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창에 ‘봄날은 간다’를 입력 한 건 어떤 연유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첫 이별을 하고 본 영화라서 그랬을까. 물 밖으로 꺼내진 물고기처럼 이별에 헐떡이는 상우의 모습에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위안을 받았었다. 사운드트랙이 돌아간다. 상우(유지태)와 은수(이영애)의 목소리와 숨소리가 담겨 있는 트랙들은 머릿속에서 여러 영화 장면을 재생시켰다.
트랙 4. 사랑의 인사(theme for 은수) <4:07>. 처음 알게 된 곡과 뮤지션은 나의 세계를 넓혀간다. 이 트랙의 가사와 멜로디, 뮤지컬 배우 이소정 씨가 부른 한 곡이 사운드트랙 앨범을 내 방에 들여놓고 싶은 이유가 되었다. 당시 번개장터에 한 명의 셀러가 판매하고 있어 바로 사들였다. 동영상 플랫폼에서 듣는 곡들도 부족함이 없었지만 앨범 재킷이 끼워져 있고 음반이 들어 있는 케이스를 손에 올려두고 싶었다. 손에 있으면 언제든 이 영화를 봤던 즈음의 나에게 일어났던 일들과 세월에 아련해지는 것들을 더듬어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처음 알게 된 곡과 뮤지션에 관한 것들을 찾아가며 나의 세계가 넓어졌듯 세상과 사람들에게 내가 세운 벽을 허물면서 구김살이 진 마음씨가 너그러워져 간 날들이 있었다. 그 시작은 무언가 쓰고 쓴 것을 낭독하는 사교모임 광고를 보면서부터였다. 뭐라도 좋으니 좀 써보고 싶어 나갔다.
두 번째 모임 이후로 무언가 쓰기 위해 나갔던 모임의 목적은 그녀를 보는 것으로 바뀌었다. 격주로 이루어지는 만남에 앞서 목요일 밤이면 수염을 다듬고 토요일에 입을 옷을 골라 다려 두었다. 그 모임에 가는 일은 그 당시 매일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 하루를 버티고 집으로 돌아오는 유일한 이유였다. 어떻게든 두 주만 보내면 그 사람을 보게 되었다. 네 번째 모임에서 집이 가장 먼 내가 제일 먼저 모임 장소에 도착했다. 당일 모임은 시작되었고 시간이 꽤 지났어도 그녀는 오지 않았다. 세 시간의 모임을 마치고 확인한 단체 대화방에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불참하게 되었다는 그녀의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다.
‘저 오늘 몸이 너어무 안 좋아서 못 갈 것 같아요. (중략) 몸 상태를 보아하니 무리해서 가는 것보다 푹 쉬는 게 나을듯싶어서요. 불참해서 죄송합니다. 모두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다시 이 주를 기다리면 사 주, 그녀를 보려면 한 달을 기다려야 했다. ‘여기 오는 이유가 당신인데, 당신이 안 오면 나는 어떡해….’ 내가 버텨내야 할 일상이 깜깜했다. 거기서부터였다. 목각인형을 조종하는 여러 줄 중에서 몇 가닥 줄이 끊어져 버린 듯 나는 그날 종일 여러 가지에 서툴렀다.
모임을 마치고 뒤풀이 장소에 조금 있다가 가겠다고 말하고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다. 합정동에서 압구정 로데오역에 있는 안경 브랜드 쇼룸에 가야 했지만 압구정역에서 한참을 헤매다 가까스로 알아차리고 압구정로데오역으로 가는 열차를 탔다. 출구로 나와서도 꽤 헤매다가 쇼룸 마감 오 분 전에 입장해서 제대로 피팅도 못 해보고 쇼룸을 나왔다. 다시 뒤풀이 장소 홍대입구역으로 갔다. 남겨준 주소의 횟집을 찾아 들어갔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식당이었다. 이미 제법 술기운이 오른 벌건 얼굴의 사람들 앞에 굴 껍데기가 뒤얽혀 쌓여있었다. 그 분위기 속 대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체인이 빠져버린 자전거 페달을 구르듯 내가 대답하는 말들은 사람들 말에서 대부분 겉돌았다. 취기가 오른 채 나에게 하는 말이 거슬리게도 들렸다. 점점 내가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함께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이 자리에 참석해 있을 이유 역시 그랬다. 정확히 말하면 찾을 수 없다. 애초에 그녀가 없었기에. 그녀가 없는 모임에서 숨 쉬는 일을 제외하면 어떤 행위에도 동기부여를 받지 못했다. 기차 탑승 시간까지 꽤 여유가 있었지만 핑계를 대며 빠져나왔다.
