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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hnny Mar 29. 2023

1.나와 아랫집 할머니와 따뜻한 잡채

20대 독신 여성의 이웃과 함께하는 삶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단독주택은 아닌데 그렇다고 빌라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다세대 주택이다.

다락방을 포함한 4층 주택의 2층과 3층의 절반을 떼어 별도 세대로 만든 다소 특이한 구조이며 주인세대에는 부부와 아들 둘, 2층의 절반에는 70대 노부부, 그리고 3층의 절반에는 내가 살고 있다. 

부부와 자녀&부부1인가구가 모두 존재하는 하이브리드 하우스다.


이전에 살던 빌라에서는 옆집이나 아래윗집에 누가 사는지도 전혀 몰랐었는데 통틀어 3세대 밖에 되지 않는 집에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로서로 얼굴을 익히게 되었다.

(심지어 이제 대학교에 입학하신 주인집 도련님께서는 나를 만나면 "안녕하세요" 하고 고개를 꾸벅 숙여서 인사한다.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나도 같이 목례를 한다...)


1.

이사 온 지 두어 달쯤 지난 어느 날 야간근무를 마치고 누레진 얼굴로 집으로 돌아와 차를 대고 있었다.

마침 그 자리에 계시던 아랫집 할머님께서 갑자기 자동차 창문 안으로 얼굴을 쓱 내미셨다. 조금 놀랐지만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위아래집 살면서 이렇게 얼굴 뵙기는 처음이네요!


할머님께서는 눈으로 MRI를 찍듯이 나를 위아래로 꼼꼼히 살피시더니 대체 무슨 일을 하길래 평일 낮에 차가 집에 있고, 오밤중에 차가 없는지 궁금하다고 하셨다.

교대근무를 해서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그때부터 '직장은 어디냐' '나이는 몇이냐' '형제관계는 어떻냐' 등

운전석에 앉아있는 나와 차 옆에 서 계신 할머님 사이의 심층 면접이 시작되었다.


요즘 시대에 초면에 잘 묻지 않는 질문들 위주라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왠지 열심히 대답해야 할 것 같아서 최선을 다해서 답해드렸다.

5분 정도의 면접 후 '윗집 아가씨'에 대해 만족할 만큼 알아냈다고 생각하셨는지 밥을 좀 더 열심히 챙겨 먹어야겠다는 짧은 코멘트를 남기고 자리를 뜨셨다.



2.

어느 날 야간 근무 전에 쪽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택배도 배달음식도 문 앞에 놓고 가는 요즘 초인종 소리를 들을 일이 거의 없기에 깜짝 놀라 인터폰을 보니 아랫집 할머니셨다. 문을 열자마자 바로 쓱 들어오셔서 우리 집 소파에 털썩 앉으셨다.

우리 집 거실 테이블에 들고 오신 서류 뭉치를 펼치며 할머니께서 최근 전세를 끼고 매매하신 아파트의 임대차 신고 절차에 대해서 물으셨다.


겨우 잠들려던 참에 방해를 받아 솔직히 짜증도 좀 나고 이걸 왜 무주택 세입자인 나한테 물어보시는지 알 수가 없었다(집에서 20미터 거리에 부동산이 있었는데 말이다). 그래도 내가 아는 선에서는 또 최선을 다해 대답해 드리고 '저도 전문가는 아니니 정확한 건 꼭 다시 알아보시라'는 말과 함께 할머님을 돌려보냈다.


'원래 주택에 살면 이런가?' 조금은 언짢았다.



3.

아랫집 할아버님께서는 식물을 사랑하신다.

이삿짐에도 화분이 많더니 주차장 뒤편 조그만 공간에 3단 선반을 두고 미니 화단을 만드셨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시들지 않고 모두 싱싱한 걸 보니 정성 들여 가꾸시는 듯하다. 

어느 날 출근을 하려는데 내 차에 쪽지가 붙어 있었다.


매연이 꽃에 有害(유해) 하니 차를 조금만 앞으로 주차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쪽지는 무려 세로 쓰기로 되어 있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상소문이나 독립신문에서나 보던 세로쓰기!

그리고 有害에서 '유'는 알겠는데 '害'가 무슨 한자인지 몰라 네이버에 검색을 해야 했다.

