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
주말에 엄마 아빠 집에 갔었다.
딸은 도둑년이라더니
진짜 많이 가지고 왔다.
주차장에서 집까지
4번을 왔다 갔다 하면서 짐을 옮겼다.
이번엔 꽤 괜찮은 것들을 많이 건졌다.
레이스로 덮인 밀크 초콜릿색 무스탕
사놓고 지하에 놔둬서 있는지도 몰랐던 큰 담요
이젠 작아서 못 입는다는 잠바
이젠 운동 안 해서 안 입는다는 룰루레몬 운동복들
사놓고 화려해서 한 번도 못 입었다는 모자 달린 랄프로렌 옷
몇 번 입었는데 나이에 안 맞게 너무 화려하다는 타임 스팽글 카디건
예전에 많이 사두었다는 쟈딕 스카프들
나이 들어 보인다고 그동안 안 가져갔던 소매에 비즈가 있는 까만 스웨터
그리고 살짝 보면 애플 같기도 한 얄팍한 키보드
그래, 일단 이 키보드만 있으면 컴퓨터로 글 쓸 때 목이 안 아플 것이야.
근데 핸드폰으로 쓰는 게 익숙해져서 그런지
지금 굉장히 어색하다. 몇 번을 지우고 다시 쓰고 지우고 다시 쓰고
몇 번 연습하다 보면 익숙해지겠지.
처음 모뎀을 접속할 때 생각이 난다.
유니텔에 들어가 채팅이라는 것에 맛 들여서 새벽까지 채팅을 했었지.
단체방에서 얘기를 하다 보니 내가 쓰고 싶은 말을 빠르게 손가락으로 해야
놓치지 않고 대답을 하거나 질문을 하거나 대화에 낄 수 있었다.
그래서 키보드 연습 프로그램까지 찾아서 혼자 연습하곤 했었는데..
외국어를 배우는 가장 빠른 방법은 그 언어를 쓰는 사람과 연애를 하는 거라 했다.
키보드를 배우는 것도 이 방법이 가장 빨랐다.
나는 사람을 좋아한 걸까
내 방에서 화면을 보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걸 좋아한 걸까.
키보드로 감정을 전달하는 방법을 먼저 배운 나는
그래서 글 쓰는 걸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새로 연결한 키보드는 적당한 높이에 적당한 끈적임을 가지고 있다.
큐브의 너비와 높이도 내 손가락과 잘 맞아서 편안하다.
아마도
이 키보드는 재미있는 연애 상대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