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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순정 Mar 25. 2020

코로나 대탈출 실패기

쌀나라 역병 르포 1_집콕만이 살 길

<3월 23일 _ Shelter in place>


    올 것이 왔다 싶었다. 워싱턴 주지사가 모든 주민에 대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한 '자택 대피'명령을 내렸다. 모든 초, 중,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정규 수업을 중단한 지 꼭 일주일 만이다. 사실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캘리포니아주나, 확진자가 폭발적으로 급증하고 있다는 뉴욕주에서 이미 주민들에게 자택격리 명령이 내려진 터라 예상을 못 한 바는 아니었다.


    요약하자면 '집에 있으라'는 것이다. 학교도 회사도 가지 말고, 친구도 만나지 말고, 식당도 가지 말라는 거다. 의료계 종사자나 필수 업종 (식료품, 주유소, 공무원 등) 종사자를 제외하고 모든 주민에게 해당되며, 어길 시에는 과태료 징수 등의 행정조치가 가해질 수 있다. 필수업무 종사자를 제외한 일반인들에게는 식료품 조달, 병원이나 약국 방문 등의 꼭 필요한 외출만이 허용된다. 야외활동은 등산, 산책, 자전거 타기 등 약 1.8m 이상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유지할 수 있는 것들만 가족 이하의 단위로 가능한데, 어린이 놀이터를 비롯한 체육시설은 이용이 금지된다.  


    애초에 코로나 사태를 겪었던 중국이 이틀에 한 번씩의 식료품 쇼핑만을 허용하는 '외출금지령'을 내렸다는 소식을 뉴스로 전해 들었을 때는 일당독재의 공산주의 체제라 가능한 조치이겠거니 생각했었지만, 불과 두세 달 사이에 '자유의 나라'로 일컬어지는 미국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했던 것이 아니라 그리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치료제 없는 신종 전염병과 싸워낼 재간이 없는 상황일 터다. 21세기의 미국 땅에서 생업과 학업을 접은 채 외출을 금지당하는 이 전대미문의 사건을 직접 겪게 될 것이라고는 한 달 전 미국 땅을 밟을 당시에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한 달 전_ 2월 26일_시애틀의 한 종합병원 암센터>


"Have you visited China or Korea in recent 2 weeks?(최근 2주 내에 중국이나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까?)"


    머리가 띵 했다. 한국에서 병원을 방문할 때마다 듣던 질문에 <한국>이 추가되어 있다. <중국> 이 아닌 <중국과 한국>을 지칭한 것으로 보아 이들은 이미 한국을 코로나 위험국가로 분류해 버렸구나 싶어 서글프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순간, 이들이 지정한 위험인물임을 밝혀야 한다. 그래서 짧고 단호하고 또 당당하게 커밍아웃(?)을 했다.


"Yes! I visited South Korea and got back a few days ago.(네, 한국에 갔다 며칠 전에 돌아왔어요)"


    모니터에 시선을 그대로 둔 채 건성으로 매뉴얼에 정해진 질문을 읊었던 접수대 직원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화들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초록빛 눈동자가 마구마구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아, 이게 바로 '동공 지진'이로구나! 아마도 그는 요 며칠 사이 이 질문을 수도 없이 던졌겠지만 유의미한 대답을 준 이는 내가 처음임이 분명해 보였다. 그는 옆자리에 앉은 상급자로 보이는 중년 여성에게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건넸다. 마치 전염병인 양, 동공 지진은 삽시간에 그녀에게도 옮아갔다. 코로나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전염력이 상당했다. 그녀는 발열이나 기침, 호흡곤란이 있느냐는 추가 질문을 던졌고, 나는 최대한 여유 있게 웃으며 없다고 대답해줬다. 그러고 나서야 우리를 둘러쌌던 긴장감이 수그러들었다.


