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 이등
고등학교 때 우리 반 1등이었던 친구 A는 전교 1등을 독식하곤 했다. 워낙 새침한 데다 성격도 공감능력이 약간 부족했었는데, 제 잘난 맛에 사느라 남들을 신경 쓰지 않아서인지, 자기가 잘 난 것을 도통 숨기려 하지 않고 다 드러내 놓는 스타일이다 보니 반 친구들의 미움 아닌 미움도 독차지하곤 했다. 그 잘난 척이라는 것은 실제로 척이 아니라 정말 잘난 것이었는데 그것은 별로 힘들여 공부를 열불 나게 하지 않고도 일등을 하는 우월함이랄까... 게다가 광범위한 독서력으로 다방면에 있어서의 상식과 고급문화에 대한 지식을 친구들 앞에서 순진무구하게 이야기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그려, 너 잘났데이...'로 우리의 상한 자존심을 방어한 것이었다.
반면 우리 반 2등이었던 B는 항상 전교 2등이었다. 기본적으로 두뇌가 명석하기도 했겠지만 공부 안 하고 좋은 성적을 유지한다기보다는 언제 어디서나 손에서 공부를 놓지 않는 그런 노력파였달까. 하지만 B의 성격은 A와는 전혀 상반되었는데 그야말로 타고난 리더십을 갖고 있었고 온화한 미소와 과하지 않은 유머, 총명한 두뇌와 친절한 지도편달로-편달은 없었겠지만... 왠지 얘한테 지도편달받았던 느낌이다.- 단박에 우리 반 반장이 되었고, 우리는 지혜롭고 현명한 우리 반장을 무한 신뢰했다. 게다가 공감 잘하는 사람의 우수한 감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글도 잘 썼는데 한 번은 정년 퇴임하시는 선생님의 은퇴식에서 B가 송별사를 써서 읽었는데 그 글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우리의 심금을 울렸는지 은퇴하시는 선생님께 배운 적도 없는 학생들조차 오열하며 눈물바다를 이루었다.여하튼 A와 B는 이렇게 성격도 다르고 친구들 사이에서의 인기도 달랐지만 우리 반의 반장 부반장을 하면서 그 누구도 쫓아갈 수 없는 천재와 수재, 진짜 천재와 그냥 천재, 독보적 일등과 집요한 이등의 자리를 놓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만년 이등의 운명은 슬프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모습을 어쩌다 우연한 기회에 내가 보게 되었다. 하루는 도서반이었던 나는 도서관 정리를 하느라 혼자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집으로 가게 되었다. 도서실에 있다가 아이들이 다 돌아간 교실에 가방을 가지러 불쑥 교실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내가 들어가는 인기척에 혼자 남아 있던 한 학생이 화들짝 놀라 지우개로 칠판에 써 놓은 글씨를 황급히 지우고 있었다. 칠판에는 '만년 이등'이라는 네 글자가 쓰여 있었다. B였다.
마침 그 시절 아마데우스라는 영화가 나와 아카데미 상을 거머쥐며 우리에게까지 꽤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다. 그 영화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내 머릿속에는 A와 B가 떠올랐다. 장난으로 써도 명곡이 기본이었던 아마데우스와 달리 피와 땀으로 작곡한 자기의 곡은 그에 비해 허접한 곡에 지나지 않았을 때 느꼈을 살리에르의 그 깊은 자괴감. 만년 이등의 그 깊은 슬픔이 칠판 위에 쓰여 있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지만, 학생 시절, 학교 다니던 그 라테 시절에는 행복이 성적순인 것 같았다. 그래서 때론 A가 B보다 좀 더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살아보니 행복이 성적순인 것은 학창 시절일 뿐 그 이후의 행복은 순서구 뭐구 없지 않은가.
결국 둘 다 서울대학교에 당당히 입학했다. 선의의 경쟁이었을까. 아니면, 그들의 내면 안에서 부글거리는 시기와 질투가 꿈틀거리며 서로를 더 높이 높이 올라가게 부추겼을까. 어찌 되었건 우리 여고 동기들 중에서 딱 두 명이 서울대에 들어갔는데 바로 그 둘이었다.
나중에 나중에 그때의 친구들이 20년이 지난 40대 무렵에 다 같이 모이는 자리가 있었다. A는 어느 지방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영원한 반장 B는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고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모임의 약속은 이미 우리가 고1일 때 뿔뿔이 헤어지면서 만나자고 철썩같이 약속한 날이었기 때문에 무한 리더십의 우리 반장 B가 잊어버릴 리 만무한 날이다. 우리 친구들은 그 누구도 그녀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리더십의 여왕은 고독하고 외로운 자리인가... 이제와 생각해 보니 B에게는 특별한 단짝도 없었지 않은가. B는 과연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고등학교 때 선생님과 친구들 모두에게 너무나 완벽한 인정과 기대를 받아서 지금은 거기서 거기 같은 중년이 돼 버리고 나니 우리 앞에 나타나기 부끄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무슨 속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마음 깊은 곳에 있었을 망설임을 이해하려고 이생각 저생각을 해 본다.
어디에서 살고 있건 간에 나는 B의 그 아름다운 리더십이 꼭 발현되어 나 같은 많은 평범한 중생들에게 행복을 주면서 살아가고 있을 거라 믿는다. 우리 반장 B는 공부는 만년 이등이었을지언정 리더십은 우주 최강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지내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저 언젠가 어디선가는 우리의 영원한 반장 B를 꼭 다시 만나고 싶다. 꼭 다시 만나서 인생은 길고 성적은 짧지 않디? 하며 한바탕 웃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