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잠시라도 잊게 된다. 걷다 보면 발에 차여 보도블록 위를 물 위 소금쟁이처럼 튕겨 나가는 돌조각이나 거리 위 사람들 옷차림이나 행동에 시선이 가면 뭐든 아주 잠시 잊게 되어있다고 말하는 게 좀 더 구체적일 것 같다. 잊기 위해 잠시라도 잊기 위해 집을 나섰다. 현실을 피해서 집에서 나와 무작정 걸었다. 지난밤 현관에 벗어놓은 모습 그대로 쉬고 있던 신발 밑창에 닿는 어제도 걸었던 거리가 금세 익어간다. 현실도피라는 것조차 잊어갈 무렵 세상이라는 러닝머신 위를 걷고 있는 것 같아진다. 분명 목적을 가지고 집을 나섰지만 걷다 보면 목적이라는 게 없는 듯 걷고 있다. 집에서부터 걷기 시작해서 먼 거리를 걸어왔으니까 계속 그랬으니까 걷고 있다.
현실 도피는 내가 살아오는 동안 빈번한 일이었다. 내가 도망만 다닌다는 생각이 든다. 현실에서 생각에서 가족에게서 소설로 몸과 의식을 피했다. 공간을 찾는 일은 공인중개사의 도움 받지만 내가 찾는 곳은 중개 서비스라는 게 없다. 임대료가 발생하지 않는다. 발품만 늘어갈 뿐이다. 오전에 일어나 부엌에 있는 음식들을 입에 구겨 넣고 식구 중 누구라도 집에 오기 전에 밖으로 나가 걷고 또 걷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집 근처로 왔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아 동네를 몇 바퀴 더 돌다가 집으로 들어갔다. 현실에 꼬여있는 감정들을 걸음으로 풀려 했다. 그리고 지쳐 꿈 하나 없는 잠에 들었다. 눈을 뜨면 요기하고 허겁지겁 나갔다. 현실에서는 걸어도 걸어도 현실이었다. 단지 걷다 보면 발에 걸리는 돌조각에 몇 초, 지나가는 사람 표정에 몇 초, 문득 드는 지난날 생각에 몇 분, 지쳐가는 종아리 근육통에 멈춰서서 잠시나마 잊혔다. 그러려고 나가 걸었다. 망각이라는 도피처로의 입장이었다.
이천이십삼년 육칠월은 많이도 걸었다. 그렇다고 일상의 지도를 벗어나 생소한 곳들을 다닌 것은 아니다. 당연히 가던 장소들을 시간과 요일을 바꿔가며 날씨에 따라 돌아다녔다. 똑같은 곳을 가도 같은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지역 축제에서 꽤 오래 활동해 온 밴드를 알게 되고 교보문고 직원들 얼굴이 익어갔다. 내 방에서든 외부에서든 창밖으로 보는 일상의 풍경이 나의 감정에 따라 필터가 끼워진 듯 이전에 보던 것과는 무엇인가 미묘하게 달리 보이곤 했다. 불안한 감정대로 보이는 것만 같은 더운 공기의 어수선함과, 평안한 감정대로 느릿하게 움직이는 공기의 흐름이 그랬다.
더는 못 해 먹을 일이라 느꼈던 밤이었다. 온몸이 땀범벅에 발바닥이 아팠다. 더는 갈 곳이 없다. 육 킬로그램이나 빠져있었다. 머리카락도 많이 빠졌다. 어렸을 적부터 나는 도망만 다니는 것 같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도망갈 수 있는 곳까지. 그리고 나는 결국 또 한 번 도망쳤다. 나의 앞날에 마음 써주던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그들이 바라는 안정이 보장된 자리에서, 안정을 보장할 수 없고 여전히 불안하지만 내가 있고 싶은 자리로. 쏟아지는 장맛비에 두 발이 다 젖어가며 찾아가 어느 건설사의 자리를 고사했다. 도움을 주신 분께 너무나도 송구했다. 내리는 비만큼 굵은 눈물방울이 테이블에 뚝-뚝- 떨어졌다. 그간 지극히 울고 싶어 노래[1]를 불러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터져 나와 당혹스러웠다.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2]’, 도망쳐 온 지난날 기억을 헤집어 가다가 생각나는 드라마가 있다. 발전적이지 못한 선택을 하고 부끄러운 모습으로 도망쳤다고 해도 어떻게든 잘 넘겨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가 담긴 헝가리 속담에서 타이틀을 따온 드라마였다. 망각이라는 도피를 찾아가는 발품은 어떤 면에서는 분명 도움이 되었다. 지도가 확장되었다. 잃어버린 영역을 되찾기도 했다. 멀어졌던 오랜 친구에게 십이 년 만에 전화를 걸고 그를 찾아갔다. 십구 년 만에 프로축구 경기장에 갔다. 가족으로부터 몸을 피해 간 서점에서 글을 쓰는 행위는 가장 훌륭한 의식의 도피처였다. 키보드를 눌러가다 보면 대략 두 시간 정도 지나있었다. 화장실 한 번 가지 않은 몸은 앉아 있던 의자에 그대로 있는데 넋이 다른 시공간에 다녀온 듯하다. 귀 뒤로 맥박처럼 피가 뛰는 게 느껴진다. 그 피로감이 머릿속을 가분하게 했다.
지금 나는 또 한 번의 도피를 계획하고 있다. 이번에는 걸음이 아닌 차를 사용해서 하려 한다. 운전 연수를 받을 예정이다. 새로 일하기로 한 자리에서 언제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어, 겁이나 피했던 운전을 스스로 찾아 할 작정이다. 어떤 업체에서 얼마 동안 얼마만큼의 비용으로 할지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발품을 팔고 있다. 여태껏 피하고 싶은 게 현실이든 다른 무엇이든 그저 잊기 위해 집을 나갔다면 이제는 받아들이려 나서고 싶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삶이 주는 것들에 그래왔듯 도망도 다니면서 나를 두려움에 벌벌 떨게 했던 것들에도 성큼 걸어 나서보려 한다.
[1] 울고 싶어라. 이남이.
[2]일본 드라마 TBS 방영[아라가키 유이, 호시노 겐 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