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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오 Jul 21. 2019

카페 '그레이웨일'

같은 공간 다른 생각 #4

지난 6월, 테오 4인방은 아지트로부터 걸어서 2분 거리에 있는 카페 ‘그레이웨일’에 다녀왔다. 원두 하나 하나 설명해주시며 정성스레 커피를 내려주신 사장님, 오롯이 커피에만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진 공간, 커피를 앞에 두고 오갔던 대화를 떠올려보면 ‘그레이웨일’을 단순히 ‘카페’라는 말로 설명하기에는 많이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잔의 커피를 마시며 우리가 했던 생각을 적어 보았다.


[바깥]

커피를 끊은지 좀 됐다. 숙면을 취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커피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다. 사실 커피에겐 죄가 없다. 그리고 나는 카공족이다. 적정선은 지킨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카공족의 문제를 지적하는 뉴스를 보면 찔리는 구석은 있다. 이 두 가지 이유에서 카페 그레이웨일로 가는 발걸음이 그리 가볍지만은 않았다.


공간은 듣던 대로 특이했다. 공간의 중심에, 가장 큰 비중으로 사각형 구조의 바(bar)가 있다. 게다가 꽤나 강한 조명이 바를 비추고 있는데, 어두운 색으로 칠해진 벽과 대비되면서 이 작지 않은 공간에 오롯이 바만 보인다고 해도 과장은 아닌 듯하다. 가장자리에 테이블 몇 개가 있지만, 사실상 쓰임새가 없다고 보는 게 맞다. 나와 같은 카공족은 그 목적으로는 절대 발을 붙일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사전정보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리 불편한 곳은 아니다. 오히려 공간의 의도가 매우 뚜렷해서 마음에 들었다. 개인적으로 느낀 그레이웨일의 목적은 ‘커피와 사람을 주제로 나누는 대화’이다. 이는 의식적 사고의 결과가 아니라, 그곳에 30분이라도 앉아 있으면 자연스럽게 떠오를 법한 생각이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면서 커피에 대해 한참을 얘기했다. 단순히 커피의 품종이나 맛에 대한 얘기로 끝나지 않았다. 기후 변화에 대해, 커피 산지의 현실에 대해, 그라인더나 필터와 같은 도구에 대해, 맛을 표현하는 단어에 대해, 업계 종사자에 대해, 바리스타 대회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 뭐 어떻게 이 일을 하게 되었냐는 뻔한 질문을 드렸다. “커피뿐만이 아니라 마시는 걸 좋아한다”면서 콜라에 빠졌던 얘기, 캔커피에 빠졌던 얘기를 해주셨는데, 사람 냄새나는 답변이라 좋았다.


3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그레이웨일을 나오면서 문득 몇 년 전에 갔었던 판교역 근처 카페가 떠올랐다. 거기에서도 바리스타님이 직접 설명하면서 만든 커피를 여러 잔 맛볼 수 있었다. 하지만 쇼(show)를 관람하는 느낌이 강했다. 화려한 테크닉과 언변이 일방향으로 쏟아졌고, 나는 그저 관객이었다. 그곳이 극장에 가까웠다면 그레이웨일은 아지트에 가까웠다. 지치고 힘들 때 언제든 찾을 수 있는 그런 공간 말이다.


한 켠에 놓여있던 ‘화요’를 언급하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맛있는 술을 말아주신 사장님… 이런 공간을 접하고 나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알기를 바라면서도 너무 유명해지지는 않았으면 하는 묘한 감정이 든다. 그래도 상시로 찾을 수 없다는 건 조금 아쉽긴 하다. 사장님의 부업이 잘 되어서 내가 필요할 때 언제든 그레이웨일의 문이 열려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필]

음료와 공간을 함께 파는 곳이 우유나 주스가게가 아닌 카페와 바로 먼저 나타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에게 필요했던 그곳은 단순히 음료를 마시기 위한 공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본질은 대화라는 서비스를 파는 곳. 우유나 주스에서 얻을 수 없는 카페인의 각성, 알코올의 취기를 대화의 촉매제로써 사용하는 곳이었던 것. 실로 커피하우스, 살롱, 주막은 끊임없이 만남과 대화가 이어지는, 사회생활의 구심점이었다. 이곳은 물건을 교환하는 시장, 의견이 충돌하는 격투장, 배움이 있는 교육장이자 생각을 주고받는 광장이었다. 지적 호기심을 갖고, 혹은 새로운 기회를 엿보고 사람들이 ‘찾는 곳’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카페는 사뭇 다르다. 공간에 사람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공간을 분할한다. 초단기 임대를 하는 것이다. 요컨대, 카페라는 공간의 사회적인 역할은 크게 축소되었다.


