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래된 정원 Jan 19. 2021

누룽지


 쌀쌀한 가을 아침... 실존주의 문학 수업


대학 3학년 때인가... 대학 때 동아리 활동 재미에 푹 빠져 지내느라 과 친구들과는 그다지 친하게 단짝처럼 지내는 이가 없었다. 나는 여대를 다녔었는데, 여대생들은 아직도 여고생의 습성들이 남아 단짝으로 몇 명씩 함께 다니곤 했다. 나는 그 시절 독립 기질이 강했었는지 성격이 의리가 없었는지 특별한 단짝 없이 잘 지냈다. 하지만 가끔씩 단짝들 사이에 끼여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깍두기 노릇은 많이 했는데, 그중에 한 쌍의 단짝 친구가 생각이 난다.  N과 S. 


한 번은 그들과 함께 오전 수업을 듣게 되었다. 아침 8시 30분의 수업이었던 거 같다. 너무 일찍이여서 아침은커녕 시간에 맞춰 수업에 들어가기도 쉽지 않았다. 쌀쌀해지기 시작한 가을학기 몸도 마음도 썰썰해지는  아침, 여대라 음기가 강하다고도 하고, 해도 잘 스며들지 않던 학관의 휑뎅그레한 교실에서 세 시간 수업을 마치고 나면, 항상 허기져 있었다. 그 날은 어쩌다 N과 S 그 둘과 동행을 하여 학교 후문으로 밥을 먹으러 나갔다. 수업이 있던 학관에서 나와 길 하나만 건너면 식당들이 꽤 있었다. 1, 2학년 때까지만 해도 분식집 하나 둘이 전부였던 후문에는 점점 세련된 카페들과 식당들이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했고 아는 사람들만 안다는 나름의 핫 플레이스로 변신 중이었다. 나는 학교식당에서 주구장창 일식삼찬을 먹고 있을 때, 그들은 그런 곳을 들락거리며 맛과 멋의 세계를 누비며 세련된 여대생으로 자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선구자들의 손에 이끌려 그중에 한 예쁘장하고 깔끔해 보이는 식당으로 인도되었다. 이들은 이미 이 집엘 여러 번 와 본 모양으로 편안하게 자리를 잡았지만 나는 갓 서울 상경한 촌뜨기 마냥 연신 두리번거렸다. 그 식당은 무슨 카페처럼 가게 전면이 통유리여서 밖에서 안이 다 들여다 보였는데 그만큼 내부 인테리어로 손님을 끌 만한 자신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식당 안의 테이블과 의자도 요즘 유행하는 kinfolk 스타일의 레스토랑처럼 아늑하고 따뜻한 감성으로 꾸며 놓았고 조명이며 카운터 메뉴판 이런 것들이 모두 예사로운 김치찌개나 비빔밥을 파는 밥집들과는 사뭇 달랐다. 이런 데는 음식값도 만만찮을 거야. 여기서 한 끼 제대로 먹기는 글렀는 걸 생각할 즈음 벽에 걸린 대표 메뉴를 보고 갑자기 호감도가 상승했다. 누룽지였다. 생각해 보면 아주 지혜로운 메뉴가 아닌가. 브런치에 누룽지만 한 것도 없다. 게다가 누룽지 가격이 비싸 봤자 아닐까.  물론 지금 주부가 되어 생각해 보면 누룽지는 팔만한 메뉴도 아니지 싶게 간단한 초저가 에너지 세이빙 음식이다. N과 S는 누룽지를 시키며, 이 집은 누룽지 때문에 아침에 자주 들린다 하였다.  


마침내 메뉴가 나왔다. 나온 모양을 보니 깔끔한 개인용 네모난 우드 쟁반에 희고 정갈한 대접 가득 따뜻하고 구수한 누룽지가 김을 모락모락 올리며 앉아 있었다. 곁들여 먹는 반찬으로는 양념한 단무지와 슴슴한 백김치가 함께 나왔는데 그 자태는 영롱하며 우아하였다. 지금이야 그렇게 이쁘게 플레이팅하는 곳이 한 두 군데겠냐마는  94년 당시로는 가히 충격적인 자태가 아닐 수 없었다. 누룽지라는 음식이 이렇게 이쁘게 나올 수 있는 음식이었나.  따뜻하게 먹고 나설 때는 가격 대비 실한 식사를 한 느낌에 뿌듯함과 보람으로 남은 하루를 잘 보낼 수 있을 거 같은 좋은 예감까지 있었다. 아주 좋은 브런치였다. 


호호 불며 먹던 그 예쁜 식당의 그 예쁜 누룽지


그런데 문득 궁금하다. 그 때 함께 식당을 나서며 탁월한 선택에 뿌듯해하며 다시 학교 캠퍼스로 들어가던 우리 친구 N과 S는 지금 어디 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어느 한 때,  누룽지를 먹는 어떤 순간에 그들도 나처럼 그때 

그 시절이 떠 오를까. 스무 살,  그 쌀쌀했던 가을 아침, 여대생 셋이 모여 따뜻한 누룽지를 호호 불며 먹던 그 예쁜 식당의 그 예쁜 누룽지를 떠올릴 수 있을까.반찬없는 아침, 누룽지를 끓이다가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옛 친구를 기억하고 잠시나마 궁금해하고 그 끄트머리에 우리의 젊었던 시절이 그립다.




작가의 이전글 시골쥐와 서울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