 아직 쌀쌀한 날씨였지만 카펫이 깔린 맨바닥에서 한국에서 가져온 카시미론 이불을 덮고 4리터 박스와인 봉지에 바람을 넣어 베고 잤었더랍니다.


일주일에 하숙비 70불씩 주면서 영어학교를 2개월 다니고 나니 가지고 온 생활비가 반으로 줄었고 누구한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걸 아는 나는 불안했지요. 특별한 기술이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몸으로 때우는 일뿐이었고요. 처음에는 시드니에서 일을 찾아보았답니다. 처음 1주일은 한국 사람이 식당을 만드는 일을 돕는 노가다 시다 일이었는데 시급으로 4불을 주더군요. 당시 최저 시급이 8불이었지만요. 그래서 그 일을 그만두면서 앞으로는 한국인 밑에서 일은 하지 않기로 결심했죠. 그리고 커미션 베이스로 집을 방문해 오일 페인팅 그림을 파는 일을 1주일 했는데, 5일은 공치고 한 사람에게 68불어치 판 게 다여서 이 일도 그만두었더랬습니다. 그리고 87년 12월 성탄절 다음날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찾아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가방 하나 챙겨 시드니 숙소를 나서서 농장이 있다고 하는 Orange라는 타운을 향해 가는 기차를 무작정 탔었답니다. 당시엔 워킹할라데이란 제도도 없었고 관광비자도 한국에선 받을 수 없던 때라 정보도 없었는데 소문만 듣고 갔던 겁니다.


시드니 센츄럴 역에서 출발해 5시간 후쯤 오렌지에 도착해 기차역 옆에 있던 Pub 위층의 낡은 호텔방을 1주에 $50 주고 얻은 후 다음날 시내 자전거 대여점에서 기어도 없는 자전거를 1주에 $20 주고 랜트해 농장을 찾아 나가 보았지요.


자전거로 한참을 타고 타운 밖으로 나가 보니 체리 농장이 있어서 무작정 들어가 주인에게 체리를 딸 수 있겠냐고 물었더니 경험이 있냐고 해서 있다 했지요. 그럼 끝물이지만 남은 거라도 따 보라고 해서, 체리를 하나도 먹지 않고 하루 종일 땄더니 1킬로에 45센트씩 쳐서 45불 주더군요. 그것도 다음날 하루 더 따니 더 딸 게 없었습니다. 암튼 80불 정도 벌었으니 일주일은 먹고살겠다는 생각이 들어 뿌듯했었지요. 그런데 체리를 땄던 경험이 없어 손가락 힘으로만 아래로 잡아당겨 따다 보니 집게손가락 마디가 욱신거렸습니다. 위 쪽으로 젖혀서 꺾어 따야 한다는 걸 경험이 없어서 그땐 몰랐던 거죠.


다음날엔 정부에서 운영하는 Job centre에 가서 과일 따기 일을 구한다고 접수했더니 사과 따는 농장을 소개해주더군요. 그런데 농장까지 거리가 자전거로 두 시간이나 걸려 일하기를 포기해야 했는데, 배가 고파 식품점에 라면 하나 사러 갔다가 잡센터에서 보았던 한 호주인 남자를 만났답니다. 이 친구에게 그 농장을 소개해 주고 그 친구 차를 얻어 타고 사과를 솎아내는(thinning) 일을 할 수 있었지요. 그리고 처음으로 제대로 된 시급 $8씩 받으며 하루에 8시간씩 일을 해서 주 5일에 세금 떼고 $250 정도 받았답니다. 당시의 한국 임금보단 3배 정도였지요. 경험이 없는 농장 일을 일주일 정도 하다 보니 호주의 작열하는 태양에 얼굴은 그을러 아프리카인처럼 까맣게 탔고 나도 모르게 코에선 코피가 터지더군요. 하지만 일이 힘든 것보단 이 농장 일도 곧 끝날 것 같다는 것이 걱정이었답니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호주 농장 체험은 평생 추억으로 남아 있고 지금도 일이 없으면 언제라도 다시 농장에서 일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요. 삶은 끊임없는 도전의 연속이니 언제든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하니까요.


지난 온 시간을 회상하다 보니 할 얘기가 너무 많지만 계속하다간 꼰대의 랏떼이야기가 끝없이 계속될성싶어 이만 하겠습니다. 암튼 이렇게 시작된 호주에서의 삶은 생존을 위해 맨땅에 헤딩하는 것이었고 수많은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났고 지금도 어느 길 위에서 돈을 벌면서 살아가고 있지요. 그런데 그 길에서 만난 행운이 수도 없이 많아 나 혼자 외롭게 걷던 길에 열한 명의 가족이 생겼고 비록 은행론이 있지만 번듯한 집도 하나 있고 흙 장난할 만큼의 5 에이커(6천평)의 땅도 생겼답니다. 뒤돌아보니 모두가 꿈같고 기적 같습니다.


60이 되었지만 아직 경제적 자유를 완전히 이루지 못한 오늘도 생존을 위해 집을 떠나 어느 한적한 시골 타운에서 홀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맨손으로 혼자 호주 땅에 와서 이만큼 살아냈으니 참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아직도 할 일이 있고 이루고자 하는 꿈이 있으니 또 얼마나 좋습니까. 당신에게도 행운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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