카페에 주인이 없다. 초단기 임대를 매개하는 중개인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공간에 대한 거래가 끝나면 중개인의 역할도 끝난다. 하지만 초기의 커피하우스, 살롱, 주막을 보면 주인은 공공적인 활동의 주축이었다. 미디어가 발전하기 전에는 여론의 게이트 키퍼이기도 했다. 마을에서 돌아가는 일, 예컨대 누가 실직을 했다든가, 새로 이사 온 사람이 어떻다든가 하는 소소한 루머까지도 술집이나 다방 주인을 통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제 카페에서는 정보도, 소식도 교환되지 않는다. 답을 가진 주인도, 질문을 가진 손님도 없다.


그레이웨일에는 한가지 룰이 있다.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는 것. 좋든 싫든 바에 앉아 주인을 바라보아야 한다. 지하에 위치한 그레이웨일은 모든 벽면이 검은색으로 칠해져서 기본적으로 굉장히 어둡다. 중앙에 바 테이블이 위치해있고, 조명은 그곳을 밝게 비춘다. 즉, 주인과 손님이 대화를 주고받는 중앙의 바 테이블이 마치 무대처럼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찌 보면 마냥 편하지만은 않은 공간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손님은 정말로 ‘손님’이 되고, 커피와 더불어 공간은 모두 대화를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이번 방문에서는 그 대화가 커피에 국한되었던 것이 조금은 아쉽지만 꾸준히 찾는다면 다양한 주제가 오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정보와 소식이 오가는 몇 남지 않은 진짜 커피하우스에서 우리는 사장님을 통해 커피에 대해 질문했고, 배웠고, 의견을 나누었다.


우리는 와인을 오감으로 즐긴다. 와인의 역사를 공부하고, 라벨 읽는 법을 배우고, 샤토 이름을 익히고, 또 어느 샤토가 그랑 크뤼인지 외우려고 한다. 본인이 좋아하는 포도 품종이 무엇인지 즈음은 대개 알고 있다. 타닌, 산도, 바디감 등을 논하며 파커 포인트가 몇 점인지 찾아 본다. 마치 이 정도는 알아야 하는 것이 교양으로 여겨지고, 이 정도도 모르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커피도 와인과 다를 바 없다. 오감으로 즐길 수 있는 음료고, 동일하게 역사와 농장별 특성이 있다. 커피 종류에 따라 맛과 향이 다양하며 그 깊이도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우리가 커피를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다르다. 와인처럼 하나의 문화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카페인이라는 각성제를 섭취하기 위한 도구로만 소비한다. 내가 주문한 아메리카노에 어떤 커피콩들이 블렌딩된 것인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와인은 참맛을 느끼기 위해선 브리딩이니 디캔팅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커피는 참맛을 느끼려고 에스프레소를 주문하는 사람을 스놉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그레이웨일을 찾으면 와인만큼 재밌고 깊은 커피의 세계에 눈치 안 보고 흠뻑 빠질 수 있다. 매일같이 마시는 커피에 대해 그동안 얼마나 생각과 관심이 없었는지 조금은 부끄러워질 수 있으나, 사장님의 노련한 커뮤니케이션으로 대화가 끊이지는 않는다. 그레이웨일은 오늘날의 커피와 카페에 대한 아쉬움, 그 대안에 대한 고민이 곳곳에 묻어있는 카페다. 분명 돈을 벌기 위함이라면 피해야할 비효율적인 카페다. 그래서 “돈은 부업으로 벌면 된다”는 쿨한 사장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카페인과 더불어 대화에서 오는 각성으로 가슴이 뛰는 시간이었다.


[덕구]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살아야 행복하다는 말은 지겹도록 빤해서 토할 것 같지만, 어쨌거나 그 말을 실현하고 있는 사람을 마주하면 부럽기만 하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로 밥벌이를 하는 것만큼이나, 업으로 삼고 싶을 만큼 좋아하는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 역시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포함해서, 내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 말들 근처 어디쯤에서 표류한다.