내 딴에는 내 차 앞에도 차를 댈 수 있도록 최대한 뒤로 빼서 주차를 한 건데 할아버님 입장에서는 사랑하는 꽃들에 자동차 배기가스가 내뿜어지는 것이 마음 아프셨을 것 같기도 하다.



4.

이번 설 연휴는 쭉 근무일이라 부모님 댁에 가지 않고 집에 있었다.

출근 전 집에서 쉬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할머님이었다.

문을 열지 말지 잠시 고민하다가 문을 여는데 나무쟁반에 곱게 받친 접시 하나가 불쑥 들어왔다.

방금 만들었는지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잡채였다. 

설 연휴인데 주차장에 계속 차가 있길래 할머님 딸 주려고 만드신 잡채나 한 접시 가져왔다 하셨다.

배도 그다지 고프지 않았는데 왠지 바로 먹어야 할 것 같아 그 자리에서 뚝딱 해치웠다.

잡채는 따뜻했고, 참기름 냄새가 많이 났다.


그리고 잡채는 조금 짰다

나이가 들면 미각이 둔해져 만드는 음식의 간이 세진다는, 언젠가 엄마에게 들은 말이 생각났다.

할머님의 태도나, 목소리나 외양이 아닌 할머님이 만든 잡채의 간에서 그분의 나이가 새삼 실감이 났다.

그렇다 그분은 나보다 훨씬 나이 드신 분이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바뀌었을 할머니 잡채의 간처럼 할머니의 세상도 많이 바뀌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기준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을 한다고 할머니를 좀 나쁘게 생각했던 순간들에 괜히 미안해졌다.


접시를 씻어 말린 뒤 답례로 쿠키 몇 개와 함께 쇼핑백에 넣어 할머님 댁 문고리에 걸었다.

"다음엔 좀 더 잘해 드려야지..."



5. 

초인종이 또 울렸다.

인터폰을 보니 오늘은 할머님이 처음 보는 중년 여성분과 함께 서 계셨다.

아마 접때 말씀하셨던 따님인 것 같았다.

문을 여니 할머님댁 샤워기에서 물이 잘 안 나온다고, 혹시 우리 집도 그런 지 물으셨다.

이젠 할머님의 깜짝 방문쯤이야 아주 익숙해져서 그냥 들어오시라고 한 다음

화장실 변기도 내리고 샤워기도 틀고 주방 싱크대 물도 틀어 보여드렸다.

수압 때문이라면 윗집인 우리 집이 더 문제일 테니 샤워기 헤드를 한번 갈아보라고 말씀드렸더니 그게 뭐냐는 표정을 지으셨다. 

그러자 옆에 계시던 따님이 "엄마 우리 집에 남는 거 하나 있어~다음에 올 때 들고 올게. 엄마 우리 이제 나가자 아가씨 혼자 쉬는데. 아이고 고마워요"하더니 할머님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할머님께서는 문제가 해결되어 기뻤는지 환히 웃으시며


내가 우리 집 앞 계단 청소할 때 아가씨 집 앞도 같이 걸레질 한데이!

하고 한차례 어필을 하고 그런 얘기를 굳이 왜 하냐는 딸의 타박을 받으며 사라지셨다.


어쩐지 관리인도 없고 관리비도 없는 우리 집 앞 복도 계단이 항상 깨끗하다 했더니 할머님께서 닦아주고 계신 거였다.



맺으며

집에서 산도 보이고 초등학교 종소리도 들리는 조용한 우리집(내 집은 아니고)에서는 지금도 세 가족이 살아간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요즘 세상에 (주로 아랫집이지만)이웃과 교류하며 지내다 보면 친구와의 식사자리나 술자리에서 풀 에피소드가 꽤 생긴다. 할머님 할아버님도 여기서 오래 사실 듯하고, 나도 1) 결혼 2) 퇴사 3) 내 집 마련이라는 변수가 없는 한 계속 재계약을 할 예정이니 앞으로도 에피소드는 늘어날 듯하다. 


새벽 출근을 하는 날 후다닥 집에서 나서다가 화단을 가꾸는 할아버님이 보이면 반갑게 인사한다. 할아버님은 귀가 조금 어두우시다(인사에 대한 몇 번의 무응답으로 알게 된 사실이다). 그래서 등 뒤에서 인사하지 않고 할아버님 근처에서 적당히 기웃거리다가 눈이 마주쳤을 때 배에 힘을 딱! 주고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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