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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야 Sep 17. 2023

나 자신, 유연하게 알아가는 중입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외국 생활에 대한 막연한 꿈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정확한 시기는 언제인지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아마 초등학교 6학년 또는 중학생 1학년 시절쯤부터 시작된 것 같다.


종종 친한 친구에게 "나는 외국에서 일해보고 싶어."라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부끄러움도 많았고 사람의 감정 또는 기분을 캐치하고 그 감정, 기분에 물들 때도 있었다. 한국은 타인에 대한 배려, 그리고 또 나보다는 대화 주체에 언제나 보이지 않는 감시자 같은 제3의 인물 '타인'이 존재해 "내가 이렇게 하면 남들이 욕할 거야. 유난스럽다고 할 거야."라고 하는 생각이 항시 들었기 때문에 아마 조금은 더 무모한 도전을 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어렸을 적 어떠한 일이 가족에 생겼을 때 힘이 들었던 적이 있는 데 가족 구성원 또는 친척은 아직도 슬퍼하니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 이쯤이면 잊고 살 법도 하지 않는지 등의 반응을 보이기도 해.


내가 기준에서 좀 벗어난 사람인가라는 내 감정과 생각이 나 외에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았다.

엄마는 어린 나에게 화난 거나 삐진 게 있음 말을 해라라고 할 정도로 그 후로 난 잘 말 안 했던 것 같다.


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니까. '공감'을 못해주는 것 같으니까.

부모가 나에게 공감을 못해준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감정의 폭이 다르다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상황을 최선을 다해 이해해보려 했으나 현재 자신의 사고방식이나 다른 접근 방식이 현 대화에서 통하지 않는다 생각지 못하거나 느끼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상황은 반복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나이가 어렸고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뭘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도 몰랐고, 행여 그것을 표현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부모님, 가족, 타인의 반응이 예상됐기 때문에 침묵을 택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도 성인이 되어보니 엄마도 그때 지금 내 나이었는 데 자기 자신을 돌보기에도 바쁜 나이에 일, 자식과 시댁, 친정 등 돌보느라 벅찼을 텐데 자식을 이해하려고 애썼겠구나, 힘들었겠구나라며 오히려 뭉클한 마음과 함께 공감이 됐다. 사람마다 공감의 폭, 생각의 확장, 성향, 성격 즉, 사고방식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나는 커가면서 점차 나 자신의 분출을 하기 원했던 지라, 해외도 많이 나가고 해외에서 내가 원하던 것을 이뤄보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주변 사람들은 내가 이런 이런 일을 하고 싶어라고 말하면 진짜 그 일을 해내는 게 신기하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 나의 속사정은 또 달랐다.


어느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나의 20대는 불안정했지만 모든 것이 받아들여지는 나이였기 때문에 무서움보다는 이것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기 때문에 용기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말 그대로 '그냥'했다. 방법을 찾았다. 길이 막혀있음 돌아갈 길을 찾아봤다. 제한된 선택권, 좁혀진 시야 속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을 찾아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지만 그게 나의 만족감을 채워주진 못했다. 오히려 공허감이 잔뜩 몰려와 일을 해내고 나면 울었던 기억, 우울감이 느껴진 기억이 났다.


왜? 나의 이상과 기대는 당시의 내 모습보다 훨씬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매우 운이 좋게도 내가 방황할 때면 잡아주는 사람이 있었다. 이때 우리가 흔히 아는 '100명의 친구보다 진정한 1명의 친구가 낫다.'라는 말처럼. 영어 단어로 멘토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현재까지도 우리는 항상 서로를 응원해 주는 존재, 정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사 그 이상의 존재.  


나의 모든 것을 다 말할 수 있었기에 다 털어놓고 나면 가끔은 미안해지기도 했다. 일방적으로 감정을 토로하는 것 같아서. 하지만 그런 나에게 그저 길잡이가 되어주고 싶다던 그분이 당시 나를 이끌어 주었다.


사실 마음이라는 것이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인간의 신체 내에 자리 잡은 장기도 아닌 데 내가 그 마음이라는 불리는 무언의 에너지, 그 에너지가 채우는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서로 포옹하지 않고 손을 잡고 있지 않는 물리적 행동이 없이도 느껴지는 그 따뜻함, 믿음이 항상 부족함만이 느껴지던 밑독이 깨진 항아리 같던 나의 마음을 항상 가득히 채워줬다. 그리고 나에게 지속가능한 힘을 주었다.


현재까지도 나의 단단한 밑거름이 되어주고 있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 그 자체가 무한한 감동이다. 내가 이뤄냈던 일보다 더 크나큰 가치를 나에게 안겨주었다. 내가 이러한 감동을 다른 한 사람의 인생에 안겨줄 수 있는 순간이 올까?