마시는 걸 좋아해서요, 라는 그레이웨일 사장님의 말이 인상 깊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마시는 게 좋아서 카페 주인이 되었다는 말은 노래 부르는 게 좋아서 가수가 됐다는 말이랑 같은 말일 것인데 그 뻔한 말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다. 매우 보편적인 행위인 ‘마시는 것’이 업으로 삼을만큼 좋아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기 때문일까. 먹는 걸, 자는 걸, 걷는 걸 좋아하면 밥벌이는 무엇으로 해야 하는가. 디귿자 바 너머에서, 내가 어렵다고 생각한 일을 기어이 해낸 사람이 부러운 모습으로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내 삶의 풍경 속에서 커피가 주인공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출근길의 손 안에서, 일하는 책상 옆에서, 일요일 오후의 나른한 시간 속에서, 나의 말과 너의 말 사이에서, 커피는 없으면 허전할 작은 여백을 채우는 소품이었다. 커피를 사고 파는 카페에서조차 커피는 인스타감성에 자리를 빼앗긴 부(副)가 아닌가. 허나 그레이웨일 안에서 커피는 주(主)다. 누군가와 함께 있기 위해 커피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커피를 커피답게 마시기 위해 누군가와 함께 한다. 사람이 소품이고, 커피가 주인공이다.


밤이 깊어질 때까지 커피를 마시며 커피를 이야기했다. 커피 봉투에서 꺼낸 커피의 향을 맡았다. 암호 같던 원두 이름을 해석하는 법을 배웠다. 소박한 그라인더(가격은 소박하지 않았다)가 내는 소리를 들었다. 국자 속 달고나처럼 부풀어 오른 커피를 보았다. 과일 향과 견과류 향 사이를, 카라멜 향과 곡물 향 사이를 구분해보려 했다. 커피를 키우는 사람, 따는 사람, 수입하는 사람, 볶는 사람, 내리는 사람, 마시는 사람, 배우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구 온난화와 제 3세계의 빈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블루 보틀과 다도에 대해 이야기했다. 온전히 커피만을 위한 시간이 흘렀다.


몇 잔의 커피가 가져다준 불면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그레이 웨일을 발견해낸 순간을 떠올렸다. 정규 영업을 종료해서 아무 때고 갈 수 없는 공간이 된 것이 아쉽지만 미리 연락을 해야만 갈 수 있다는 수고로움은 제값을 한다. 캔커피를 좋아했던 소년이 브루잉 커피 전문점의 주인이 되기까지의 시간들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내고 그것으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의 행복감이, 그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다.


[희정]

커피를 마시며 커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던 시간, 떠오른 사람들이 있었다.


#예가체프

핸드드립 커피는 내게 익숙하지 않았다. 흔한 프랜차이즈 카페에 가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으며, 유명하다고 하는 카페에 가면 맛있는 크림이 올라가있는 에스프레스콘파냐와 같은 그 집의 시그니처 커피를 도전하고 기분 좋아하던 나였으니.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내가 의지하던 사수님은 커피를 좋아하는 분이셨다. 사수님으로부터 일을 해나가는 방법을 배웠던 것처럼 회사 근처에 있는 괜찮은 카페들도 사수님 덕분에 알게 됐다. “제가 생각할 때 여기 커피가 이 동네에서 제일 괜찮아요.”회사에서 십오분 정도 걸어가야 나오는 그 카페에 처음 갔던 날, 예가체프를 주문하는 사수님을 따라 나도 예가체프를 주문했다. 원체 산미 있는 커피를 좋아하는 나는 그 예가체프 한 잔이 마음에 들었고 출근 전 집에서 일찍 나와 그 카페를 혼자 찾는 일이 잦아졌다. 아무도 없는 아침 그 카페에 앉아 예가체프 한 잔을 마시고 있노라면 페퍼톤스가 부르는 ‘향기로운 예가체프 삶의 질이 높아졌구나’가 들리는 듯했다. 산뜻한 시큼함이 입안에 남아있다 사라지는 그 느낌이 좋았다. 향긋했다. 그 이후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사실 다른 원두의 맛을 잘 모르고 있었다) 원두 종류는 예가체프가 되어 가끔 드립커피를 마실 일이 있을 때마다 당당하게 예가체프를 외쳤다. 공교롭게도 그레이웨일에서 맛보았던 다섯 종류 남짓한 원두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도 예가체프였다.


