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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름 May 22. 2024

[사랑에 관한 에세이] 5 - 밀어주기

말들이 밀어주는 사랑

2018년의 나는 열심히 데이팅앱을 돌리고 있었다. 데이팅앱은 처음에야 신기하고 재미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를 대체 가능한 사람으로 대하고, 또 그렇게 대해지는 경험은 썩 좋은 경험은 아니어서 당시 나는 매우 방어적인 상태였던 것 같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그 이전 관계에서의 상처가 잘 마무리된 것도 아니었다. 



그 사람과는 처음으로 홍대에 있는 한 비건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 그 사람과 어울리지 않는 장소였다. 그 사람은 미국 남부에서 온 흑인이었고, 비거니즘이나 pc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훅 빠지는 것을 경계했던 나는 첫 데이트에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아서 빨리 나갈 수 있도록 오후 약속을 미리 정해 둔 상태였다. 별 기대없이 나갔는데 T는 운동을 열심히 하는 전직 군인이었던 것에 내가 가지고 있던 선입견에 비해 지적이고, 겸손하고, 다정한 사람이었고 항상 내 입장을 잘 배려해줬다. 하루는 예쁘게 보이려고 스타킹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갔더니 오늘은 집에서 놀건데 왜 이렇게 불편하게 입고 왔냐고, 빨리 스웻팬츠를 입으라고 귀엽게 난리를 치던 사람이었다. 그래선지 그와 시간을 보낼 땐 항상 편했다. 어느 날 나는 애인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을 좋아하는터라 아무생각없이 그의 머리카락을 한 번 쓸었는데, 흑인 머리는 동의없이 만지면 안된다는 말을 아주 부드럽게 해줬다. 나는 미숙한데가 있어서 대체로 거절을 아주 잘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인데도, 그게 그렇게 민망하거나 속상하게 기억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성숙하고 사려깊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이후로 몇 달간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대체로 너무 빠질 것을 두려워하는 나와, 그렇게 반만 발을 걸치는 상대에 대해 너무 확신이 없었던 그의 조합이 크게 변하진 않았던 것 같다.



당시의 내가 느끼기에는 그가 나의 바운더리를 너무 침해하는 것 같았다. 그는 평택에 살고 있었는데 나는 그렇게까지 멀리 기차를 타면서까지 데이트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가 너무 자주 만나고 싶어했다 느껴졌다. 한번은 내가 친구들과 오키나와에 놀러간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자기도 긴 휴가 중이라 오키나와에 갈 수 있었는데 은근히 초대해 줬으면 하는 눈치였던 것 같았다. 그때의 나에겐 씨알도 안 먹힐 일이었다. 그럼 인천공항으로 입국하니 데리러 나와주겠냐고 슬쩍 떠봤더니, 뛸 듯이 기뻐하면서 스케치북에 내 이름, 친구 이름을 모두 써서 마중을 나왔다. 반가워서 활짝 웃으며 뛰어갔더니 더 크게 웃으면서 번쩍 들어올려 안아주는 것이었다. 속으로 정말 유치하네 드라마를 많이 봤나? 생각했고 좀 쑥쓰러웠지만, 사실은 나도 너무 너무 좋았다. 그래도 항상 내 마음을 워워 시키려고 노력했다. 아마 첫사랑에게서 받은 상처가 너무 커서 다시는 그런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너무 컸던 것 같은데, 뭐든지 백프로를 경험하고 싶다면 내가 백프로를 내주어야 된다는 걸 다시 배우기 전이었다.

 


그 사람은 앨라배마에서 컸는데, 미국의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에 질려 나라를 뜬 터였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일하며, 어느 나라가 살기 좋을지를 가늠하고 있었다. 나도 한국을 떠나고 싶었기 때문에 그때 입에 달고 있던 “나는 한국을 뜨고 싶다” 고 말했을 때, “그럼 왜 안 떠나는데?” 라는 질문을 들었다. 그러게? 마땅한 답변을 딱히 찾을 수 없었다. 그 대화 이후로 몇 주간, 몇 달간 생각을 해봤는데도 그랬다. 그래서 떠나기로 했다. 가끔 인생에서는 듣고 싶은 말을 예기치 않은 때에 예상치 못한 사람에게서 듣게 되기도 한다. 그런 말들은 내 심장 근처에 턱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그냥 공명을 일으키며 앉아있다. 내가 그 의미를 알아봐줄 때까지. 