    십여 분을 기다린 뒤 진료실로 안내받았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진료실로 들어온 새 주치의, 닥터 로빈슨은 한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한국에 바이러스가 많이 퍼져 걱정이 많겠다는 위로로 첫인사를 건넸다. '나이스 타이밍'에 잘 돌아와서 다행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돌아와서 기쁘지만 그래도 가족들과 친구들이 한국에 있기 때문에 여전히 걱정이 많이 된다고 대답했다. 코로나는 '남의 일'이었고, 우리는 '남의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 나라 이야기를, 나는 고국에 있는 친지들 이야기를. 온도의 차이는 있지만 둘 다 '남의 얘기'였고 우리는 안전한 곳에 있었다. 그때까지는.




    2019년은 나에게 그야말로 '버리는 해'였다. 동생 결혼식 참석차 2년여 만에 방문한 한국에서 예기치 못하게 유방암 진단을 받는 순간 인생이 심각하게 꼬여 버렸다.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남편은 홀로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미취학 아동 둘을 돌봐야 하는 암 걸린 엄마 기러기 생활은 너무도 힘겨웠다. 37년을 살아오며 평생 흘린 눈물의 몇 배는 쏟아냈으니까. 좀 엉뚱한 이야기지만 너무 많이 울면 얼굴 근육이 아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항암치료를 받고 병원에 입원해있는 동안은 아빠 기러기가 날아와 아이들을 돌보고, 내가 퇴원을 할 때면 다시 돌아가는 생활을 1년 가까이 이어왔다.


    1년이라는 기간을 마무리하고 미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웠다. 타지 못하고 연기해야 했던 리턴 티켓 유효기간이 1년이었고, 친정 옆에 아이들과 머물기 위해 계약했던 월세 아파트의 계약 기간도 1년이었다. 큰 아이는 새 학기부터 유치원에 다녀야 하지만 어디에 살아야 할지 몰라 어디에도 원서를 넣지 않았다. 다만 아직 표적항암제 치료가 반년 이상 남아있었지만 까짓 거 병원 옮겨서 미국 암센터도 한 번 다녀보자 싶었다. 사실 미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그리하면 인생의 꼬인 매듭이 풀릴 것 같은 비논리적인 기대감 때문이었다. 고향에서의 삶은 편안하고 익숙했지만 투병생활의 음울한 기억으로 채워져 더 오래 지속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미국행을 더 서두르게 만든 것은 이 망할 신종 코로나라는 녀석도 한몫했다. 남의 나라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코로나는 어느새 남의 동네까지 올 정도로 가까워졌고, 신앙의(?) 힘을 빌어 전국 방방곡곡에 기하급수적으로 퍼져나갔다.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 며칠 전에는 우리 동네에도 확진자가 무더기로 생겨났는데 열이 나는 채로 이틀 동안 영업을 한 택시운전기사도 포함되어있어 지역민들의 걱정은 더욱 커져갔다. 항암치료로 면역력이 약해져 있는 터라 내게 코로나 바이러스는 거의 공포에 가까웠고, 하루라도 빨리 탈출해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이미 중국 방문자의 입국을 거부한 미국이 확진자가 급증하는 한국에 대해서도 혹시 어떤 조치를 취할지 몰라 비행기를 타는 날까지도 불안감이 가시질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네 식구는 무사히 입국을 하고, 일 년 만에 완전체로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치료를 이어갈 수 있는 새 병원을 찾았고, 의료진과 시설 모두 마음에 들었다. 촉촉하고 상쾌한 시애틀의 공기는 여전했다. 마스크 없이 맑은 공기를 마시며 공원을 거닐 수 있는 자유가 참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코로나 탈출 작전은 성공한 듯 보였다.


    탈출 성공의 달콤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일주일 남짓 지났을까,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이웃 동네 요양원에서 노인들의 집단 감염과 이로 인한 사망자가 무더기로 나온 것을 시작으로 상황은 급 반전되었다. 해외 방문자에 대한 자가 격리 권고가 내려졌고, 그다음엔 학교가 문을 닫았다. 사람들은 식료품과 생필품을 사재기하기 시작했고, 미국 인구의 4분의 1 가량이 외출금지 명령에 처해졌다.


탈출 시도는, 대 실패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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