#커피체리

그레이웨일의 사장님 덕분에 난생처음으로 카스카라티를 접할 수 있었다. 카스카라티는 커피체리의 과육을 활용한 차라고 하셨다. 은은하면서 상큼한 맛이 마음에 들었으나 지금 떠올려보니 정확한 맛이 기억나지 않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나는 이 차를 마시는 시점에서 또 사수님이 떠올랐는데 어느 카페에서 커피 과육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신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 또한 정확한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가끔 어떤 카페에서는 과육이 남아있는 원두를 사용해 새로운 맛을 접할 수가 있다는 이야기와 비슷했던 것 같다. 커피체리의 새로운 맛을 맛보며 작년 어느 날의 어느 대화를 기억해내려 노력해보았다. 언젠가 사수님과 다시 만나 커피를 마실 날이 온다면 그때 꼭 커피체리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리브레

사장님께서 소개해주셨던 원두 중 하나는 유명한 리브레의 원두였다. 리브레 원두를 내어주시는 그 순간 나는 내 친구 H를 떠올렸다. 약 4년 전의 어느 날 H와 나는 연남동의 한 카페에 들어가 라떼 두 잔을 시켰다. 각자의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놀라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서로를 바라보았던 기억이 있다. 산미 있는 커피에 고소한 맛의 우유가 균형 있게 섞인 그 라떼가 우린 정말 마음에 들었다. 그 카페가 리브레였고 우리는 그해 봄과 여름 셀 수 없을 정도로 자주 그 카페를 찾았다. 그 시절 나와 H는 막연한 시작을 맞이하고 있었는데, 만사 제쳐두고 동진시장 뒷골목에서 마주하는 아이스라떼 한 잔엔 언제나 마음이 가벼워졌다. 첫 번째 시험을 치른 날에도 우린 리브레에 갔다. 뭐 그딴 문제를 냈냐며 불평하는 우리들의 손엔 그 시절 우리가 가장 좋아하던 커피가 들려 있었다. 지금은 그 카페에 가지 않지만 여전히 어디선가 리브레 원두를 마주하면 그 시절 생각이 난다. 그레이웨일에서 오랜만에 마주친 리브레 원두는 여전히 훌륭했고 나는 H 생각을 했다.


#스타벅스

스타벅스를 그렇게나 많이 갔지만 그 이름의 유래가 무엇일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소설 <백경>에 등장하는 선장의 이름이 스타벅이었다는 것도 그레이웨일의 사장님을 통해 처음 알게 됐다. 매일 아침 출근하듯 스타벅스에 가던 시절이 있었다. 매일 얼굴도장을 찍어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나를 알아보는 분이 있었고 내가 주문할 메뉴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커피 소개를 넘어 나의 짧아진 머리에까지 관심을 주시며 해사하게 웃으시던 분이셨다. 그레이웨일 사장님의 말씀처럼 커피 한 잔을 소개하며 손님과 이야기를 나눈다는 건 일반적으로 흔한 일은 아니다. 프랜차이즈 카페에서는 더 그렇다. 우리가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느꼈던 아쉬움을 공유하던 때엔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소개해주시고 때론 근사한 인사를 건네시던 그분 생각이 났다. 향기로운 커피의 맛을 소개해준 사람, 그 시절 커피를 앞에 두고 끝도 없이 대화를 나누던 사람, 커피를 내어주며 매일의 안부를 물어봐 주는 사람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커피를 좋아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 한 잔 덕분에 별다를 것 없는 하루가 조금은 특별해진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레이웨일에서 한 잔 한 잔 정성스레 커피를 내어주셨던 사장님과의 시간 이후 나는 커피를 좀 더 좋아하게 된 것만 같다.



그레이웨일은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동에 위치해있다. 현재는 예약제로 운영되니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사장님과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고 싶은 분이라면, 사장님께 시간을 문의하고 방문하면 된다. (사장님, 감사했어요. 또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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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 :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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