그날은 도깨비 날이었다. 나는 종종 순서와 방법이 사리에 맞지 않아도 이래저래 진행되거나 생각지도 못한 이상하기만 한 일들이 가득한 날을 도깨비 날이라 부른다. 오늘은 후자의 경우다. 출발 시각까지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플랫폼에 들어와 있는 고속열차 차량에 올랐다. 종일 도깨비들에게 휘둘려 다니던 나는 기차에 오르기만 하면 도깨비 날이 끝날 거로 생각했다. 창가 쪽 좌석에 몸을 파묻고 아직 출발 전 기차에서 멀거니 창밖을 보고 있다가 메시지를 받았다.
‘나 좋아해요?’
내가 기다렸던 그 사람이 좋았기에 그 모임이 좋아졌다. 그래서 모임 멤버들에게 상냥히 대하려고 했을 뿐이었지만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오해하게 해서 송구하다는 장문의 메시지를 남겼다. 좌석에 몸을 던지며 눈을 감았다. 하- 한숨을 내쉬고 한동안 꼼작하지 않았다.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섯 번째 모임에서 모임이 시작되었지만 그녀는 오지 않고 있었다. 단체 대화방에 특별한 메시지를 남기지 않았으니 오지 않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모임이 시작되고 다들 무언가 바삐 쓰고 있었다. 나는 조금 끄적거리다 유리문을 쳐다보는 일의 반복이었다. 밖에서 들리는 작은 소리에도 고갤 들어 문을 바라봤다. 그녀였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감출 수 없는 미소로 고갤 숙여 인사했다. 그녀 역시 문을 열기 전에 늘 지어주던 코에 주름이 지어지는 미소로 고갤 숙여 인사해 주었다. 오랜만에 본 그녀는 어딘가 핼쑥해져 있었다. 그날도 몸이 좋지 않다고 했다.
저녁녘. 중국음식점 앞에서 붉은 반점이 올라온 볼에 눈을 깜빡이며 말하는 모습이 귀엽게만 보였다. 대부분 맥주와 소주를 섞어 마셨지만 그녀는 콜라를 주문했다. 내가 참석하지 못할 수도 있는 마지막 한 번의 모임을 앞두고 그녀와 마주 앉아 있는 저녁 자리였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할 말 없이, 말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다가 내가 물었다.
“혹시 콜라 다 드셨어요.”
“아니요. 그만 먹으려고요.” 그녀가 말했다.
“이거 제가 가질게요.” 나는 그녀 앞에 놓인 콜라 캔에서 캔 뚜껑을 떼어냈다. 갑작스러운 나의 행동에 전부 나를 쳐다봤다. 그 당시 나는 바지에 걸고 다닐 체인을 만들기 위해 캔 뚜껑을 모으고 있었다. 대략 백여 개가 필요했다. 언젠가 만들어질 체인의 마감을 그녀 손길이 닿은 캔 뚜껑으로 완성하고 싶었다.
마지막 모임,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유난히 반짝이던 눈을 보며 대화했는데 오늘이 마지막이 될까 봐, 마주 서 있는 둘 사이에 닫혀 버리면 열리지 않는 문이 날까 봐 속이 탔다. 더 할 수 있는 게 없어 고갤 숙여 인사했다. “조심히 가세요.” 눈을 바라보았다. 그 짧은 눈 맞춤에도 깊게 담았다. 아주 깊게. 기약은 없지만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했다. 시린 날들의 온기가 되어줄 것 같아 가슴 한편에 품었다. 겨울의 어느 날에 마주해도 내게는 그날이 봄이 될 것 같았다. 하행선 열차에 앉아 오후의 햇볕이 드리우는 선로를 보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 곡 반복 기능이 없는 무인양품 시디플레이어 리모컨을 눌러 4번 트랙으로 되감는다. 4분 07초마다 되풀이했다. 나의 방 베란다 창문을 열고 10층 아래의 봄을 콧속에 흠뻑 들이킨다. 만질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는 바람 같은 봄날을 흠뻑 들이마셨다. 돌아서면 내가 들이쉰 봄날은 갔다. 이미 가버렸다. 몇 번이고 되돌아올 나의 봄날은 간다. 가버린 봄날은 몇 번이고 되돌아온다. 인사가 하고 싶다. 그날처럼 닫혀버렸던 문을, 열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문을 바라보고 있다. 언제고 문이 열리게 된다면 먼저 알아보고 인사하고 싶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가고 싶다. 그날처럼 미소 지으며 받아 주기를 기대해 본다. 문이 열리면 봄날은 간다. 열린 문으로 봄날은 온다. 바람을 일으켜 계절의 문을 두드릴 봄날을 기다려 본다.
‘나를 찾아왔네 약속한 듯 이 가슴에
환한 빛을 안고 인사하네 기다려온 나를 향해’
‘이 사랑을 받아도 되는 걸까
그대 목소리 그대 향기가 꿈을 꾸듯이 내게 안기네’
‘고단한 지난 얘기 잊으라 하네 손 내밀며
그대 목소리 그대 향기가 꿈을 꾸듯이 내게 안기네’
‘애써 돌아서 나를 찾았나요
이제 만났어요 그대 반가워요’
트랙 4. 사랑의 인사(theme for 은수) <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