그 사람과 헤어진 이유는 페미니즘 이슈로 인한 작은 논쟁이었다. 미국 남부에서 온 흑인 남자, 나이도 나보다 좀 많던 그 사람과 내 의견이 맞을 리는 없었다. 그날 우리가 정확히 무엇으로 싸웠는지는 기억이 안나는데, 그 이전에 했던 이 논쟁은 기억난다. 그 사람이 어떤 흑인 남자가 자기 엄마에 대해 심한 말을 하는 랩을 하는 컨텐츠 영상을 보고 너무 웃기다고 했는데, 나는 그게 모욕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한국에서 모욕당하는 엄마들과 여자들을 매일 보고, 견뎌야 했던 나에게 그건 당연히 웃기지 않았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대체 어떤 흑인 남자가 자기 엄마한테 그렇게 대들 수 있냐고, 이건 아무도 그럴 수 없고 말이 안되는 거라서 이 컨텐츠가 웃기는 거라고 그랬다. 지금에야 그 논지도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때의 나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나의 첫사랑 생각도 조금은 했던 것 같다. 비슷한 논쟁이 생겼을 때 입 다물고 있던 나에게, 이 논쟁에서 이제 나는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얼핏 스쳤던 것 같다. 예전에 내 첫 남자친구는 어리고 예쁜 여자친구를 성공한 남자들의 트로피같이 대하는 듯한 발언을 종종 하곤 했는데, 내가 그 트로피라는 생각이 들면 뿌듯하고 또 이사람이 떠나지 않을 걸 알아 안심되더라도, 또 마음속 어디선가 여성을 그렇게까지 보지 못하는 그의 태도에 화가 치밀어오르곤 했었다. 그 때는 그 사람을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그리고 논쟁을 하기 안전한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일로 논쟁을 벌일 수 없었다. 미투 운동도 일어나기 전이었다. 나에게는 불쑥 치밀어오르는 화를 정제해 그 기분나쁨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없었다. 그리고 좀 더 나이가 든 지금은, 지금 이 싸움에서는 있었다. 나는 어린 시절의 내가 가졌던 화까지 속시원하게 쏟아부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몇 년이 지나 캐나다에 오게됐다. 나는 솔직히 데이트와 파트너에 대한 기대를 하고 왔는데, 데이트 상황은 내 맘 같지 않았다. 나는 대충 캐나다가 미국이랑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이렇게나 다를 수가 없었다. 나는 농담삼아 미국인은 한국사람같고 캐나다인은 일본사람같다고 하는데 여기엔 진심이 많이 묻어있다. 내가 캐나다 데이트 문화 기준으로 처음부터 너무 직설적으로, 많은 것을 쉐어하기 때문인 것은 같은데, 아직도 정확히 무엇이 문제였는지는 알 수 없다. 캐나다 사람들은 진짜 마음을 잘 말해주지 않는다. 여하튼 좋은 시간을 보낸 것 같았다가도 다시 만나자는 연락이 오지는 않았다. 아마 당시 나의 불안정한 신분 때문에 내가 자신감을 가지기 좀 어려울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실패한 데이트들, 그리고 생각보다 수준 낮은 학과 수업들을 들으며 마음도 외롭고 시간도 많았던 차에 T에게서 장문의 이메일이 왔다. 얼마나 그 때 나에게 특별한 기분을 느꼈었는지에 대해서. 그 글에 담긴 진심이 드디어 와닿았다. 아무도 모르는 추운 나라에서 직장도, 아파트도, 고양이도, 친구도 없던 나에게 내가 하는 일이 용기있고 대단하다고 항상 너가 해낼 걸 알고 있었다고 해주는 그의 말들이 너무 고마웠다. 문자메세지로 다시 대화를 다시 이어가기 시작했고, 그는 캐나다에 몇달 후 온다고 했다. 나는 글쎼, 반반이었던 것 같다. 멀리 있는 사람에게 진심이 있었지만, 그걸 진짜 믿고 마음을 줄 정도로 내 마음에 확신이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내 삶이 바빠지거나 다른 데이트가 좀 잘된다 싶으면 며칠간 연락하지 않았고, 그는 그것을 그냥 넘어가기에는 관계에 진지한 사람이었다. 



이런식으로 관계를 대할거라면 연락하지 않는게 좋겠다는 말을 듣고 연락을 그만두게 됐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났다. 나는 그 이후에 만난, 정말 많이 좋아했던 사람과 헤어져 마음을 크게 다쳤었는데, 그 사람이 날 떠날 때 보였던 회피적인 성향에서 내가 T에게 했던 말들과 태도를 떠올렸다. 견딜 수 없이 사과를 하고 싶어졌다. 몇 년 전 그의 문자들을 다시 보니 사려깊게 나의 장점을 보아줬고, 칭찬해줬고, 감사해했었다. 그는 진심으로 관계를 대했는데, 나는 항상 한 발을 빠져나갈 수 있게 걸치고 있었다. 관계를 이어나갈 수 없다면 진심으로 거절을 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못한 나의 기회주의적인 모습에 실망했고, 그리고 그걸 정확히 반대 방향에서 상처받아야만 알 수 있었던 어리석음에 또 실망했다. 나는 T와 긴 통화를 했다. 내가 좋은 파트너가 아니었던 것에 그는 그렇게까지 상처받지 않았었다며, 괜찮다고 했다. 나는 T에게 사과를 하고 싶었던 걸까? 혹은 나를 떠난 사람에게 사과를 받고 싶었던 걸까?

 


사과는 돌고 도는 것, 인생은 돌고 도는 것이다. 가끔 말이라는 건 항상 맞는 수신자에게 가지 않고 몇년이 지나 상관없는 사람에게 도착하기도 한다. 내가 한 사과는, 내가 받고 싶었던 사과가 있어서였다. 하지만 내가 남을 어떻게 할 수는 없다.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은 나의 말과 행동 뿐이다. 나는 '나'라는 장소에서, 내가 필요했지만 받지 못한 사과를, 내가 잘못했던 사람에게 주면서 적어도 나 혼자만의 선은 바로잡았다. 인생이 주는 힌트들을 잘 읽을 줄 아는 사람만 다음 기회가 왔을 때 잘 낚아챌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웅덩이에 잔뜩 넘어지고 다른 사람에게도 진흙을 튀기며 최선을 다해 일어나고 또 사과를 하며 하루를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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