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부터 시끌벅적했던 박은석 배우의 사건을 밤늦게서야 보게 되었다. 그것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은 처음에는 분노였고, 이후에는 혼란이었다. 그 이유는... 지인과 친척들에게 보낸 동물의 수가 4마리는 된다는 점도 충격이었는데 지금 고양이와 강아지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니!! 처음에는 물론 나도 그 당사자에 대한 반감이 생기기도 했지만 기사와 떠도는 이야기만으로 파양이다, 유기와 다를 바 없다, 비난은 우선 접어두자 싶었는데... (지금도 그분을 비난할 마음은 없다) 그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서 혼란이 가중되고 말았다.
-이때다 싶어서 물어뜯는 사람들의 군중 심리. 가십거리 생겨서 신났구나
-애도 사정이 있으면 사촌 집으로 보내는데 개는 뭐가 어떠냐
-학대를 한 것도 아니고 유기도 아닌데 왜 이렇게 물어뜯느냐
-지인에게 보낸 강아지를 쭉 안부도 묻고 했다는데 왜 그러냐
-이럴 시간에 너네 강아지들 개똥이나 잘 치워라
-옛날 같았으면 모르고 넘어갈 만한 사실이다
-혼자 지내는 것보다 좋은 환경으로 보내는 게 낫지 않냐
이런 류의 댓글들이 꽤 많은 것을 보면서 나는 어쩌면 동물권에 대한 목소리가 소수의 목소리이고, 아닌 사람들이 대다수이구나 하는 생각에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또 틀렸다. 혹 누군가가 나에게 너는 유기동물을 위해서 대체 무엇을 하길래 큰소리냐고 질타를 한다면, 나도 딱히 그렇다 할 할 말은 없다. 유기견을 입양해서 키우고, 가끔 단체에 후원을 하고, 친구들이 입양을 고려하면 유기견 입양을 해야 한다고 앞장 서는 게 고작이다. 그러나 내 마음만은 그렇지 않아서 화가 나는 것이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비록 작은 목소리이지만, 내 자리에서 내 방식대로 치열하게 내왔다. 그랬기 때문에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현실이 그닥 바뀌지 않은 데에 대한 서글픈 분노를 느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박은석 배우가 미워서가 아니라 문제의 합의가 여전히 넓어지지 않은 것에 분노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나는 박은석 배우의 사과문을 면밀히 읽어보았다. 그리고 그가 열어둔 댓글도 꽤 진지하게 읽다가 이내 덮어버렸다. 그의 사과문에서 나는 다소간 아쉬움을 갖고 있다. (내가 누군가의 사과문을 심판한다거나 진위를 의심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일깨워줘서 감사하다, 자신처럼 이 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몰랐던 사람들도 알게 되었을 거라는 문장이 특히 걸렸다. 자신의 과오를 대다수에게 던져버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건 당신이 책임져야 할 문제인데. 그리고 이 사과문은 박은석 배우를 옹호하는 이들과 이것을 문제라고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간의 싸움으로 번지도록 빌미를 제공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과문에 대한 첨삭을 하고 싶지만 그건 관두겠다. ㅜㅜ)
박은석 배우를 이 사태로 앞으로 분명 더 나아진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을 함께 목도한 우리들 또한 나아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사정이 생기면 개나 고양이를 언제든 더 나은 조건의 지인에게 보내도 된다'라는 문제와 싸워야 한다. 반려동물을 입양할 때 어떤 것까지 고려하고 입양해야 하는지, 입양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야 하고, 책임이라는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삶이란 언제나 변수가 있기 마련이다. 때로는 엄청난 변수로 인해 부득이 가족과 헤어져야 하는 상황이 생기고도 만다. 사람도 그렇거니와 동물도 그렇다. 그중 가장 안따까운 헤어짐은 견주의 사망이다. 이토록 불가피한 변수가 아니고서야 나는 반려동물과 함께 산다는 것이 어떤 변수를 열어두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정은 사실 없다! 없어야 하기 때문에 없다고 단언하며 이야기할 수 있다. 함께 살아가는 일이란 그만큼 서로의 희생과 서로의 배려가 필요한 일이다.
