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열등감에 빠져있었다. 열등감에서 파생되는 여러 가지 마음들은 나를 자기혐오에 빠지게 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축하해주지 못한다거나 오히려 조금은 나보다 안되길 바란다거나 하는 그런 마음말이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 너무 싫었고 그 자기혐오는 다시 더 큰 열등감을 낳았다. 그 악순환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지옥 속에서 살고 있었다. 이 열등감은 불안과 무기력으로 이어지기도 하면서 천천히 내 삶을 파괴해 나갔다.
나는 내세울 거 없는 내 인생이 너무 괴로웠다. 세상의 기준에서 나는 아무런 메리트가 없다. 남편에게 왜 나랑 결혼했냐 물었다. 언제나 한결같은 남편은 내가 너무 좋았다고 말한다. 그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이해가 되질 않는다. 대체 나 같은 사람이 왜 좋은 거지? 가끔 유튜브를 보다 보면 결혼을 하기 위해 갖추어야 하는 조건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어쩜 나는 단 하나도 갖춘 것이 없다. 어깨가 축 쳐진다.
우리는 숫자에 메인다. 결혼하기 전까지 나는 어떤 아파트가 비싸고 싼 지, 저 자동차의 브랜드가 무엇인지, 명품브랜드에 뭐가 있는지 잘 몰랐다. 아무리 비싼 아파트여도 나에겐 그냥 흔하디 흔한 아파트일 뿐이었고 그냥 자동차일 뿐이었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나는 정보를 찾아야 했고 수많은 정보들은 나에게 숫자로 쌓여갔다. 어느 날 남편과 차를 타고 가는데 저 아파트 얼마짜리야 저 자동차 얼마짜리야 저 가방 얼마짜리야 하며 주변을 바라보는 나를 보았다. 어린 왕자에 아름다운 장밋빛 벽돌집을 보던 어린아이에서 십만 프랑짜리 집을 보는 어른으로 바뀐 기분이었다. 돈 때문에 살고 싶은 동네에 살지 못하는 상황을 조금은 비관하게 되었고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게 되었다.
숫자는 매혹적인 것 같다. 성취를 너무나도 알기 쉽게 보여준다. 그래서 더욱더 그 숫자에 집착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숫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린 왕자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그 말이 진짜일 수도 있다. 누군가를 향한 사랑, 지지, 응원, 따듯한 마음, 희생, 섬김 같은 것들은 숫자로 드러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래서 자녀의 성적에 집착하는 어른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한 희생이 도무지 숫자로 드러나질 않으니 유일하게 드러나는 성적으로 보상받으려는 것이다. 또 어쩌면 그래서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 하는 것 일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낳아 한 생명을 살리고 길러내는 것에 대한 가치는 숫자로 표현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기에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따르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다.
결국 타인의 시선과 기준이 어떤가에 매여서 나는 일상에 감사를 잃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가치들을 잃었다. 분명 숫자는 생존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일생에 모든 면을 숫자로 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 무언가를 바라볼 때 숫자를 빼면 참 단순해진다. 딱히 열등감에 빠질 이유도 거진 사라진다. 그 사람의 숫자가 담긴 타이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자체, 본질을 본다면 주눅들것도 내세울 것도 없다. 그냥 나는 나고 그 사람은 그 사람이 되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