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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딘도 Apr 27. 2024

부슬부슬 학원 사냥기

워킹맘의 비애

5월이 다 되어가는 지금은 말할 수 있다. 3월이 나에게 얼마나 지독했는지를.


아이는 3월에 유치원에 입학했다. 두 곳의 어린이집을 다니면서 적응문제는 없었던 터라 그 부분은 전혀 걱정이 없었다. 오죽하면 유치원 오리엔테이션에서 담임선생님을 만나 그 부분은 염려되지 않는다는 말까지 했을까.


그러나 내가 아이를 잘못 알았던 걸까. 아니면 아이가 그 사이에 훌쩍 자라 뭘 알만한 나이가 된 것일까. 아이는 3월 내내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펑펑 울었다. 그것도 매일, 밤낮으로, 심지어 유치원에서도.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아이는 다른 것을 바라는 게 아니었다. 아침에 같이 셔틀버스를 타고 가는 친구들처럼 집에 올 때 셔틀버스를 타고 오고 싶다는 것. 그러나 그 평범한 바람을 나는 들어줄 수가 없었다. 나는 비운의 이름, 워킹맘이니까.


8시부터 17시부터였던 근무시간을 9시부터 18시까지로 옮긴 것도 순전히 아이 때문이었다. 아파트에 셔틀버스가 8시 35분에 오기 때문에 등원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나마도 집과 회사가 가까우니 가능한 스케줄이라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나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된 것일까. 같이 셔틀버스를 타고 등원한 친구들은 오후 3시 30분이 되면 다시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데, 아이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것이 속상했던 모양이다. 등하원 코스에 따라 두 번에 걸쳐 친구들이 빠져나가고 나면, 두 반 합쳐 총 46명의 아이들 중 겨우 6명이 남았다. 그리고 그중 한 아이가 우리 아이였다.


낯선 것에 적응하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한 우리 아이(라는 사실도 3월 내내 혹독하게 겪으며 알게 되었다)는 새로운 환경, 새로운 친구들, 새로운 선생님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음을 격렬한 울음으로 표현했다. 큰 소리로 울며 하는 말은 늘 똑같았다.

 

유치원에서 버스 타고 집에 오게 해주세요!


안 간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일찍 오고 싶다며 우는 말에 너무 마음이 아팠다. 일을 관둬야 하나, 사람을 써야 하나, 단축근무를 해야 하나 온갖 고민에 사로잡혔다. 멀리 계신 친정부모님도 도와주지 못하는 마음에 끙끙대시고, 무뚝뚝한 아버님마저 하원도우미를 자처하시기까지 했다.


결국 비가 오는 어느 날, 점심시간에 우산을 들고 회사 주변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회사 주변이 곧 집 주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목적은 단 한 가지. 이제 겨우 40개월이 된 아이가 셔틀버스를 타고 하원하고 나면 내가 퇴근할 때까지 다닐 학원들을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눈을 부릅뜨고 걸어보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영어, 수학, 미술, 피아노, 태권도, 검도, 유아체육 등 종류에 따라 여러 개의 학원이 즐비했다. 그럴 시간도 안되고 상담일정을 잡은 것도 아니라서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밖에서 분위기를 살피거나 써붙여 둔 교육과정을 꼼꼼히 읽어보곤 했다.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게시해 둔 곳도 있어서 어플을 켜고 들어가 학원 운영의 면면을 살피기도 했다.


이내 현타가 왔다. 이제 막 다섯 살이 된 아이를 두고 내가 뭐 하는 짓이지. 하원 후 학원 뺑뺑이라니. 나의 교육철학과 전혀 맞지 않는 일이었다. 어린 나이부터 학원을 보내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던 나였다. 그런 내가 이제 점심시간을 쪼개 눈에 불을 켜고 학원을 찾고 있다.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하원시간과 퇴근시간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나라에서 출산율을 높이겠다고 온갖 '돈 주는' 정책을 펼치는 것이 다 소용없다고 느꼈다. 내가 진짜 필요한 것은 아이를 키울 '돈'이 아니라 내 아이를 내가 직접 돌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마음까지 울적해졌다. 


오늘밤에도 아이는 울겠지. 내일 아침에도 아이는 울 것이다. 유치원 버스를 타기 싫어서 온몸으로 버티는 아이를 겨우 버스 안으로 밀어 넣고 출근하는 아침마다 마음이 아팠다. 안간힘을 쓰며 버티는 아이를 힘으로 이기기 위해 어찌나 용을 썼는지 씨름 대회를 마친 사람처럼 몸이 뻐근하기까지 했다. 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당시에는 그것이 가장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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