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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hnny Apr 04. 2023

3. 사랑하는 나의 오래된 커튼에게

오래되어 더 특별한


집에 물건을 잘 들이면 시간이 흘러도 볼 때마다 기분이 좋다. 


우리 집 커튼이 그렇다.

나보다 연세가 많은 우리 집 최고 어르신인데, 첫 쓰임이 부모님 신혼집이었으니 무려 30년 넘은 물건이다. 부모님의 첫 살림집은 거실과 부엌에 방 하나가 딸린, 10평이 조금 넘는 작은 아파트였다. 집이 작으니 커튼도 작았다. 시간이 흘러 우리 삼 남매가 태어났고, 더 큰 집으로 옮기면서 커튼은 쓰임을 다했다. 


낮의 거실, 해가 잘 드는 오후엔 온 집에 분홍빛이 돈다


지금 사는 집에서 처음 자취를 시작할 땐 커튼 없이 지내려 했다. 감사하게도 앞집 뷰가 아니었고 집에서 산이 보여 전망도 좋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주 생활공간인 거실에서 하루종일 햇빛을 받으니 눈이 피로했다. 낮에 TV를 볼 때 화면에 빛이 반사되어 잘 보이지 않는 것도 불편했다.


그런데 이 커튼이라는 것이 내 돈 주고 사려니 상당히 비싼 물건이었다. 가로 4미터, 높이 2.6미터 정도인 우리 집 거실창에 괜찮은 커튼을 맞추려면 2~30만 원은 족히 들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커튼 디자인도 너무 한정적이었다. 예산은 적어도 너무 흔한 건 싫었는데 80% 이상이 암막커튼 아니면 요즘 유행하는 하얀 쉬폰커튼이었다.


침실도 암막커튼인데 거실까지 암막커튼을 하면 집이 너무 우울해 보일 것 같았고, 쉬폰커튼은 경험상 빛이 강한 오후에는 차광효과가 거의 없었다. 또 하얀 쉬폰 커튼에 김칫국물이라도 튀게 된다면.... 윽 생각도 하기 싫었다. 


그럼 할머니 댁에 있는 커튼 가져가 쓰지 그러니?


엄마는 할머니 댁에 가져다 놓은 옛날 커튼을 가져다 쓰라고 하셨다.

"싫어..."

보지도 않고 말했다. '할머니집'에 있는 심지어 '옛날' 물건이라니... 안 봐도 촌스러울 게 뻔했다. 20년 전 포인트 벽지 감성의 빨간 양귀비 꽃이 커다랗게 그려진 커튼이 떠올랐다. 절대 안 되지 절대.


그래도 한번 보고 생각해 보라는 엄마의 설득에 할머니집 장롱에서 보자기에 곱게 싼 커튼을 꺼내 보았다. 그런데 웬걸.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분홍색과 연한 보라색이 물감을 칠한 듯 섞인 꽃무늬 커튼이었다. 두께도 적당하고 오래되었지만 상한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마음이 급해져서 집에 들고 가자마자 거실에 부랴부랴 걸었는데 (커튼이 무거워 혼자 설치하느라 애를 먹었다) 정말이지 마음에 쏙 들었다. 이건 딱 내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넓이도 딱 맞았고 길이는 조금 짧지만 나름 귀여운 느낌이라 오히려 좋았다. 


커튼은 지금도 잘 쓰고 있다.

남향에 가까운 남동향인 우리 집은 낮에 햇빛이 아주 잘 들어오는데 빛이 커튼을 거치면서 온 거실이 분홍빛으로 물든다. 어떨 때는 포근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조금 처연한 느낌도 든다. 햇빛도 가리고 감성 충전도 하고 일석이조다.


밤의 거실, 해가 지면 또 다른 분위기가 있다


밤에는 또 다른데 형광등을 끄고 무드등만 켜 놓으면 홍콩영화 감성이 난다. 영화 <화양연화> 느낌이랄까. 낮에는 밝은 색이었던 커튼이 바깥의 어둠에 회색빛을 띄며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다(그렇지만 우리 집은 낮에 더 예쁜 것 같다).



골동품 자랑을 너무 거창하게 해서 조금 머쓱하다. 그렇지만 부모님이 쓰시던 물건이라 의미 있어 좋고, 오래되었으면서 또 흔하지 않다는 특별함이 좋다.

다음 이사 갈 때에도 챙겨 다닐 듯하다. 거실이 더 큰 집에서 살게 되면 안방에 걸어 계속 써야겠다.


내 손에서 더 오래된 골동품이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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