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경은 몸 위에 걸쳐진 아이들 다리와 팔을 조심히 내려놓은 후, 조용히 방에서 빠져나왔다. 남편도 이제 막 귀가한 듯 현관문을 밀며 들어오고 있었다.
“Hey.”
남편이 수경을 보며 짧은 미소를 지었다. 얼굴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Did you eat something for dinner?” (저녁 먹었어?)
수경이 묻자 남편은 고개를 끄덕였다.
“Yes. I had a triangle gimbab. How about you?” (삼각김밥 먹었어. 당신은?)
수경도 고개를 끄덕였다.
“Kids left fried rice, so I ate it all.” (아이들이 볶음밥을 남겨서 내가 다 먹었어.)
“Another day is gone.” (또 하루가 지났구나.)
Ryan의 말에 두 사람은 함께 긴 한숨을 내쉬었다.
“I am exhausted. I gotta go to bed now. I must go to school early tomorrow morning.” (피곤해. 자러 가야겠어. 내일 아침 일찍 학교에 가야 하거든.)
“OK.” (알았어.)
Ryan은 수경의 이마에 짧은 인사를 하고 안방으로 들어갔고 수경은 휴대폰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카카오톡에는 읽지 않은 메지들이 많았다. 조리원 친구들의 채팅방에서는 ‘벌써 아이들을 다 재웠다, 육아 퇴근하고 혼자 한잔하고 있다, 아직도 아이들이 안 자서 속상하다’등의 메시지들이 오고 가고 있었다. 늘 이 시간쯤, 주로 이렇게 친구들과 수다를 떨었다. 수경은 휴대폰을 끄고 소파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막막했다. 막다른 골목에서 길이 막힌 것처럼 사방이 수경의 머리 꼭대기까지 길게 뻗어 숨 쉴 곳 없이 옥죄어 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생각을 하려고 할수록, 차분하게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수경을 아무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다. 문이라도 보이면 이 답답한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아무리 사방을 둘러봐도 조그만 구멍 따위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건강했잖아. 건강 하나는 자신 있었잖아. 아이 낳고 정신없는 와중에도 삼시 세끼 잘 챙겨 먹고 애들 남긴 밥까지 다 꾸역꾸역 먹었잖아. 운동을 하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아기 낳고 몸 추스르자마자 건강검진받고 운동 시작할걸. 자꾸 피곤하다 피곤하다 하며 라면 먹고 드라마 보며 뒹굴뒹굴해 그랬나? 아이들 낳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병이 온 걸까? 꿈도 많고 계획도 많은 나였는데 매번 내일부터 시작하자 해놓곤 애들 낳고 4년 동안 정말 함부로 먹고 스트레스만 계속 쌓아왔어. 특별하게 하는 일 없이 애들 낳고 4년 동안 병만 키웠어.’
그 순간,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침대에서 뒤로 벌렁 누우며 즐거워하던 장면이 떠오르자 수경이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 아니야. 오로지 스트레스만 받았던 게 아니야. 아이들 건강하게 잘 크고 예쁜 짓을 많이 해 내가 얼마나 행복했었는데? 내 자식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건사하며 내가 얼마나 큰 보람을 느꼈었는데? 아이들 태어나 내가 얼마나 웃고 살았는데. 웃으면 오던 병도 달아난다고 했잖아.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웃고 행복했었어.’
수경은 울컥하는 것을 애써 참았다.
‘유전인가 봐. 그래. 할아버지 조카가 예전에 위암으로 죽었다더니 가족력이 있었나 봐. 매년 건강검진 잊어버리지 말고 좀 잘할걸. 그랬더라면. 그랬더라면....’
지나간 시간을 곰곰이 따져 물어 원인을 찾아보고 후회를 해봤지만 그녀가 죽는다는 사실은 꼼짝없이 생각의 끝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유전이건 환경 탓이건 미리 발견했었더라면 하는 후회들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결과를 바꾸기에는 전혀 힘이 없었다.
‘췌장암입니다. 6개월 정도 남았습니다.’
수경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시기인데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버텨내야지. 아빠랑 의사소통되려면 영어도 더 배워야 하고....’
수경은 노트북을 꺼내와 암 투병 사례들을 읽고 생명 연장에 도움이 되는 정보들을 적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시간을 보니 이미 3시간이 훌쩍 흐른 뒤였다.
‘이런 남의 사례와 내가 몇 달 더 사는 게 무슨 그리 관련이 있다고.... 이렇게 귀중한 시간을 또 허비하고 있었구나. 이렇게 시간이 귀중한 줄 모르고 살았지 내가.’
영원할 것만 같던 시간들과 늘 함께 하던 가족, 사람들, 일상에는 유한한 시간이 있었다. 이별을 해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 그동안 그 사실을 잊고 쉽게 버려진 시간들이 떠올랐다. 아이들과 대화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눈은 휴대폰으로 향하던 자신과 남편이 말을 걸어도 드라마를 보며 건성으로 대답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아이들 눈 한 번 더 쳐다보고 아이들을 지켜보며 적극 반응하고 아이들 한번 더 안아줄걸, 남편 퇴근, 출근 시 미소 지으며 맞아주고 배웅해 줄걸.’
그런 후회가 밀려오자 수경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이 미련한 인간은 이렇게 절박한 순간에 이르러서야 깨닫게 되는구나. 그래. 지금부터라도 남겨진 시간들을 보물 다루듯 소중하게 쓰자. 내게 준 현재와 내 가족들에게 완전히 집중하자. 남은 시간 아이들에게 집중하는 이 6개월의 시간이 아이들의 기억 속에서 평생을 지켜줄 거야.’
수경은 일어나 아이들 방으로 들어갔다. 잠든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품에 한 명씩 안았다. 아이들의 발도 만져보고 손도 만져보다 아이들의 입술에 조심스레 입을 맞추었다.
수경의 볼을 타고 눈물이 쉼 없이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