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문을 열자마자 떨어진 꽃봉오리가 보였다. 카운터에 꽂아둔 백합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꽃꽂이를 하는데 저번주에 온 백합은 꽃이 거의 피지 않은 상태였다. 만개한 것보다 좋았다. 절정은 내리막의 꼭대기이기도 하니까. 차근차근 피고 지는 걸 보자 싶었다. 연둣빛 꽃봉오리도 꽃과는 다른 아름다움이 있었고.
꽃망울이 많아서 곧 앞다퉈 터질 줄 알았는데 지지부진하더니 꽃망울 채 시들었다. 암시 같았다. 가능성이 가능성으로 끝날 수 있음. 가령 나는 작가가 될 수도 있다. 오랫동안 읽고 쓰며 그 가능성과 함께 해왔다. 혹은 작가가 될 가능성이 있던 사람에 그칠 수도 있다. 아무것도 안 될 수도 있다. 가능성을 주렁주렁 달고 시들 수 있다.
터질 듯 부푼 꽃봉오리를 눌러보았다. 터지지 않았다. 안에 꽃이 들어있을 것 같아서 한 겹 한 겹 벗겨 보았다. 갓 벤 풀 냄새가 났다. 꺼풀을 벗겨도 꽃은 없었다. 양파 심 같은 게 나왔을 뿐이다. 과연 꽃은 들어있는 게 아니라 피어나는 것. 내 안에 내가 모르는 훌륭한 작가가 들어있는 게 아니라 내가 좋은 작가가 되어가는 것.
언젠가 본 댓글이 생각난다. 고민 프로그램에 무명 배우가 나온 편이었다. 요는 가능성이 있는 상태에 중독된 사람들이 있다는 것. 특히 예술 쪽. 이런 사람들은 가능성이 있는 상태에 머무르고 싶어서 자기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받는 걸 피한다. 배우가 될 수 없다고 평가받는 것보다 가능성이 있는 상태가 좋으니까. 성공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어설픔을 인정하고 부딪히고 깨지면서 성장해 나가지만 가능성에 중독된 사람들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도전도 안 한다.
섬찟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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