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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관 Jul 21. 2022

내 제2의 조국 호주

호주 생활 35년 회고

코비드로 인해 지난 2년 동안은 퀸스랜드주를 벗어나지 못하다가 올해 3월에 드디어 주 경계가 풀려 다시 호주 전역을 누비며 일할 수 있게 되었다. 2020년 3월 뉴질랜드에서 일하던 중 갑작스러운 록다운으로 브리즈번 집으로 돌아온 후 정확히 2년 만에 다시 호주 전역을 여행하며 일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올해는 특히 내 나이가 60이 되는 해다. 여행하면서 내 인생의 지난 60년을 돌아보고 앞으로 남은 인생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해로 보내야겠다.


지난 10년 동안은 아내와 함께 여행을 하면서 일을 했었기에 큰 걱정 없이 지내 왔었지만, 이번엔 아내가 딸의 산후조리를 해 주어야 해서 나 혼자 먼 길을 운전하다 보니 약간 긴장이 되었다. 혹시 차에 문제가 생긴다던지 길에서 사고라도 난다면 누구의 도움도 없이 나 혼자서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문득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시골 외딴길을 운전하여 가다가 혹 사고로 목숨을 잃을 경우를 대비해 가족들에게 마지막 말이라도 남겨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내 핸드폰을 셀카 모드로 누르고 가족들에게 남길 유언 같은 말을 혼자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남기는 마지막 말을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울컥해지면서 고국을 떠나 호주에서 살아왔던 지난날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서 펼쳐졌다.


 35년 전 스물다섯 살 나이에 어머니가 길가에서 생선 장사를 하시면서 마련해 주신 1백만 원을 여행자 수표로 바꿔서 생애 처음 비행기를 타고 낯선 땅 호주에 도착한 후, 난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듯 많은 일들을 시도했고 실패도 하고 성공도 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만들어 걸어왔다. 오늘 여행을 떠나며 다시 지나온 호주 생활들을 돌아보니 지난 모든 일들이 잠시 전의 일처럼 기억에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내가 호주에 온 것이 내 생애의 최고의 선택이었고 가장 큰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내 제2의 조국이 되어준 호주에게 감사한 마음이 크게 밀려온다.


2개월 어학연수 후 혼자 농장을 찾아가 3개월 동안 일을 한 후 가전제품 생산하는 공장에 들어가 일을 할 때 처음으로 호주가 노동자의 천국임을 체험할 수 있었다. 주 5일을 일하지만 4주에 한 번씩 하루 휴가가 있었고 일 년에 4주의 유급 휴가를 주었으며 일 년에 1주일은 유급 병가를 사용할 수 있었고 사용하지 않고 남은 날은 추가 휴가로 쳐 주었다. 공장의 일부가 폐쇄되었을 때 다른 도시의 공장으로 옮기길 원하는 사람을 지원받아 여행 경비며 모텔 숙박비와 심지어 식사비와 술까지 모든 경비를 지급했으며 그렇게 3주간 지내본 후 그곳에 있을 것인지 다시 돌아올 것인지를 선택하도록 했었다. 단순 조립공에게 이런 모든 혜택을 주는 것을 경험하며 호주의 높은 노동자 인권에 감동했었다.  


공장에서 3개월 후에 정규직으로 전환되었고 공장 다니며 6개월간 저축한 돈으로 주택담보 대출이 가능한지 은행을 찾아가 문의하였는데 지점장이 친절하게 설명해 준 후 은행 문 앞까지 나와 나를 배웅해 주었고, 집 값의 95프로를 대출받아 방 2개짜리 작은 빌라를 구입할 수 있었다. 정말 사람을 최고로 대우해 주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았었다.


공장에서 1년 반 동안 다니면서 야간엔 TAFE College에서 공부했었고 주말엔 도서관 시청각 실에서 나 혼자 영어학습 비디오를 보면서 80여 개의 비디오를 몇 개월에 걸쳐 마스터했었다. 그런데 어느 땐 그 좋은 도서관에 나 혼자 하루종일 이용한 후 문 닫는 시간에 나올 때도 있었는데 나 만을 위해 큰 도서관을 열어 시원한 에어컨을 틀어주고 직원까지 근무하는 것 같아  좀 미안한 생각까지 들었었다. 그리고 다시 대학에 들어가 공부할 때는 처음엔 한 슈퍼마켓 청소를 새벽에 하면서 학교를 다녔는데, 얼마 후에는 주위 여러 슈퍼마켓의 청소권을 따서 사업을 했었다. 내가 젊은 동양인이라고 해서 어떤 차별도 주지 않고 기꺼이 나에게 슈퍼마켓 청소 용역을 맡겨 주었었다. 그래서 대학을 다니면서도 9명의 직원을 채용하여 청소와 트롤리 사업을 하여서 매주 상당한 돈을 벌어 저축할 수  있었고 대학 졸업 후 내가 모든 경비를 지불하여 한국에서 내 결혼식을 치를 수 있었다.


대학 졸업 후엔 시드니에서 한국인들을 상대로 하는 유학원 운영과 한국에서 영어강의와 영어학원 운영을 하다가 다시 브리즈번으로 와서 주간지 사업과 민박과 정착 서비스 사업 등을 하면서 한동안 잊고 살았던 호주인들에 대한 고마운 생각이 2011년부터 혁필 사업을 하면서 다시 떠 올랐다. 그림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서예를 잘하는 것도 아닌 내 글씨를 어메이징 하다고 감탄하며 때론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다고 사줄 땐 내가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실 10년을 했어도 매번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오고 누가 이런 나의 미천한 그림 글씨를 좋아해 줄까 자신감이 없지만 꼭 누군가는 다가와 하나둘씩 사 줄 때 마음속으로 매번 '감사합니다'를 하루에도 몇 번이고 되뇌게 된다.


이제 더 이상 내 그림을 아무도 사주지 않는다 해도 그동안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은혜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작년부터는 일하러 갈 때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고 그저 감사만 하자'라고  'Expect nothing, Appreciate everything.'을 조용히 입술로 되네이며 마지막 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하루 일을 시작 한다. 많은 돈을 벌게 되기를 기대하면 기대에 못 미쳤을 때 실망하게 되니 그저 한 사람이라도 내 그림을 좋아해 주면 기적을 본 것처럼 감사하게 되니 그저 감사할 뿐이다.


이번 여행을 출발하기 전, 1년 전에 구입한 킹가로이 농장에 창고를 하나 지어서 완성된 것을 보고 왔는데, 비록 번듯한 집도 아니고 창고 하나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며 또 참 많이 감사했었다. 맨손으로 호주 땅에 왔는데 집도 있고 땅도 있다니 그동안 내가 수고한 것보다 백배는 더 많은 것들로 나에게 베풀어준 내 제2의 조국 호주가 너무 감사할 뿐이다. 앞으로 나이가 더 들어 내가 노인연금을 받을 수 있는 때가 온다고 해도, 난 내 힘으로 일하여 세금을 내면서 호주 국가에 보탬이 되는 삶을 살아야겠다란 생각을 하며 오늘도 내 마음을 단단히 다 잡으며 또 길을 떠난다.


5에이커 땅에 감나무와 매실나무 심어놓고 창고도 지어놓은 킹가로이 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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