이후 나는 종종 책을 탐구하기 시작했는 데 그러다 나를 이해할 수 있는 단어를 발견하게 됐다.


Highly sensitive person, 초민감자.


이와 관련된 한 책을 우연하게 읽게 됐는데 공감되고 항상 풀리지 않던 나의 감정을 대변해 주던 책이었던지라 중반부도 가기 전에 약간 넋을 놓게 됐다. 이후 그 책을 계속 마주하기에 마음에 준비가 안되어 중반까지 읽다가 책을 덮고 책장에 도로 넣어둔 기억이 난다. 심리학자를 통해 당신은 초민감자입니다.라고 판단받은 것은 아니지만 아 내가 그래서 그랬구나, 하지만 더 알아갈 자신은 없네라는 정도로 파악하고 말았다. 굳이 뭐 검증받을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이후 내가 해외 생활을 하게 되면서 두 나라 간 문화 차이를 느끼다 보니 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는데, 한국에서는 감정 예민함을 안 좋게 보는 평가되는 경우가 있어 내가 이상하지 않음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나 자신을 숨겨두는 편이었다. 아마 이러한 경향 때문에 해당 책을 끝내지 못한 것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노르웨이에서 일하다가 한 번은 직장 동료가 "도유, 넌 진짜 관찰력이 뛰어난 거 같아."라고 말하는 데 순간 흠칫 놀랬다. 이런 긍정적 평가가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그 이유를 물어봤다. 그러니, "남들은 못 보는 걸 넌 말하지도 않고 알아채고 누군가의 말이나 지시로 듣지 않고도 알 수 있고 그걸 할 수 있잖아. 그거 진짜 좋은 것 같아"라고 그래서 나는 오랜 시간 나의 고민인 되어주던 '나만 그런 건가? 남들도 그렇지 않나?'의 질문을 은근스레 던져봤다. "근데 다들 그러지 않아..?"라고, 진짜 궁금했기도 했다.


어린 시절, '나만 그런 거야? 남들은 그렇지 않아?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거야?' 무한한 도돌이표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아니야. 내가 많은 사람들을 만나봤는 데 너처럼 무언가를 관찰하고 인지하고 그걸 가르침(누군가의 지시) 없이 행동으로 하는 사람 잘 보지 못했어. 다른 사람들한테는 항상 구체적으로 지시해야 했거든"라고 답을 했다. 그날 퇴근하고 집에 가는 데 머리가 얼얼했던 기억이 난다.


왜? 누군가 이십몇 년간 살면서 나의 안 좋은 점, 조금 더 깊게 보자면 콤플렉스라 자리 잡고 있던 부분을, 이십 년 넘게 나와 다른 나라에서 살던 외국인 동료가 처음으로 그거 좋은 거야!라고 말해줬기 때문이다. 즉, 좋은 점보다 안 좋은 점이라 생각했던 부분을 타인을 통해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여담)

이후 나는 내가 세세하게 캐치가능한 부분,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연스레 흡수되는 것들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됐다. 예로 우연히 한 두 번 보던 사람의 지난 인상착의를 기억한다던지, 누가 누구와 같은 브랜드 가방을 가지고 있구나 등등.


짧은 예로, 남편이 뭐를 사야겠다고 말하면 "00가 더 저렴하니까 거기서 사. A는 100 크로네고 B는 105 크로네더라."라고 간혹 남편이 어떻게 기억을 잘하냐고 물어보면 그냥 눈앞에 가격표가 보인다고 답하는 데 그렇다고 모든 것을 다 기억하고 알려고 하진 않는다. 내가 관심 있는 게 아니라면 굳이 뇌회로를 돌리려고 노력하고 싶지 않다. 자연스럽게 기억에 남으면 기억에 남기는 쪽으로.


아무튼 노르웨이에 이민 초반이었던 일 년 남짓한 기간 동안 나는 24시간 멈추지 않는 감정이란 세탁기를 돌리면서 나 자신을 짜내고 짜냈는 데 이후 망가진 감정이란 옷을 펴보는 작은 순간을 마주하며, 나 자신을 알아가는 순간 그리고 과거의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 현재에 나 자신으로 서 살아가는 시간을 알아가면서 처음으로 나 자신으로서 존재하는 안정감을 느끼고 있다.


과거에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말하는 것 자체 그리고 또 글로 기록을 남기는 것 자체가 꺼려졌는 데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나는 과거를 마주하며 과거 나 자신을 끌어안고 같이 회상하며 기록할 용기, 그리고 현재를 직시하고 관찰하며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용기가 있다.



그렇게 나 자신을 유연하게 알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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