나의 입양견 순심이는 견권이 상승된 언젠가부터 실외배변만 고집을 하고 있다. 때로는 이게 너무나 성가신다. 특히 한겨울에 눈보라라도 치면 강아지도 변을 보려고 하지 않는 통에 엄동설한에 한 시간 이상을 걷곤 한다. 그리고 저녁 약속은 일 년에 몇 번 있을까 말까다. 그마저도 약속이 생기거나 출장을 가거나 여행을 가야 한다면 순심이가 있어야 할 곳을 마련하는 게 제일 중요한 일이 된다. 나는 애견호텔에 순심이를 맡기지 않는다. 보호소에 있었던 충격 때문인지 실내에 강아지들이 많은 환경에 놓이면 예민해지고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네 절친 견주네 집에 맡기거나 강아지를 키운 경험이 있는 친구에게 부탁을 한다. 물론 소정의 비용도 지불한다.
가끔 나도 불가피하게 우리가 이별해야 될지 모르는 일들을 상상하곤 한다. 암환자인 나의 병이 재발하여 (초기 발견해서 근 10년간은 재발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연로해진다면 충분히 재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인간사의 생로병사를 부정할 마음은 없어서 지금도 단단히 준비 중이다) 내가 내 강아지가 먼저 떠나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된다면 (상상도 하기 싫다. 이런 일은 없을 거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부질없고, 쓸데없고, 있어서는 안 될 상상. 나는 내 강아지를 다 죽기 전에 미국에 있는 오빠네 데려다주어야지 생각한다. 오빠라면 나를 생각하듯 내 강아지를 봐줄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다. 변수라는 것은 이런 것이지 않나?! 가족이 되었다는 것은 많은 변수가 있음에도 안고 가는 것이니까.
그러니 부디, 그럴 수 있지,라는 생각을 접어주었으면 좋겠다.
그 생각만 사라져도, 우리가 주창하는 동물권 신장의 문제는 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되리라 생각한다.
그럴 수 없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면 버려지는 동물들의 수는 줄어들 것이다.
시궁창 같은 뜬장에서 품종견을 낳다가 늙으면 길가에 버려지는 동물이 사라질 것이다.
엊그제 동네 미용실에 앞머리 파마를 하러 갔다가 생긴 일이다. 순심이가 동행한 터라 미용실은 자연히 강아지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나는 롤로 돌돌 앞머리를 말고 커피를 훌쩍이던 중에 손님들이 하는 이야기에 씁쓸함을 느꼈다. 나이 드신 어머님께서 시골에 사는 동생네 집 강아지가 중성화를 하지 않은 탓에 갑자기 18마리가 되었다는 썰을 풀다가 그중 대다수는 개장수가 데려가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맑은 목소리로 하시길래, 전세대에 걸쳐 이 생각이 바뀌려면 몇 세대가 더 흘러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캐나다 벤쿠버로 여행을 갔을 때 나는 강아지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좋은 자극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강아지가 귀여워도 리액션이 크고, 무서워도 리액션이 큰데~ 그곳의 개들은 한 일원으로 섞여 있다는 느낌이었다. 강아지가 귀여워서 환호하고, 손을 내밀고, 오바 떠는 인간은 진짜 나뿐이었다. 나 빼고는 다들 거기 강아지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이야, 라는 듯 무심히 지나쳤다. 그 무심한은 편견이 없는 다정이었다. 그들이 오랜 세월 강아지와 함께 살아가며 쌓아올린 태도였다.
그래도 오늘 아침 조승우 배우가 곰자를 입양했다는 소식에 조금 우울했던 내 마음이 환해졌다. 누군가는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살리고 있다. 그것이 우리도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이다. 그렇게 믿는다.
만약 왜 내게 이리도 분개하냐고 묻는다면, 내가 유기견과 가족이 되어서도 있겠지만, 나는 작은동물을 향한 사람들의 평범한 선의가 사회적으로 합의가 되었을 때 우리 사회가 많은 면에서 약자에 대한 시각이 변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인간이 인간됨, 어른이 어른됨으로 이뤄나갈 수 있는 일은 많다고 믿는다.
*출판사 편집자로 책소개하는 유튜브를 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35AYF-ledB4&t=752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